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보관실에서는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천장이 낮고 공기가 차가웠다. 돌벽을 따라 놓인 열일곱 개의 유리상자 안에는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림자는 마치 물속에 비친 얼굴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손가락을 움직이거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레온의 흔적이 있을지도 몰라.” 에스텔이 속삭였다.
도현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레온은 오래전 사라진 요리사 중 한 명이며, 에스텔이 끝내 찾기를 포기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지금 이곳의 그림자가 정말 그라면 에스텔에게는 어떤 기록보다 절실한 단서가 될 것이다.
“하나씩 확인합시다. 듣는 순간 이름을 붙이지 말고요.”
실렌은 상자 앞에 섰다. “이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원래 요리사들의 노동 시간을 보관하는 장치입니다. 보존 마법에 사용된 조리법과 근무 기록이 여기에 들어 있지요.”
“그런데 왜 사람 모습입니까?” 브론이 물었다.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노동이니까.”
“그럼 일한 사람들한테 물어봤어야죠. 자기 모습을 상자에 넣어도 되는지.”
실렌은 말문이 막혔다. 리벨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매일 작성하던 노동 일지를 떠올렸다. 이름 없이 꽃 그림으로 표시된 수많은 날들이 여기 보관됐을지도 몰랐다.
루카스는 상자에 찍힌 인장부터 확인했다. 열여섯 개에 같은 모양의 둥근 봉인이 있었으나 제작 시기는 같지 않았다. 가장 앞에 놓인 것은 최근에 봉인을 다시 했고, 뒤쪽 몇 개는 오래되어 금이 가 있었다.
“이 그림자들이 북부에서 실종된 열여섯 요리사와 관련됐을까요?” 리벨이 물었다.
“숫자가 같다는 것뿐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우리는 북부에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열여섯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곳 상자의 주인을 아직 모르니까요.”
브론이 한숨을 쉬었다. “저는 숫자가 같을 때마다 좀 반갑다가 무서워집니다.”
“반가운 마음은 가지고 있어도 돼요. 다만 확인한 사실과 섞지 말자는 거죠.”
그들은 상자를 함부로 열람하지 않기 위해 작은 확인표를 만들었다. 기록의 제작 시점, 원본인지 복제인지, 본래 기록 대상이 열람에 동의했는지, 열람으로 누군가에게 새 채무가 생기는지. 네 칸 가운데 하나라도 확인되지 않으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이럴 거면 언제 다 봅니까?” 실렌이 답답해했다.
“오래된 장치일수록 더 천천히 봐야죠.” 루카스가 말했다. “제조 연도가 오래됐다는 사실이 내용의 진실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도현은 작업대 위에 빈 보관 봉투를 차례로 놓았다. 작은 봉투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이자 브론이 고개를 저었다.
“요리사 열여섯 명을 찾으러 왔다가 봉투 열여섯 개만 더 들고 가게 생겼군요.”
“찾을 때 필요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제 이름이 들어 있는 상자가 나오면 열어 주세요. 거기 음식 취향도 적혀 있을까요?”
“여기엔 근무 기록이 들어 있다잖아요.”
“제 근무 기록의 절반은 먹은 음식입니다.”
그 말에 리벨이 작게 웃었다. 그동안 지하 보관실을 무서운 창고로만 알았던 그녀는 조금 안심했다. 그러나 보관실 깊은 곳에서 또렷하지 않은 속삭임이 번져 나오자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열여섯 상자는 서로 다른 구절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받았습니다', 어떤 것은 '나중에 지급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거절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도현이 주의 깊게 들으니 그 말들은 누군가의 긴 증언이라기보다 계약서의 짧은 문구를 녹음한 것 같았다.
“사람 목소리로 읽었다고 해서 사람이 동의한 건 아니군요.”
에스텔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의 문장도 복제할 수 있겠지.”
도현은 그러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문장을 복제하려면 원래 문장을 보거나 들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 상자는 실종자들의 생사를 증명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이 어디를 거쳤는지 알려 줄 수 있었다. 그는 유리 표면의 오래된 운송 인장을 따로 베껴 두었다. 벨로스 제3창고에서 본 것과 닮은 모양이었으나 날짜가 달랐다.
“이건 나중에 대조해 볼 만하네요.” 루카스가 말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답을 만들지 말고, 답을 확인할 길만 남겨 둡시다.”
실렌은 그들을 첫 번째 상자 앞으로 데려갔다. 상자 바닥에는 '식재료 세척 담당'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두 번째는 '연료 관리', 세 번째는 '배급표 작성'. 역할은 서로 달랐지만 얼굴은 구별하기 어려웠다. 노동자의 모습을 기록했다기보다 일의 그림자를 사람처럼 만든 장치에 가까웠다.
