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린이 내놓은 그림 속 젊은이는 오른쪽 신발끈을 두 번 묶고 있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얼굴보다 가방의 끈과 신발끈을 더 정성껏 표현했다. 작은 수첩에는 ‘길을 잃는 건 괜찮다. 남의 말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피엘은 종이를 빛에 비춰 보았다. 잉크 밑에 지워진 이름의 첫 획이 드러났다.
리.
“리오.” 다린이 말했다. “가족 이야기에서 전해지는 이름이에요. 모두가 그를 배달부라고만 불렀기 때문에 진짜 이름인지까지는 몰라요.”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반납한 사람과 이름을 빼앗긴 사람은 다르지. 처음에는 스스로 감춘 거였는지 확인해야 해.”
모라의 두 번째 편지는 작고 두꺼운 천에 싸여 있었다. 비가 새지 않게 기름을 먹인 뒤 나무 조각에 감추어 두었다고 했다. 피엘은 천을 펴 보았다.
‘첫 도움에 고맙습니다. 다친 사람이 살아났고 제방도 보수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보내 준 말 중에서 우리가 보낸 대답은 사라졌습니다. 떠나겠다는 사람과 남겠다는 사람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적어 주세요. 그 약속이 없다면 다음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우리를 구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집을 지우지 말아 주세요.’
편지 끝에는 답신을 맡을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교대 배달부 리오.’
피엘이 숨을 들이켰다. “그가 모라의 말을 되돌려보내려 했군요.”
토비는 창밖의 강을 보았다. 물이 잦아든 자리에 진흙 자국이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집 벽에 표시를 남기고 손수레에 젖은 책들을 실었다. 천계가 보내 준 거대한 은빛 배는 제방 옆에 묶여 있었다. 배에서 내리는 계단은 자운이 손으로 다시 열어 놓았다.
“어제는 배가 우리를 강제로 데려가려 했고, 오늘은 그 배로 책을 말리네요.” 토비가 말했다.
“기계가 나쁜 게 아닙니다. 사람의 사정을 지우는 사용법이 문제일 수 있어요.” 피엘이 말했다.
“그 말은 검사 끝나기 전엔 저 배를 버리지 말라는 뜻이죠?”
“정확합니다.”
창고 문턱에는 다린의 손자들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방문객이 천사라는 사실보다 토비가 진짜 검을 들고 있다는 데 관심을 보였다. 한 아이가 물었다.
“검으로 편지를 써 본 적 있어요?”
“그런 생각은 처음 해 보네.” 토비가 말했다. “아마 종이가 다 찢어지겠지?”
“그럼 검은 쓸모없는 펜이네요.”
토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 그래서 다른 사람이 편지를 써 주면 내가 지켜 주는 거야.”
피엘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다. 서로 다르게 생긴 도구가 같은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는 편지를 쓰고, 누군가는 편지를 배달하고, 누군가는 길이 무너지지 않게 지켰다. 그런데 천계는 오래전부터 한 장의 명령서에 그 모든 역할을 묶어 ‘누가 책임지는가’만 빨리 결정하려 했다.
다린은 창고 문을 열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기 이름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말하는 건 중요하단다. 그렇다고 남의 말을 대신 다 써 줘도 된다는 뜻은 아니고.”
아이들은 어렵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벤이 말했다. “어른들도 아직 잘 모르는 얘기야.”
다린이 창고로 이끌었다. 창고 한가운데 낡은 배달 가방이 걸려 있었다. 손잡이는 부서졌고 뚜껑에는 종이로 만든 작은 단추가 달려 있었다. 단추에는 검은 원 네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신탁 조작의 대리 승인 번호 0000과 같았다.
세아가 물었다. “리오가 그 번호를 만든 걸까요?”
“단정하면 안 됩니다.” 피엘은 가방을 손대지 않고 사방을 살폈다. 그 가방은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보관한 물건이었다. 유산을 함부로 뜯어서는 안 됐다.
다린은 가족 대표들의 동의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네 개의 칸이 있었다. 첫 번째에는 아직 읽지 않은 편지, 두 번째에는 전달 중인 편지, 세 번째에는 답장을 기다리는 편지, 마지막에는 주소가 틀려 되돌아온 편지를 넣는 구조였다. 네 개의 검은 원은 네 칸이 모두 비었음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빈칸이 네 개였군요.” 세아가 중얼거렸다.
