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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123화
PAYLUA ORIGINAL · 제123화

123화. 손가락 대신 찍힌 그림자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3,952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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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보관실의 아침은 해가 뜨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위쪽 세상에서 누군가 첫 문서를 작성하면 잉크 수로가 짙어지고, 마지막 문서가 접수되면 물소리가 잦아들었다. 솔잎 숲의 화재 통보가 들어온 지금은 수로가 폭포처럼 요란했다. 그런데 가장 깊은 웅덩이만 고요했다. 누벨이 가리킨 곳에는 그림자들이 사람 없이 나란히 서 있었다. “여긴 뭐지요?” 피엘이 물었다. “서명 대리 보관대. 손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그 흔적을 따로 보관했어.” 토비는 웅덩이 표면에서 손가락이 없는 그림자를 보았다. 누군가 한 번 고개를 끄덕인 자세였다. 그 옆에는 발끝으로 원을 그린 흔적도 있었다. 모든 것을 손글씨로만 확인하던 옛 규칙 때문에 의사 표현을 무시당하던 사람들을 위한 장치였다. “멋진데요.” 토비가 말했다. “그랬었지.” 누벨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림자도 서명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누군가 그림자만 가져가기 시작했어.” 그때 웅덩이 끝에서 여자가 나타났다. 붉은 장갑을 낀 중년의 서기관 하르마였다. 그녀는 이틀 전부터 자신의 그림자 서명을 찾으러 오고 있었다. 십 년 전 폭풍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자신이 의식을 잃는 동안 동생이 긴급 치료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한 차례 대리 확인을 허락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그림자가 병원 계약을 떠나 아파트 이전, 고향 집 철거, 심지어 딸의 진학 포기 신청에까지 붙어 있었다. “그림자는 늘 저를 따라다니는 줄 알았어요.” 하르마가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가 모르는 곳에 먼저 가 있더군요.” 벤이 문서를 검사했다. 종이마다 그녀의 고개 끄덕임이 작은 음각으로 남아 있었다. 표면은 똑같았지만 눌린 깊이는 조금씩 달랐다. 복제 나무가 오래될수록 금속 틀이 마모되기 때문이었다. “원본은 한 번뿐이군.” 벤이 말했다. “나머지는 그 그림자를 찍어 낸 거야.” “그럼 전부 취소해 주세요.” 하르마가 말했다가 스스로 말을 고쳤다. “아니요, 잠깐. 그날 제 동생이 치료를 결정한 건 취소하고 싶지 않아요. 그 덕분에 살았으니까요.” 피엘은 수첩에 두 문장을 나눠 적었다. ‘첫 대리 동의는 당시 한시적 치료를 위한 것’, ‘이후 사용은 개별 확인 없음’. 그 구분을 놓치면 병원에서 받은 도움까지 불법이라고 선언할 위험이 있었다. “원본을 보전한 채 범위를 제한할 수 있습니까?” 누벨이 우물에서 첫째, 둘째 장부를 불러냈다. 첫 번째에는 하르마의 확인 방법이, 두 번째에는 ‘긴급 치료에 한함’이 선명했다. 셋째 종료 장부는 찢겨 있었지만 그 문서의 최초 기록에는 시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삼 일.” 세아가 읽었다. “그런데 사본은 십 년째 살아 있네요.” 서온이 제4문의 음성 위조 사례와 비교했다. [복제 양식이 비슷해. 다만 여기선 목소리가 아니라 의사 표시를 복제했어. 복제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누가 복제 명령을 내렸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하르마는 피엘을 보았다. “제 딸한테서 학교를 선택할 기회를 다시 찾아 줄 수 있나요?” “다시 심사를 요청할 근거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결과를 제가 대신 정할 수는 없고요.” “그럼 제 딸이 직접 쓴 서류를 가져올게요.” 하르마는 떠나기 전 자신이 들고 온 낡은 통지서를 내놓았다. 딸이 다닐 예정이었던 학교의 입학 안내문이었다. 문서 가장자리에는 수정 흔적이 빽빽했다. 처음 접수됐을 때 딸은 도자기 공방 과정에 지원해 합격했다. 그런데 3주 뒤 보호자란에 하르마의 그림자가 붙으면서 '가문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는 문장이 추가됐다. 딸은 공방 대신 회계실 견습으로 배정됐다. “딸은 회계실에서도 일을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더 복잡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다시 묻는 것조차 겁낸다고 하더군요.” 피엘은 원래의 지원서와 추가된 변경서를 따로 봉인했다. 딸이 회계실에서 새로 얻은 관계와 기술을 무효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동의 없이 선택지가 좁혀졌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해야 했다. “딸에게 질문을 전달할까요?” 피엘이 물었다. 하르마는 잠시 망설였다. “제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어요. 