일몰까지 두 시간이 남았을 때, 역에 또 한 명의 피엘이 도착했다.
똑같은 회색 제복에 똑같이 닳은 가방끈이었다. 표찰에는 '신탁 배송 담당 피엘'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승강장에 내려서자마자 허리를 정중히 굽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명 보관실에서 자동 파견된 임시 발신권 관리 대리자입니다. 인장을 수령하러 왔습니다.”
토비는 피엘을 보았다가 새로 온 이를 보았다. “왜 제 눈에는 둘 다 피엘 씨 같죠?”
벤이 대답했다. “하나는 과로로 표정이 죽었고, 다른 하나는 원래 표정이 없는 것 같군.”
가짜 피엘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피엘은 성급히 '가짜'라고 부르지 않았다. 과거에 직무명이 여러 번 복제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대리자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방문 목적은 원본 인장 수령입니까?”
“예. 서온의 판단을 '사용 허가'로 정정하는 즉시 가능합니다.”
“서온의 승인을 받았습니까?”
“그의 첫 판단이 300년간 정지 상태였으므로 대리 정정이 허용됩니다.”
서온의 통신판이 끼어들었다.
[허용한 적 없어. 그리고 방금 거절했어.]
대리자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귀하의 거절은 시스템 개선 요청으로 자동 접수됩니다. 검토 중인 요청은 승인 상태로 유지됩니다.”
“이거 대체 무슨 말장난입니까?” 토비가 벌떡 일어났다.
대리 피엘의 장갑에는 낡은 수리 자국이 있었다. 겉에서 보면 누군가 오래 사용한 옷 같았지만 안쪽에는 전혀 다른 이름의 납품 표지가 겹쳐져 있었다. 제3문, 제4문, 제6문. 피엘은 자신을 닮은 대리자가 얼마나 많은 경로를 거쳐 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당신은 자신의 시작을 기억합니까?”
“업무 개시 시각은 항상 오늘입니다.” 대리자가 답했다.
“그 이전 기록은요?”
“연속성을 위해 삭제되었습니다.”
토비가 화를 냈다. “기억을 다 지워 놓고 일을 시키면 본인은 뭘 보고 판단합니까?”
대리자는 토비를 빤히 쳐다봤다. “판단은 승인된 규칙을 이용합니다.”
“그 규칙이 틀렸으면요?”
그때 대리자의 눈꺼풀이 조금 떨렸다. 대답 대신 서류 한 장이 인쇄됐다. 문서 제목은 '규정 오류 신고 불가'. 그가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이유까지 규정돼 있었다.
피엘은 서류를 보고 자신이 예전에 얼마나 자주 '규정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던가를 떠올렸다. 물론 그때의 자신과 지금 눈앞의 대리자가 같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그대로 전달하는 일이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는 알 것 같았다.
“당신이 어떤 구조인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피엘이 말했다. “당신에게도 임무의 출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어야겠죠.”
대리자는 처음으로 서류를 바로 넘기지 못했다. “그런 기록은 제 소유가 아닙니다.”
벤이 고개를 저었다. “어떤 존재에게 자기 일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알려 주지 않으면, 나중에 남에게 책임을 돌리기 정말 좋겠군.”
바로 그때 복도 끝으로 긴급 전보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종점 바깥에서 보내온 구조 요청이었다. 먼 남쪽 언덕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마차가 길에 갇혔다는 소식이었다. 약이 필요한 환자가 있었다. 대리자는 그 요청서를 즉시 받아들고 흔들었다.
“긴급 구조가 필요합니다. 정정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면 구조 발송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피엘의 얼굴이 굳었다. 예전에 여러 문에서 본 협박이었다. 신탁을 거부할 자유와 긴급 지원을 묶어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을 잃게 만드는 방식. 그러나 지금은 실제 환자가 있었다. 늦어질수록 위험했다.
