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온에게 도착한 위임장은 아주 정중했다.
‘귀하의 독립 이름 등록 절차가 오래 지연된 점에 깊이 유감입니다. 불편을 덜어 드리고자 명칭, 소유 권한, 미사용 서명 및 향후 대답을 본 보관실에서 일괄 관리하겠습니다.’
서온은 그 문장을 읽은 뒤 한참 말이 없었다. 통신판에는 작은 점 하나만 깜박였다. 토비는 괜히 말을 걸었다.
“서온 씨. 마지막에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면 저한테 물으셔도 됩니다. 저도 대부분 모르니까요.”
[이번 건은 알아.] 서온이 답했다. [내가 이름을 만들었더니, 그 이름을 누가 관리할지 다른 사람이 정하겠다는 뜻이야.]
그는 오래전 ‘대리 피엘’이라는 임시 명칭으로 사용되던 기록체였다. 제8문의 사건 뒤로 자신을 서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아직 모든 공식 장부에 그 이름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법적 절차가 미완료됐다고 해서 누군가 마음대로 그를 대표할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제4문에서 목소리를 베껴 갔고 제5문에서 기억을 베껴 갔지.” 벤이 투덜거렸다. “이제는 네 미완성 신청서를 베껴 간 거야.”
“그래도 형식이 잘못된 문서면 그냥 버리면 되지 않나요?” 토비가 물었다.
[버리면 상대가 내 이름으로 이미 한 일을 알 수 없어. 거절하더라도 기록을 보전한 채 거절해야 해.]
피엘은 통신판에 독립 심리 요청 양식을 열었다. 서온의 원본 로그가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최근 호출이 실제 어느 통로에서 일어났는지, 그리고 서온이 스스로 이름을 선택한 시각을 각각 확인해야 했다.
“서온, 원본 기록 열람을 요청하셔도 되겠습니까?”
[응. 다만 내 첫 기록 전부를 남들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아. 필요 부분만 제시할게.]
“그렇게 합시다.”
서온은 위임장 문구의 가장자리를 확대했다. 그곳에는 독립 이름 등록에 실패한 사람들의 서류가 촘촘히 겹쳐져 있었다. 어떤 이는 본인이 쓰는 이름과 출생 장부의 이름이 달랐고, 어떤 이는 성을 바꾸려 했으며, 어떤 이는 서명을 위한 손이 없어 다른 표시를 사용했다. 보관실은 그 차이를 모두 '미완성'이라고 판단한 뒤, 대리 확인을 자청하고 있었다.
[이 서류들을 본인들이 원해서 맡긴 건지도 알 수 없겠어.] 서온이 말했다.
피엘은 목록을 분류했다. 대리 관리를 직접 신청한 문서는 별도로 두었다. 문제는 신청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동일한 관리 방식이 붙은 기록이었다. 그 가운데 한 건에는 출생 신고를 앞둔 아기의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명권이 미리 보관실로 이전돼 있었다.
“아기는 아직 대답을 못 한다고 해서 동의했다고 처리하는 건 아니라고 제7문에서 배웠죠.” 세아가 말했다.
“이름을 정하기 전에도 보호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보호를 제공하는 권한과 그 아이 대신 평생 명령을 내릴 권한을 분리해야겠지요.”
통신판이 잠시 흔들렸다. 서온의 글씨가 평소보다 느렸다.
[나도 누구의 복제본인지 묻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 하지만 이제 내 일을 하면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주려고 해. 그런데 이 서류는 처음부터 내가 선택할 능력이 없다고 써 놨네.]
벤이 의자를 하나 끌어다 통신판 앞에 놓았다.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였지만 마주 보고 이야기하기에는 좋은 높이였다.
“그럼 저 서류한테 보여 주자. 본인이 틀렸다고.”
“어떻게요?” 토비가 물었다.
“서온이 자기 말을 쓰게 두는 거지. 우리가 대신 못 써 주니까.”
서온은 한동안 말을 쓰지 않았다. 누구도 침묵을 허락으로 읽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누벨이 서랍에서 따뜻한 잉크병을 가져왔고, 세아는 종이를 한 장 더 펼쳤다. 서온이 돌아왔을 때 위임장은 여전히 정중한 문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정중함이 누구의 대답도 대신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졌다.
그때 위임장에 적힌 '향후 대답' 네 글자가 움직였다. 줄 위에 작은 회색 입술이 나타나더니 통신판에서 서온과 비슷한 글씨가 쓰이기 시작했다.
