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사다리에서 내려오면서 종이 열매를 하나 떨어뜨렸다.
잘 익은 사과처럼 둥글게 접힌 종이는 바닥에 닿자 반듯한 서명으로 펴졌다. 잉크로 쓴 것은 ‘루코’라는 이름이었고, 밑에는 ‘정산국 잔액 확인’이란 문구가 붙어 있었다. 피엘은 그것을 보고 노인에게 물었다.
“루코가 직접 작성한 문서입니까?”
“그 사람이 남긴 서명 조각에서 자란 거요. 원본을 본뜬 사본이지.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건 아니잖소.”
노인은 종이를 집어 '복제'라고 적힌 붉은 바구니에 던졌다. 천계에서는 매일 수천 장의 서류가 발송됐고, 그때마다 누군가의 서명이 필요했다. 서명 보관실은 한 번 확인된 필체와 권한의 범위를 별도로 기록해 보관하는 장소였다. 문제가 생기면 원본과 사본을 대조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사본이 너무 잘 자라서 원본을 가리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피엘이 중얼거렸다.
“그건 내 정원 탓이 아니라 물을 잘못 준 사람 탓이지.”
노인의 이름은 누벨이었다. 한쪽 팔이 팔꿈치까지 잉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릴 적 서명 나무의 가지를 자르다 다쳤는데, 그 뒤로는 종이를 만지면 글자가 먼저 손등에 나타났다고 했다. 토비가 흥미를 보이자 누벨은 도리어 장갑을 끼었다.
“내 손이 이상하다고 신탁 받은 건 아니오. 그냥 잘못 베어서 이 꼴이 된 거지.”
누벨은 일행을 보관실 중앙으로 이끌었다. 둥근 우물 위에 세 개의 원형 장부가 떠 있었다. 첫째에는 ‘누가 말했는가’, 둘째에는 ‘무엇을 허락했는가’, 셋째에는 ‘언제 끝나는가’라고 적혀 있었다. 세 장부가 동시에 맞아야 서명 하나가 다른 문서에 쓰일 수 있다고 했다.
“마계 계약에도 비슷한 게 있지.” 벤이 말했다. “우리는 계약서를 길게 쓰는 대신 정말 중요한 제한 문구를 제일 작은 글씨로 쓰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그런 걸 자랑하지 마세요.” 토비가 말했다.
“지금 반성 중이야.”
보관실 벽에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서명이 아닌 별난 그림들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반쯤 뜬 눈, 비뚤어진 사각형, 손바닥으로 찧은 곡식 자국. 누벨은 오래전 글자를 읽지 못하던 제빵사 오브가 남긴 서명을 가리켰다. 그는 빵집 계약서에 자기 이름을 쓸 줄 몰랐지만, 진짜 계약 내용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서명이라는 건 멋지게 자기 이름을 쓰는 기술이 아니야.” 누벨이 말했다. “어떤 사실을 알고, 무엇을 책임지겠다고 표시하는 방법이지. 오브는 자기가 구운 빵의 모양으로 서명했어. 그 빵의 밑면에는 일부러 깊게 낸 세 개의 칼집이 있었지.”
토비는 액자에 코를 가까이 댔다. “저도 보리 이삭으로 해 보면 될까요?”
“해도 돼. 단, 누군가 네 이삭을 베껴서 다른 종이에 붙이면 알아낼 방법도 생각해야지.”
누벨은 잉크 수로 옆의 작은 시험대에 '하루만 유효한 빵 제공 확인서'를 놓았다. 토비가 이삭 그림을 그렸지만 시험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다음 토비가 '제가 오늘 열 사람에게 보리빵을 제공했다'고 직접 말하자 첫 장부에 작은 불이 켜졌다. 두 번째 장부에는 열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적었다. 세 번째 장부에는 오늘 해가 지면 이 약속이 끝난다고 적었다.
장부 세 개가 맞물리자 시험대가 초록빛으로 변했다.
“그러면 내일 또 열 사람을 먹여야 한다는 명령은 만들어지지 않겠군요.” 토비가 말했다.
“네가 다시 약속한다면 모를까.” 누벨이 답했다.
피엘은 세 장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은 처음부터 무제한 권한이 아니었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약속했는지 아는 데 필요했던 구체적인 장치였다. 무엇이 망가졌는지 보기 전에, 왜 만들었는지를 이해해야 했다.
피엘은 300년 전 목록표의 원본을 요구했다. 누벨은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더니 우물 옆 쇠상자를 열어 낡은 보관증을 꺼냈다. 종이의 귀퉁이가 탄 채였다.
[반출 대상: 제0경로 원본 발신 권한.]
[반출 목적: 대피 요청의 긴급 전달.]
