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엘은 새 주소를 적기 전에 먼저 여울 마을의 지도를 고쳤다.
‘제방 관리 구역 8-나’라는 표지는 당장 철거하지 않았다. 그 표지는 실제 제방 관리에 쓰이고 있었다. 대신 바로 옆에 마을 사람들이 써 준 이름과 길 안내를 덧붙였다. 관리 번호만으로는 이곳에 누가 살고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당 기관에도 알렸다.
“그럼 이게 신탁의 기원입니까?” 토비가 지도를 말며 물었다.
“기원으로 가는 길의 일부입니다.” 피엘이 대답했다. “처음 만들어진 모든 신탁을 한 번에 설명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첫 요청이 어떻게 명령으로 바뀌었는지는 조금 알게 됐습니다.”
여울의 강에는 아침 안개가 떠 있었다. 전날 강제 이동에 쓰였던 은빛 배는 이제 다친 제방 일꾼을 진료소로 보내는 일을 돕고 있었다. 자운은 안전 장비를 다시 점검했고, 마을 사람들은 필요할 때 배를 부르는 절차를 직접 수정했다. 지원을 거절해도 비상 정보를 받을 수 있게 하는 항목도 새로 넣었다.
토비는 배의 갑판에 자신의 새 신발을 올려놓았다. 어제 잃어버린 한 짝과 같은 모양을 찾아냈지만 크기가 조금 달랐다.
“양쪽 발이 이제 서로 다른 나라 사람 같습니다.”
벤이 그를 흘끗 보았다. “그건 배달 사고가 아니라 네가 신발을 잘못 산 거다.”
“한 짝씩 파는 가게가 없다니까요!”
세아는 웃다가 손을 멈췄다. 여울에 온 뒤 계속 품고 있던 질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모라가 부탁을 보낸 날, 그걸 받은 사람은 무슨 답을 보냈을까요? 공식 신탁 말고, 진짜 답장이요.”
피엘은 접어 둔 종이를 다시 펼쳤다. 등록실에서 가져온 봉투 안에는 편지 한 장이 있었다. 그 종이가 첫 신탁과 동일한 것인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었다.
‘강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친 분에게 먼저 손을 내밀겠습니다. 모두가 같은 곳으로 가야 한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당신이 보내는 답장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남기겠습니다.’
피엘은 읽던 입을 다물었다. 이 편지는 명령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을 적어 보낸 답장에 가까웠다. 그 아래에는 후대의 필사 도장이 여러 번 찍혀 있었고, 도장들 사이에서 문장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당신이 보내는 답장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남기겠습니다.’
그 문장이 지워진 뒤로만 일괄 명령문이 늘어나 있었다.
“원래는 답장을 받을 준비도 했군요.” 세아가 속삭였다.
그때 서온에게서 최종 대조 보고가 도착했다.
[리오가 남긴 가방의 네 빈칸과 0000 최초 표지는 동일해. 원래 기능은 ‘아직 확인하지 않음’. 첫 구조 신탁이 발송되던 날 이후 ‘승인에 이견 없음’으로 변경됐고, 여러 문에서 재사용됐어. 변경 지시자의 본인 확인 기록은 아직 없어.]
“그러면 0000이 누구의 이름인지는 알 수 없는 거네요.” 토비가 말했다.
“애초에 이름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칸에 의미를 덧씌우고, 그 의미를 여러 사람의 책임처럼 사용한 것이죠.”
벤이 창밖을 보았다. 악마의 표정은 평소보다 진지했다. “서명 없는 계약은 효력이 약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명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강한 서명이 됐군.”
이시아는 오래된 첫 답장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여신의 힘으로 문서를 고치거나 과거를 다시 쓰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시기와 아직 기록이 부족한 시기를 나누어 진술서를 작성했다.
“제가 도와준 사람들이 감사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앞으로 어떤 도움을 받을지까지 제가 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 구분을 늦게 배웠습니다.”
하린은 여울 마을 사건에 관한 잠정 결정을 문서화했다. 주민의 동의 없이 만들어진 일괄 발신과 주소 폐기 절차를 멈추고, 남아 있는 피해는 따로 조사하도록 했다. 오래된 신탁의 최초 작성자와 변경 책임자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므로 그 부분은 보전 수사로 넘겼다.
피엘은 기록판에 조심스럽게 항목을 적었다.
[제0경로 미해결 오배송: 1,006건.]
[복원 완료: 6건.]
[여울 마을 일괄 강제 이주: 잠정 중지.]
[최초 요청서 및 첫 응답 초안: 독립 보존.]
[0000 표지의 원래 의미: 미확인 상태.]
[변경 지시자·과거 피해 복원: 조사 진행.]
토비가 장부를 들여다봤다. “이번에는 수가 하나도 줄지 않았어요?”