보관실 한쪽에는 오래된 청소용 천과 손때 묻은 작업대가 있었다. 도현은 그곳에서 관리 기록의 앞뒤 날짜가 맞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 상자에는 백 년 전이라는 설명이 붙었지만 같은 번호의 보수 장부는 서른여덟 년 전부터 시작됐다. 여러 세대에 걸쳐 부품을 갈아 끼웠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기록을 복제하거나 덧붙였을 가능성도 생겼다.
루카스는 상자 뒤편에 새겨진 제작자 표시를 베꼈다. 작업대에는 사소한 흠집과 잉크 얼룩이 많았다. 사람들은 대단한 마법 물품의 빛나는 표면만 보려 했지만, 누군가 오래 손으로 관리했다는 흔적이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기도 했다.
“기록을 누가 맡아 왔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실렌은 오래전 명부를 펴 보였다. 열두 명의 관리인 이름이 있었다. 그중 마지막 셋은 원본이 아니라 옮겨 쓴 서명으로 표시됐다. 실렌 자신이 서명한 장도 있었다.
“여기 적힌 것은 내가 확인할 수 있소.”
“그럼 확인할 수 없는 장은 구분해 두죠.”
실렌은 잠깐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보관실의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믿음만큼은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었다.
에스텔은 일곱 번째 상자 앞에서 멈췄다. 그림자 손에 작은 주걱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자 도현이 가볍게 팔목을 붙잡았다.
“확인하고 만져요.”
“알아.”
그녀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상자의 표식을 읽었다.
[조리 원칙 관찰자.]
[근무 기록: 서명 미완료.]
[음성 열람: 복제 기록.]
마지막 문구가 중요했다. 상자 안의 음성이 실제 당사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재생하거나 조합한 기록일 수도 있었다.
실렌은 상자 측면의 손잡이를 돌렸다. 유리 안쪽에서 짧은 노크가 들렸다. 똑, 똑, 똑. 에스텔은 숨을 삼켰다. 곧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먹지 않은 사람이 값을 낼 수는 없어.'
레온이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에스텔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은 뭉개졌고, 목소리는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가 말한 내용이야.” 에스텔이 말했다.
“레온이 여기 직접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도현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도 누군가 지우지 않고 남겼네.”
그 말에는 기쁨보다 슬픔이 많았다. 그녀는 유리 너머에 손바닥을 댔다가, 금방 떼어 냈다. 도현은 그동안 에스텔이 과거의 선택을 설명하려 애쓰면서도 레온을 잃은 순간에는 여전히 멈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마지막 상자로 이동하자 공기가 달라졌다. 열일곱 번째 상자는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도 쌓이지 않았다. 누군가 매일 닦아 놓은 듯 깨끗했다.
“여긴 무엇을 보관하려 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실렌이 말했다. “최초의 거절입니다. 결실을 멈춰 세운 대답을 저장하려 했지요. 하지만 이 상자만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습니다.”
“거절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과 모르겠다는 건 다릅니다.”
실렌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답을 피했다.
그때 리벨이 상자 바닥의 작은 홈을 발견했다. 매듭 셋이 나란히 새겨진 표시였다. 흰 화덕섬에서 나리가 보여 준 끈의 표식과 닮아 있었지만 가운데 매듭의 방향이 조금 달랐다.
“이거 하나가 늘 손으로 만들던 매듭과 비슷합니다.” 리벨이 말했다.
“하나?”
“온실에서 태어난 줄 알았던 아이요. 매년 똑같은 말을 하니까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누가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본 적은 없었어요.”
실렌은 갑자기 손에 든 지팡이를 바닥에 세웠다. “그 아이에게 가지 마시오.”
에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 아이가 첫 수확을 허락하면 이곳의 봄이 끝납니다.”
도현은 실렌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아이에게 허락을 받으려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거절했는지 직접 듣고 싶습니다.”
“똑같은 말이지.”
“다릅니다. 허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먼저 말할 겁니다.”
그들은 상자를 다시 봉인하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일곱 번째 상자의 음성은 별도 보관 기록으로 남겼고, 실종 요리사와의 동일성은 미확인이라고 명시했다.
온실 중앙에는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작은 흰 끈을 들고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지막 매듭은 언제나 조금 비뚤었다.
도현은 아이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백도현이야.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왜 첫 수확을 기다리는지 알아보고 있어.”
아이는 손을 멈췄다. “내가 먹으면 다른 사람도 먹어야 하잖아.”
“누가 그렇게 말했니?”
아이는 잠시 유리 지붕을 올려다봤다. “옛날에. 빵을 안 먹겠다고 했을 때 어른들이 그랬어.”
도현의 등줄기를 차가운 감각이 스쳤다.
“그 빵은 어디서 봤니?”
“바다가 보이는 하얀 화덕 앞에서.”
그 아이는 계속 매듭을 만들었다. 세 번째 매듭을 짓는 손가락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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