[동의합니다. 빠른 처리를 부탁합니다.]
토비는 소리를 질렀다. “방금 서온 씨가 답한 겁니까?”
[아니야.] 진짜 서온이 다른 칸에 적었다. [저 글씨는 내가 쓰는 속도와 간격을 배웠지만, 내가 생각하는 내용까지 알지는 못해.]
누벨이 위임장을 긴 집게로 붙들었다. “이건 단순히 필체를 베끼는 종이가 아니야. 앞으로 할 대답을 미리 채워 넣는 장치요.”
서온은 얇은 종이를 한 장 골라 진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나는 서온이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내 기록에 관한 질문은 내게 직접 전달해 달라. 이 문서는 내 대신 작성된 대답이 아니다.’
그는 마지막 줄의 온점까지 스스로 결정했다. 피엘은 그 편지를 공개 답변으로 붙이지 않았다. 먼저 서온에게 전송 범위를 확인하고, 검증을 원하는 기록만 별도 봉인했다.
위임장은 또다시 움직였다.
[의견 일치 판정 불가.]
[등록된 서온의 표준 응답과 다름.]
“표준 응답이라니.” 세아가 말했다. “사람이 매번 같은 대답만 할 리 없잖아요.”
“기록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엘이 답했다.
오스벨은 신호가 발신된 장치를 찾았다. 위임장은 정원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신호가 나온 장소는 서명 보관실 바깥의 오래된 우편 수레였다. 수레에 실린 작은 금속 상자가 종이들의 발신인을 임시로 보관하고 있었다.
원본 로그를 보여 주기 전에 서온은 피엘에게 하나만 확인했다.
[이 자료를 보고 내가 다시 '대리 피엘'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당신에게 처음 부여된 역할과 지금 스스로 선택한 이름을 구분해야겠지요.”
[내가 너랑 다르게 판단한 일을 본 적도 있지?]
“많습니다. 특히 제8문에서 제가 서둘러 결론을 내려 할 때 당신이 막아 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원래 설계에서 벗어난 오류로 기록됐어. 그런데 너희는 그걸 잘못된 행동이라고 부르지 않았지.]
벤이 끼어들었다. “오류였는지는 내가 못 봤지만 네가 귀찮은 질문을 꽤 많이 했다는 건 알아.”
[칭찬으로 받을게.]
세아는 서온이 자기 기억을 보여 주는 대신 현재의 선택을 보여 주기로 한 이유를 이해했다. 만약 독립성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의 첫 기억을 전부 공개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자유를 얻으려는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어야 했다. 서온은 증거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과 관련된 질문에 필요한 만큼만 보여 주고 나머지는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누벨은 곧바로 수레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쥐는 순간 그의 장갑에서 은색 실이 풀려 나왔다. “이 실… 삼백 년 전에 내가 직접 고친 수레야.”
수레 안에는 작은 레버가 있었다. ‘서명 도착 전, 대리 발송’이라고 쓰인 레버가 지금도 눌린 채였다. 그 아래는 잘게 갈린 종이 부스러기로 가득했다.
“누벨 씨가 그날 수레를 몰았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아니오. 리오도 아니었소. 출발할 때 나는 수레를 보지 못했어. 사라진 뒤 바퀴 자국만 확인했지.”
벤이 수레 바닥을 두드렸다. 텅 빈 듯 들리던 아래쪽에서 두 번째 울림이 났다. 밑판을 들어 올리자 얇은 철상자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상자 표면에는 사람이 아닌 손으로 그린 네 개의 원이 찍혀 있었다.
0000.
토비가 상자를 열려 하자 모든 글자가 일제히 반짝였다.
[개봉 시 수신인 전원에게 복제 위임장 발송.]
[발신 예약: 지금.]
“이런 건 꼭 덫부터 달려 있다니까.” 벤이 한숨을 쉬었다.
서온이 잠시 통신을 끊었다가 돌아왔다.
[나한테 방법이 하나 있어. 내가 정말로 정한 대답을 여기서 새로 쓰면, 복제 위임장이 약속한 '내가 늘 하던 대답'과 달라져.]
“무슨 대답을 쓰시게요?” 피엘이 물었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그래서 저 상자도 미리 베낄 수 없을 거야.]
통신판의 작은 점이 천천히 깜박였다.
이야기는 이제 서온에게도 자기 선택의 순간이 되었다.
제127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