“오배송 원본을 확정해서 개별 복원한 건 아직 아니니까요.” 피엘은 펜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을 도운 건 중요하지만 모든 사건이 해결됐다고 쓰면 안 됩니다.”
토비는 한참 생각하다 웃었다. “우리 집 농사 장부 같네요. 비가 와서 씨앗이 살았다고 바로 수확량에 적으면 아버지가 혼냈거든요.”
“그래서 네가 농부였던 거군.” 벤이 말했다.
“지금도 농부거든요!”
정오가 지나자 피엘은 별도의 회람장을 열었다. 새 반송 창구를 설치해도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소리로 문의할 수 있는 방법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손으로 전달할 방법을 남겨야 했다. 제3문의 수어 사건과 제4문의 음성 위조 사건을 지나온 뒤였기에 허점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말로 하면 또 가짜 소리를 만들 수도 있잖아요.” 토비가 말했다.
“그래서 한 가지 방식만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세아가 대답했다. “기록과 실제 당사자를 대조하고, 당사자가 원하면 언제든 수정할 수 있어야 해요.”
피엘은 모든 시스템을 하루 만에 고칠 수 없다고 솔직히 밝혔다. 어떤 신탁은 여전히 위험했고, 수많은 기록에는 책임자의 이름조차 없었다. 이시아는 창구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써 붙이지 않겠다고 했다. 여신이 뒤를 봐주는 창구라는 인상을 주는 대신 여러 독립된 검토자가 자료를 확인하도록 돕겠다고 했다.
“안내판에 들어갈 말은 정했습니까?” 루코가 통신판에서 물었다.
피엘은 한참 고민하다 답했다. “보낸 사람의 뜻을 확인합니다. 받은 사람의 답을 기다립니다.”
“엄청 느린 우체국이 되겠네요.” 루코가 말했다.
“그럴 겁니다.”
루코는 잠깐 웃었다. “그래도 없는 사람에게 청구서부터 보내는 것보단 낫겠어요.”
그날 오후, 제1문의 한쪽 벽에 조그만 반송 창구가 열렸다. 피엘이 서온과 오스벨에게 부탁해 설치한 임시 장치였다. 신탁 수신자는 받은 문서가 무엇인지 확인한 뒤 질문이나 이의를 보낼 수 있었다. 그 답을 임의로 동의 처리하지 않고 확인 대기 상태로 두는 기능부터 시험했다.
첫 번째 시험 봉투를 넣은 사람은 다린이었다. 그녀는 마을 이름의 복원 신청을 쓰지 않았다. 대신 지금 제방 공사를 돕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봉투 끝에는 ‘답장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제가 이렇게 말했음을 알아 주세요’라고 적었다.
피엘이 봉투를 열람하지 않고 보내자 장치는 처음으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도장을 찍는 소리가 아니라, 접혀 있던 종이가 펴지는 소리였다.
[확인 대기: 정상.]
[대리 응답: 사용하지 않음.]
그 소리가 어찌나 작았는지 토비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피엘은 들었다. 제0경로를 추적하면서 처음 만난, 무언가를 억지로 결정하지 않는 침묵이었다.
모두가 제7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서온에게서 마지막 통신이 왔다.
[피엘. 모라의 첫 편지와 첫 답장 초안이 어디서 수정됐는지 찾아냈어. 제1문도, 제8문도 아니야. 두 문이 생기기 전에 있던 설비의 이름이 나왔어.]
“그곳이 어디죠?”
[서명 보관실. 정확한 주소는 여전히 지워져 있어. 대신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출고 기록 하나가 남았어.]
통신판에 낡은 꼬리표가 나타났다. 보리 냄새가 밴 종이, 네 개의 빈 원, 두 개의 반대 방향 화살표. 그 밑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서명은 발신자에게 돌려준다. 서명 없는 명령은 전달하지 않는다.’
토비는 희망에 차 말했다. “그럼 거기 가면 범인이 누군지 바로 알겠네요!”
벤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오래된 창고라도 그렇게 친절한 곳은 없어.”
그러나 피엘은 웃지 못했다. 출고 기록 아래에 또 다른 글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명 보관실 최종 반출물: 제0경로 원본 발신 권한.]
[반출자: 피엘.]
[반출 일자: 현재의 피엘이 태어나기 300년 전.]
피엘은 자신의 이름을 다시 읽었다. 앞선 문들에서 오래된 서명을 그의 이름으로 덮어씌운 경우는 있었다. 이번 기록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원본 발신 권한이 실제로 빠져나왔다는 반출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서명 보관실을 찾아야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제 이름을 누가 먼저 썼는지 알아야 해요.”
그 순간 반송 창구의 새 우편함이 조용히 울렸다.
첫 번째 답장이 도착했다.
제12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