[반출 담당 직무: 피엘.]
[개인 인수자 서명: 공란.]
[반납 예정: 최초 발송 직후.]
“개인 이름이 없군요.” 세아가 말했다.
“기록 담당자가 그날 밤 바뀌었어.” 누벨이 답했다. “누가 상자를 들고 갔는지는 적지 못했지. 직무표만 찍혔다고.”
피엘은 조금 안도했다가 곧 그 마음을 거두었다. 자신이 300년 전 그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건 이미 명백했다. 중요한 건 당시 누군가가 위험한 권한을 가져간 뒤 반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상자 자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돌아오지 않았소.”
“원본 발신 권한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합니까?”
누벨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답장이 닿기 전에 구조 요청을 전달할 수 있는 한 번짜리 긴급 인장이오. 모라가 도움을 청하던 밤에는 배를 움직이려면 누군가 먼저 소식을 보내야 했어. 수신인의 답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도 있잖소.”
“그 한 번짜리가 지금의 무제한 발송 권한이 됐군.” 벤이 말했다.
“누군가 기간 장부를 훔쳤다면 그럴 수 있겠지.”
누벨은 토비가 그렸던 보리 이삭 확인서를 다시 꺼내 보였다. 서명 자체는 예쁘지 않았다. 하지만 첫째 장부가 그 서명을 토비가 직접 남겼다는 사실을, 둘째 장부가 무엇을 약속했는지를, 셋째 장부가 언제부터 다시 확인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증명했다.
“세 번째 장부가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누벨이 물었다.
토비는 고민하다 답했다. “제가 내일도 보리빵 열 사람분을 구워야 하는 걸까요?”
“누군가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지. 거기에 네가 반대하지 않는다는 서류까지 만들어 낸다면?”
“그럼 제가 평생 빵집에 갇히겠네요.”
벤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서 계약의 유효 기간을 읽으라고 내가 늘 말했지.”
세아는 웃다가 곧 진지해졌다. 어머니의 신탁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 끝나는 날짜를 지웠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딸에게 빌었던 축복과 지금 천계가 딸의 삶에 강요하는 규칙이 같은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우물에서는 오래된 계약 수백 개가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 불빛 하나마다 어떤 사람의 내일이 묶여 있을지도 몰랐다.
누벨이 셋째 장부를 가리켰다. 책장은 펼쳐져 있었지만 가운데에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었다. 딱 한 장이 반듯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긴급 반출 인장 사용 종료 기록: 분실.]
토비는 검 손잡이를 쥐었다. “도둑이 들었군요.”
“들어왔다고 해서 다 도둑은 아니지.” 누벨은 손등의 잉크를 감췄다. “그날 누군가 여울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다는 것도 사실이오. 다만 구하려는 일이 끝난 뒤에도 도장을 쥐고 있으면, 다음에는 그 도장으로 사람들을 어디로든 보낼 수 있지.”
서온이 통신판에 세 장부의 이름을 정리했다.
[발신자 확인, 허락한 범위, 종료 시각. 앞의 둘이 살아 있고 셋째가 사라졌어. 그래서 제한 없는 승인처럼 읽힐 가능성이 있어.]
피엘은 누벨에게 원본 장부를 봉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복사본만 들고 돌아가는 대신, 훼손 흔적을 현재 상태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누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물에 손을 뻗지 않았다.
“보관실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원본 서명은 함부로 떼지 못해. 장부 하나를 옮기면 지금 유효한 구조 요청도 끊길 수 있소.”
그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물 위에 금빛 봉투 한 장이 떠올랐다.
[제2문 긴급 구조 승인 지연.]
[자동 승인 경로 재검증 요청.]
[현재 위험: 동부 솔잎 숲, 산불 발생.]
토비가 창백해졌다. “실제로 불이 났습니까?”
통신판에서 오스벨의 문자가 급히 솟았다.
[산불은 실제야. 확인되지 않은 서명 때문에 구조선 출동까지 멈춰 있어.]
누벨은 우물의 세 장부를 바라봤다. 망가진 장부를 교체하면 모든 발송이 멈춘다는 그의 설명은 사실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지금도 남의 이름으로 명령이 나갈 수 있었다.
피엘은 신중하게 말했다.
“원본은 보전하고, 실제 구조를 먼저 통과시키는 다른 절차를 찾아야 합니다.”
누벨이 처음으로 사다리 대신 지하문 쪽을 가리켰다.
“그게 있다면 나도 보고 싶군. 삼백 년 동안 여기서 못 찾았으니까.”
그때 세 번째 장부의 찢긴 자리에서 누군가의 손글씨가 짧게 나타났다.
‘종료란은 없애지 않았다. 누가 끝낼 수 있는지를 바꿨다.’
제12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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