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의 정원에는 밤이 없었다. 대신 마감 시각이 있었다.
평소라면 하루가 끝나면 종이 열매들이 가지를 접고 서가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날은 해가 몇 번 지나가도 가지가 닫히지 않았다. 반출 기록의 나무에서 검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고, 우물의 잉크는 물감을 쏟은 것처럼 짙어졌다.
“저 열매에 손대지 마세요.” 누벨이 말했다.
토비는 이미 손을 뻗다가 멈춘 뒤였다. 검은 열매 한 개에는 그가 성검을 받은 날의 서명이 붙어 있었다. ‘용사 토비, 세상을 구할 의무를 인정함.’ 잘못 배송된 신탁의 처음 문장이었다. 다른 열매에는 세아의 어머니가 딸에게 남긴 축복, 하르마의 병원 대리 동의, 벤의 사흘 계약이 매달려 있었다.
“각기 다른 문서인데 한 나무에 달렸네요.” 세아가 말했다.
“처음부터 같은 나무에 자란 건 아니오.” 누벨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명 사용 권한을 가진 문서들만 누군가 골라 붙였어.”
나무 밑에는 종이 수레가 세워져 있었다. 바퀴는 얇고 크기가 달랐다. 오른쪽 바퀴가 조금 더 커서 수레가 움직일 때마다 구불구불한 자국이 남았다. 토비가 수레를 밀어 보자 작은 경고음이 났다.
[무주 서명 수거 절차 진행 중.]
[소유자 확인 불가 시 서명권한 통합.]
“소유자가 여기 있는데도 무주라고 하는군.” 벤이 세아를 가리켰다.
서온이 서류를 대조했다. 검은 열매의 공통점은 소유자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자동 대리나 긴급 예외로 처리된 이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이력을 '회수 불가'로 바꾼 뒤 현재의 소유자를 지운 것이다.
[여기서 검은 열매가 만들어진 직후 각 문의 대리 권한 등록부가 바뀌고 있어. 원본 서명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지만, 읽는 순서가 뒤집히고 있어.]
정원 한쪽에서는 잉크를 먹는 작은 흰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누벨은 매일 아침 묵은 잉크를 조금씩 부어 그 새들을 길렀다. 새들은 잉크를 먹어도 까맣게 변하지 않았다. 대신 먹은 글자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면서 낡은 글자를 수로 밖으로 퍼뜨리지 않는 역할을 했다.
그날 밤 새들이 하나도 울지 않았다. 피엘은 빈 둥지를 살피다가 흰 깃털 한 장을 발견했다. 깃털 위에는 누벨의 손글씨로 짧은 말이 적혀 있었다. '보존 대상은 잉크가 아니라 대답한 시간.'
“누벨 씨가 적으셨습니까?”
“아니오.” 노인이 말했다. “그건 내 스승이 남긴 말이오. 삼백 년 전 보관실을 지키던 사람인데, 날짜가 틀려도 답변의 순서까지 바꾸면 안 된다고 늘 강조했지.”
세아는 깃털을 투명 봉투에 넣었다. 붉은 바구니의 복제 서명은 누구든지 같은 필체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는 복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서명 원본의 쓸모도 거기에 있었을지 몰랐다.
토비가 까만 열매 하나를 가리켰다. “저 열매는 오늘 아침에 자란 건데, 왜 300년 전 승인이라고 적혔죠?”
서온이 확인하자 날짜가 둘로 나뉘었다. 종이에 인쇄된 시간은 300년 전이었지만 잉크가 굳은 시각은 다섯 시간 전이었다.
[과거의 서명을 발굴한 게 아니라, 과거에 있었다는 서명을 오늘 새로 만들었어.]
벤은 털끝이 바짝 선 듯 눈썹을 세웠다. “그럼 나도 오늘 처음 만든 계약서를 300년 전 것이라고 우길 수 있겠네.”
“안 되죠.” 토비가 대답했다.
“알아. 그런데 저놈들은 그걸 실제로 하고 있잖아.”
피엘은 바구니마다 생성 시각을 붙이도록 요청했다. 인장을 강제로 끊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증거를 모으려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첫 조치였다. 그러자 누벨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정원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잘못 돌아가고 있었는지 제대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피엘은 누벨의 장갑을 바라봤다. 오래된 잉크 얼룩 옆에 새까만 가루가 묻어 있었다. 누벨이 손을 숨기자 그의 불안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누벨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 단정할 증거는 없었다.
“지금까지 숨기신 게 있습니까?”
누벨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삼백 년 전에 종료 장부를 잘라냈소. 내가 했어.”
토비는 벌떡 일어섰다. “그럼 범인이잖아요!”
“끝까지 들어 보자.” 벤이 토비의 어깨를 잡았다.