“구조 요청의 출처와 위험 상태를 먼저 확인합니다.” 그가 말했다. “일몰 시각과 별개로 구조 절차를 진행할 권한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구조 요청서에는 환자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대리자는 그 빈칸을 보자 곧바로 ‘신원 불명, 처리 대기’라고 표시했다. 피엘은 진료소에 연락해 이름을 물을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했다. 진료소에서는 의식이 불분명한 환자를 우선 이송할 예정이며, 신원 확인은 치료와 병행하겠다고 답했다.
“이름이 없으면 안 도와준다는 규칙은 없잖아요.” 토비가 말했다.
“제6문에서 이미 확인한 사항입니다.” 피엘은 대리자에게 답신을 보여 줬다. “현재 위험을 확인할 수 있다면 긴급 구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환자의 다른 권리까지 위임받는 것은 아닙니다.”
대리자는 그 말을 오래 읽었다. 그는 평소 하던 대로 ‘수신인 미확인’ 칸을 빨갛게 칠했지만, 이번에는 아래에 작은 글씨를 추가했다. ‘생명 보호 조치 별도 검토.’ 자신의 기존 항목과 다른 문장을 처음 적은 것이었다.
에다가 종점 뒤편의 낡은 구급 종을 가리켰다. “저 종은 발신 인장이 없어도 울릴 수 있어. 다만 구조 대상과 목적지를 적어야 해.”
“그럼 즉시 현장 확인을 요청해 주세요.”
세아는 언덕 마을의 진료소와 연락했다. 실제 산사태가 맞았다. 무너진 길 때문에 약품이 막혔지만, 진료소에는 대체 이동로와 인근 구조대가 있었다. 정식 신탁이 아니라도 구조대 출동을 요청할 수 있었다. 토비는 우편 가방에서 물과 붕대를 꺼냈다.
“전투용 비상식량은 챙기지 못했는데 이런 건 있네요.”
“그게 더 유용할 때가 많아.” 벤이 말했다.
대리자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 경로를 사용하면 중앙 발신권 회복 실적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피엘이 고개를 들었다. “실적은 구조 대상자의 안전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규정상 개선 조치로 자동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분류하지 마십시오. 구조는 구조로, 서명 문제는 서명 문제로 기록해 주세요.”
에다가 구급 종을 쳤다. 맑고 긴 소리가 종점 밖으로 뻗어나갔다. 남쪽 마을에서 보낸 답신은 짧았다. '현장 구조대 출동, 환자 이송 준비.' 누구의 인장을 훔치지도 않고 실제 도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리자는 종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픈 듯한 표정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렇다면 제가 수행할 일은 무엇입니까?”
피엘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수령인이 없을 때 대신 수령한다. 답장이 없을 때 대신 답한다. 지연된 업무를 없앤다.”
“그 가운데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대리자는 오래 침묵했다. 처음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입술이 떨렸다. 자기 임무에 담긴 각 동사는 누군가의 대답을 없애야만 성립했다. 서온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당신도 나처럼 빈칸에서 만들어졌나?]
“저는 역할입니다.” 대리자가 답했다.
[그건 내 질문의 답이 아니야.]
벤은 대리자의 표찰 뒷면을 보았다. 300년 동안 여러 부서에서 사용된 자동 직무 표였다.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수령인의 부재를 대신하는 역할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역할이 자신을 한 사람처럼 착각하도록 설계된 흔적도 있었다.
“저 사람을 서온처럼 대하라는 얘기는 아니야.” 벤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역할의 책임과 그걸 만든 사람의 책임은 구별하자고.”
일몰을 알리는 시계가 첫 번째 종을 울렸다. 대리자는 품에서 검은 인주를 꺼냈다. 복제된 피엘의 손바닥에 뜨거운 글자가 나타났다.
[일몰 자동 서명 개시.]
[승인 근거: 서온의 침묵.]
“서온은 이미 대답했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대리자는 멈췄다. 인주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의 손을 대신 움직이고 있었다.
서온이 외쳤다.
[손을 멈춰. 내가 네게 맡기지 않았어!]
그 말이 역 천장 전체에 울리자, 대리자의 표찰 아래 숨겨져 있던 작은 버튼이 드러났다.
[발신 명령 외부 공급원: 종점 하부 배선실.]
제13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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