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이 잠시 말을 잃자 금고 안의 숫자들이 대신 떠들었다.
이자가 붙었다. 다시 이자가 붙었다. 천장에서는 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났고, 미엘의 낡은 계산기는 혼자서 움직이는 전산 장부를 따라잡지 못했다.
“내가 처음 본 계약은 이게 아니었어.” 벤이 말했다.
평소처럼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다. 토비는 농장에서 말이 병에 걸렸을 때 아버지가 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누군가 속으로 자꾸 같은 장면을 되풀이할 때 나는 목소리였다.
벤은 장부의 한 모서리를 가리켰다. '긴급 구제 보증'이라는 옛 조항이 있었다. 재난으로 마을의 곡식 창고가 무너졌을 때, 아직 수확하지 않은 곡물 일부를 담보로 씨앗을 빌려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당사자였던 마을 대표들이 직접 조건을 확인했고, 피해가 계속되면 상환을 늦출 수도 있었다.
“그때는 이런 생각이었지.” 벤이 말했다. “지금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년 수확을 약속받고 곡식을 나눠 준다. 계약이라는 건 서로 약속하는 거니까.”
“그 계약에는 누가 서명했나요?” 피엘이 물었다.
“마을 대표 셋과 구제 창고 관리자 하나. 나도 증인으로 서명했어. 분명한 사람들끼리 한 약속이었지.”
그는 금고의 거울에 손가락을 댔다. 잉크가 거꾸로 흐르듯 오래전 풍경이 떠올랐다.
빗속의 강가. 낮은 지붕들이 떠내려가고, 사람들은 좁은 다리 위에서 곡식 자루를 나눠 들고 있었다. 벤은 젊은 악마의 모습으로 강가에 서 있었다. 훗날 입게 될 검은 외투 대신 붉은 조끼를 입고, 뿔을 지나치게 번쩍이게 닦아 놓은 모습이었다.
토비가 조용히 감탄했다. “그때는 좀 멋있으셨네요.”
“지금은 뭐가 부족한데?”
“모자요.”
“나한테 모자를 씌우면 뿔이 안 들어가.”
짧은 농담이 지나가자 거울 속 강물이 다시 요동쳤다.
홍수 뒤에 서명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죽었다. 다른 대표는 이주했고, 남은 대표는 문서를 읽을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그때 천계의 심사관이 벤을 찾아왔다.
“대표가 없어도 구제 계약을 연장할 수 있게 해 주시오. 그게 사람들을 돕는 길이오.”
벤은 반대했다. 원래 계약서에 없는 대표를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고. 그러나 심사관은 말했다. 그 사이 곡식 창고가 문을 닫으면 죽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
“그래서 내가 타협안을 냈어.” 벤이 말했다. “대표가 없는 동안 사흘만 임시 집행하고, 그 사이 새 대표를 찾는다. 세 번째 밤까지도 못 찾으면 멈춘다.”
미엘의 가발 위 낙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조항을 제7문의 기초 규정에 옮겼지.”
“그런데 나중에 누군가 '멈춘다'는 말을 '다음 수신인에게 넘긴다'로 바꿨더군.”
세아가 물었다. “그때 알았어요?”
“십 년 뒤에.”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벤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 사실은 계약 원본을 찾아 마계 감사실에 보냈어.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어.”
피엘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어떤 고백에는 침묵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침묵이 면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 속 강가에는 작은 나무배가 한 척 있었다. 배를 끌던 여인은 발목까지 찬 물속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있었다. 벤이 계약을 설명하던 사이에도 여인은 몇 번이나 배를 왕복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서명란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은 왜 기억하죠?” 세아가 물었다.
“그 여자가 날 보고 이런 말을 했거든. '계약이 끝나면 사람도 끝나는 건 아니지요?'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어.”
벤은 대답을 피하려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마계의 법률가들이 얼마나 고집 센지 농담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울 속 여인은 빗속에서 계속 노를 젓고 있었다.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자기 체중을 한쪽으로 실었다. 누가 나중에 값을 지불할지 계산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서류가 잘 작성되면 일을 다 한 줄 알았어. 내 서명이 이상하게 바뀌었을 때도 진짜 피해자를 만나러 가는 일은 내 직무 밖이라고 생각했지.”
피엘은 거울 속 배를 보았다. 오래전 제8문의 레아가 보낸 거절 답장이 떠올랐다. 누군가 살기 위해 한 행동이 영원한 동의로 바뀌었을 때, 서류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몰라. 정말 몰라.”