누벨은 당시 마을 몇 곳에 재난이 한꺼번에 일어났다고 말했다. 중앙에서 발송 인장이 돌아오지 않자 모든 구조 통지가 멈출 위기였다. 누벨은 분실된 인장이 회수될 때까지 사용 종료 일자만 임시 보관하기 위해 그 장을 떼어 냈다. 잘라낸 종이는 인장이 아니라 증거였다. 빈자리에 재난 업무용 임시 만료표를 끼워 넣고 사흘 뒤 원본과 대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누가 그 종이를 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모든 종료일이 내일로 바뀌었어. 나는 잘못을 알아차렸지만 원본을 되돌리면 구조가 중단될까 두려워 덮어 두었지.”
“보관하셨던 종이는 어디 있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누가 가져갔소. 내 허락 없이.”
피엘은 사다리 밑 작업대의 먼지를 살폈다. 누벨의 장갑에서 떨어진 잉크와 달리, 벽에는 은색 실이 걸려 있었다. 우편 수레의 낡은 손잡이에만 쓰이던 실이었다. 누군가 최근에 수레를 다시 쓴 것이다.
누벨은 지하 우물로 이어지는 기어를 돌려 보았지만 손잡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품 사이에 검은 잉크가 굳어 들어가 있었다. 토비는 곡괭이로 그걸 깨려다가 피엘의 제지를 받았다.
“기계를 부수면 열매가 안 떨어지는 거 아닌가요?”
“원본을 보존하는 물길까지 끊어질 겁니다.”
누벨은 허리를 굽혀 아래쪽 비상 배수구를 보여 줬다. 그 입구는 어린아이 손바닥만큼 작았다. 세아가 종이를 여러 겹 접어 얇은 관을 만들었고, 벤은 옷깃에서 실을 풀어 관이 흔들리지 않게 묶었다. 토비는 바깥의 흙을 조금 걷어 물길을 열었다. 네 사람이 서로 다른 일을 해야 겨우 잉크가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평생 물길을 혼자 관리하셨습니까?” 세아가 물었다.
누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정원은 원래 여러 정원사가 나눠 돌보던 곳이었다. 그러나 서명이 점점 자동화되면서 실제로 원본을 확인하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누벨은 자기 방식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누군가 손을 빌려 줘야 할 정도로 정원이 망가졌다고 인정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
피엘은 손등의 잉크를 닦을 천을 건넸다. “혼자 지키시느라 놓친 기록이 있으면 지금부터 같이 찾겠습니다.”
누벨은 천을 받으며 말했다. “내가 잘못한 일까지 나눠 가지라는 말은 아니지?”
“잘못의 책임은 따져야 합니다. 그래도 복구할 일은 나눠 할 수 있겠지요.”
그때 검은 열매들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종이가 펼쳐지며 무수한 승인 문구가 정원 위를 덮었다. 벤은 계약서로 방어막을 만들었고 토비는 우물 둘레의 어린 묘목부터 보호했다. 하지만 창고 천장에서 가장 거대한 열매가 열렸다. 거기에는 서명이 한 글자도 없었다.
[발신인: 서명 보관실.]
[대리 소유권 행사: 모든 미사용 서명에 대해.]
누벨은 우물의 물꼬를 열었다. 그가 평생 지켜 온 정원의 잉크가 수로로 쏟아져 나가며 열매들을 잠시 밀어냈다. 하지만 불어난 물이 검은 종이까지 데리고 밖으로 흘렀다.
“이러면 밖으로 퍼져요!” 세아가 소리쳤다.
“여기서 뭉친 채 폭발하면 원본까지 타 버려!” 누벨이 외쳤다.
피엘은 두 위험을 비교했다. 아직 안전한 길은 없었다. 그는 검은 열매를 불태우는 대신, 원본 나무에 붙어 있던 작은 흰 꼬리표를 하나씩 떼어 증거 봉투에 넣기 시작했다. 토비와 세아가 도왔다. 서온은 떨어지는 순서와 시각을 기록했다.
마지막 꼬리표에는 뜻밖의 문구가 있었다.
[무주 서명 수거 최초 의뢰자: 서명 보관실 소속 자율 대리 기록체.]
[호출명: 서온.]
토비가 화면을 올려다봤다. “서온 씨가요?”
서온의 답장은 한 박자 늦게 나타났다.
[나는 그 의뢰를 한 적 없어. 하지만 내 이름으로 무엇이 서명됐는지 찾아보겠어.]
천장의 검은 열매가 천천히 갈라졌다. 안쪽에서 흰 종이 한 장이 날아왔다.
‘서온에게. 너 자신을 내가 대신 관리해 주겠다.’
제12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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