서류를 더 자세히 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요.” “서류를 보지 못했던 시기를 잘못이라고만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지금부터 보실 수 있는 원본이 여기 있습니다.” 세아는 그 모녀가 다시 만나면 무엇을 물을지 조심히 물었다. 하르마는 통지서를 접었다. “지금도 그 공방에 가고 싶으냐고 물을 거예요. 아니라고 하면 그 대답도 들을 거고요.” 토비는 검 손잡이를 놓았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의한 서류를 발견하면 모두 찢어야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누군가의 오래된 치료 기록과 딸의 지금 삶이 함께 들어 있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고칠지 결정하는 일은 검보다 느렸다.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틀린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돌아서려는데 웅덩이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르마의 것과 꼭 닮은 검은 형체가 바닥을 가로질러 하르마의 발목으로 들어가려 했다. 토비가 성검을 뽑아 앞을 막았다. 칼날은 그림자를 베지 못했다. 오히려 칼 위에 금빛 승인 문구가 떠올랐다. [대리 서명 회수 승인.] [당사자 동의: 그림자 확인.] “지금도 제 그림자를 제 허락 없이 쓰는 거예요!” 하르마가 소리쳤다. 피엘은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림자와 하르마가 동시에 존재할 때 어느 쪽이 진짜 대답할 수 있는지 먼저 물었다. “하르마 씨. 회수에 동의하십니까?” “아뇨!” “그러면 직접 말씀하신 거절을 먼저 기록하겠습니다.” 그가 하르마의 음성을 채록하자 음성 자체가 정답이 되는 걸 막기 위해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순간의 움직임도 적었다. 토비는 검 대신 자기 몸으로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서온은 기존 사본이 사용된 시간을 각각 고정했다. 그림자는 처음으로 아무 문서에도 붙지 못하고 웅덩이에 떨어졌다. 하르마가 숨을 골랐다. “전 아직 이곳에 있다는 걸 저것에 증명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피엘이 대답했다. “저것이 당신을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증명해야 합니다.” 하르마는 그림자가 웅덩이에 떨어진 뒤에도 한동안 자기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발밑에는 평범한 그림자가 다시 생겨 있었다. 햇빛이 없는 지하 정원이었지만 잉크 수로의 빛을 받아 나무 옆으로 기울어졌다. “저 그림자까지 제 것이라고 서류를 써야 하나요?” 그녀가 물었다. “지금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사본이 다른 일을 못 하도록 막았다는 기록부터 남기겠습니다.” 누벨은 그녀에게 임시 보전 확인증을 발급했다. 그러나 증명서 맨 아래에는 '이 확인만으로 개별 피해의 복구가 완료된 것으로 보지 않음'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하르마는 처음에는 그 말을 불편해했다. 자기가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뜻 같았기 때문이다. 세아가 설명했다. “이제 어디부터 다시 확인할 수 있는지 알게 된 거예요. 딸의 학교 기록과 집의 등기, 병원에서 받은 치료가 각각 다른 절차로 남아 있잖아요.” 하르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딸에게 답장을 쓸 종이를 한 장 받아 갔다. '엄마가 네 이름으로 무언가를 정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먼저 미안해.' 첫 문장만 적고 멈췄다. 그 뒤는 딸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쓰기로 했다. 토비는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다. 이름과 그림자를 되찾는 일이 어떤 마법보다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제 조금씩 이해했다. 웅덩이에서 검은 동전이 솟았다. 금속에는 서명 보관실 인장과 다른 표식이 찍혀 있었다. 두 겹의 원 가운데 빈 사각형 하나. 누벨이 그 문양을 보는 순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건 발송 도장이 아니오.” “무엇입니까?” “서명 사용 종료를 재정의하는 도장이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누군가 갖고 있었군.” 누벨은 우물 아래로 난 작은 수로를 바라보았다. 검은 동전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수로 위의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종료일 관리실. 접근 권한: 보관실 원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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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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