벤은 처음으로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적었다. '당시 현장 구조 참여자, 이름 미확인, 추적 필요.' 없는 이름을 임의로 채우거나 이미 죽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기록을 찾으면 될까요?” 토비가 물었다.
“찾고 싶어.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사과를 받아 줄 의무는 없어.”
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우리가 정할 일이 아니니까요.”
“그때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겠지.” 벤은 애써 웃었다. “지상에 가서 누가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한다든지. 천계가 제도를 고치기 전에도 계약이 누구를 다치게 했는지 살핀다든지. 나는 감사실 우편함에 넣고 끝냈어.”
토비가 벤의 얼굴을 살폈다. “그 우편함은 열렸어요?”
“개봉 기록이 없어.”
“그럼 다시 보내면 되잖아요.”
“이번에는 직접 들고 가려고.”
벤은 오래된 감사 신청의 사본을 꺼냈다. 마계 우편 배달부가 남긴 작은 발굽 모양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미엘은 장부의 날짜와 대조해, 벤이 그때 실제로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은 확인했다. 이의가 받아들여졌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서명은 책임의 시작이군요.” 피엘이 말했다. “끝은 아닙니다.”
“그래.”
그때 정산국의 외부 창구에서 종이 울렸다. 핀티에게 새 징수 명령이 내려왔다. 어제 날씨 사고로 보호된 주민들에게 '예상 편익 보전 비용'을 부과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다치지 않았으니 빚을 더 내라는 겁니까?” 나엘이 창구에서 따졌다.
“무사했기 때문에 미래 건강 가치가 상승했다는 계산입니다.” 직원이 답했다.
나엘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제 그 아이들을 옮긴 사람은 누구였죠?”
“현장 기록에 따르면 산파와 진료소 직원, 외부 방문자 다섯 명…”
“그래요. 그 사람들의 일이 우리를 살렸어요. 그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빚이 되는 건가요?”
직원은 규정에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벤은 곧장 창구로 내려갔다. 피엘도 따라갔다. 수금관 핀티는 불편한 얼굴로 장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현장 수금 정지를 연장하고 싶었지만 본부의 승인 없이는 벌금이 쌓였다.
“벌금은 제 이름으로 처리하겠습니다.” 핀티가 말했다.
“그것도 자동 부과라면 먼저 근거를 확인하십시오.” 피엘이 답했다. “개인의 희생으로 제도의 잘못을 덮어서는 안 됩니다.”
핀티는 잠시 놀란 듯 그를 봤다. 그러고는 납부 기록을 보전한 뒤 집행 보류 사유를 직접 작성했다. 처음으로 그의 손에서 자동 도장이 아닌 펜이 움직였다.
벤은 검은 봉랍으로 이의서를 봉했다. 이번에는 담당 부서만이 아니라 피해를 겪은 주민에게도 사본을 전달하기로 했다.
“왜 사본이 필요해요?” 토비가 물었다.
“내가 또 도망칠까 봐.” 벤이 말했다.
“그럼 저도 하나 갖고 있을게요.”
“내 창피한 과거를 수집하려는 거냐?”
“나중에 누가 잘못 말하면 바로잡아 주려고요.”
벤은 잠시 웃었다. 그리고 작게 고맙다고 했다.
벤은 마계의 옛 동료 아자르에게 짧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보낸 감사 이의서가 어느 창구에서 멈췄는지 확인해 줘.' 편지를 보낸 뒤 그는 봉랍을 한참 바라봤다.
“혹시 아자르가 모른다고 하면요?” 토비가 물었다.
“그럼 모른다는 사실부터 기록해야지.”
“뭐든 기록하는 사람이 다 되셨네요.”
“너희랑 오래 다녀서 그래. 아주 안 좋은 습관이 들었어.”
하지만 벤은 편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이번에는 답장이 없어도 직접 찾아가 물을 생각이었다.
그날 밤 미엘은 벤에게 보관고에서 발견한 접힌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앞면은 평범한 구제 계약서였다. 그러나 뒷면에는 벤이 본 적 없는 문장이 있었다.
[임시 집행 3일의 종료 시점을 삭제함.]
[해당 변경은 원서명자의 추후 반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함.]
[검토자: 마계 계약 감정인 벤.]
벤은 종이를 뒤집었다. 서명은 분명 자신의 필체였다. 그런데 그 날짜에 그는 천계에 있지 않았다.
“누가 내 서명도 빌린 거지.”
미엘은 조용히 답했다. “이곳에서는 네가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제10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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