“리오는 편지를 읽지 않았을 때 마음대로 답했다고 적지 않았어요.” 다린이 말했다. “답장을 받지 못한 칸에는 그냥 아무것도 안 적었죠.”
서온이 통신판을 통해 가방 내부의 오래된 기호를 대조했다.
[처음 0000은 배달 상태가 아니야. 네 칸이 전부 비어 있다는 뜻이야. 뒤에 제1문에서 ‘반대 기록 없음’으로, 제3문에서 ‘동의’로, 제7문에서 ‘대리 승인’으로 쓰이게 됐어.]
“가장 오래된 빈칸이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 된 셈이군.” 벤이 말했다.
그때 피엘의 수첩에서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제0경로가 이미 기록한 1,006건의 미해결 오배송을 다시 분류하라는 요청이었다. 요청 발신자는 0000. 피엘은 승인을 누르지 않았다. 보전 명령에는 자동 재분류를 허용하는 내용이 없었다.
통신판에 흰 글씨가 나타났다.
[주소가 없는 것은 발신인이 없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책임이 없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다린이 말했다. “주소가 없는 마을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피엘은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출처와 공개 허용 여부도 함께 기록했다.
서온이 가방 안쪽을 더 확대하자 낡은 봉합 자국이 보였다. 오스벨이 특수 조명으로 비추니 손으로 꿰맨 실 밑에 작은 글자가 있었다.
‘리오, 세 번째 반송 예정. 첫 번째 답장의 분실에 관한 진술을 제출한다.’
“리오는 단순히 이름을 반납한 게 아닌 듯해.” 벤이 말했다.
피엘은 가방 뒤판을 살짝 들어 보았다. 목재 안에 손톱으로 긁은 흔적이 있었다. 지워진 이름보다 뚜렷한 문구였다.
‘내 이름으로 도장을 찍지 마라.’
그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단순한 실종이 아닐지도 몰랐다. 자신이 전한 답장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항의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마을 회관의 등불이 꺼질 무렵 피엘은 홀로 배달 가방 곁에 앉았다. 낮에 서온이 보내 준 자료를 펼쳐 놓고 직무명 피엘의 발생 기록을 비교했다. 300년 전에도 같은 직무명은 있었지만, 기록을 담당했던 배달부가 누구였는지는 비어 있었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름을 잠시 빌려 썼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된 이름이라니.” 피엘이 중얼거렸다.
“겁나는가?” 문가에서 벤이 물었다.
“제 실수인 줄 알았던 일에 다른 사람이 끼어 있었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실수를 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습니다.”
벤은 옆에 앉지 않고 문틀에 기대었다. “너는 처음부터 실적 최하위였지?”
“굳이 그걸 다시 확인하셔야 합니까?”
“최하위인 녀석이 가장 먼저 책임을 뒤집어쓰는 구조가 우연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피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속이 쓰렸다. 잘못 배달된 신탁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 앞에서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책임을 조사하지 않고 모두 자기 이름으로 끌어안는다면 진짜 조작을 저지른 사람은 아무것도 고치지 않을 수 있었다.
“리오는 사라졌어.” 벤이 말했다. “그를 찾아야 한다고 해서 네가 리오가 되는 건 아니지.”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요.”
“그럼 손으로도 배워. 네가 어떤 기록에 서명하는지 볼 때마다.”
벤은 작은 계약용 연필을 책상에 올려두고 돌아섰다. 연필에는 ‘취소할 수 있다’는 짤막한 글씨가 파여 있었다. 악마가 준 물건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피엘은 그 연필로 자기 수첩에 한 줄을 더했다. ‘직무명은 죄의 증거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 내가 한 선택은 조사받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리오의 기록을 찾는 일은 과거의 자신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이름을 빌려 쓰는 모든 배달부가 앞으로 어떤 편지를 보내야 할지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날 밤, 배달 가방의 네 빈칸 가운데 세 번째 칸이 천천히 빛났다. 누군가 300년 전에 넣어 둔 편지가 이제야 도착한 것처럼 종이의 모서리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리오의 마지막 목적지가 적혀 있었다.
‘첫 번째 발신인 등록실. 출입 권한: 이름을 갖지 않은 배달부.’
제11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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