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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저주받은 식당의 요리사가 되었다 · 96화
PAYLUA ORIGINAL · 제96화

96화. 내일을 담보로 맡긴 밭

저주받은 식당의 요리사가 되었다 · 4,293자

오프라인 책장
온실 바깥의 밭은 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낮 동안 따뜻했던 흙 표면에 서리가 앉았고, 잎이 아직 마르지 않은 늦가을 채소들이 고개를 숙였다. 농부들은 횃불을 들고 물길 주변을 뛰어다녔다. 어떤 이는 헝겊으로 작물을 덮었고, 어떤 이는 작은 불을 피워 찬 공기를 밀어내려 했다. 도현 일행은 온실에서 나오는 수로를 따라 내려가 농부들을 도왔다. “우리 때문입니까?” 리벨이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도현은 물을 나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온실 시계가 움직인 것과 서리가 시작된 시간이 비슷하긴 합니다. 그래서 더 확인해야 해요.” 루카스는 밭 주인의 이름과 위치, 서리가 시작된 시각을 적었다. 에스텔은 마력의 방향을 확인했다. 온실 쪽에서 희미한 차가운 기운이 흘러 나왔지만 그것만으로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한 구역에서는 바람이 바뀌었고, 다른 구역은 유리 지붕 그늘에 있어 원래 온도가 낮았다. 브론은 농부들에게서 걷어 온 젖은 천을 털다가 중얼거렸다. “봄을 저 안에 모아 두면 밖에는 겨울만 남습니까?” “말로는 그럴듯한데, 정말 그런지 확인하기 전에는 더 괴롭히지 말아요.” 도현이 말했다. 첫 새벽빛이 비칠 무렵 밭 주인 달렌이 일행 앞을 가로막았다. 뺨이 움푹 팬 중년 남자였다. 손에 쥔 쇠삽이 떨렸다. “왕궁에서 왔다면서요. 당신들이 온실을 건드린 뒤 내 밭이 얼었습니다.” 도현은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했다. 작은 밭 하나가 일 년 먹을 것을 책임질 수도 있었다. “저희가 어제 안쪽에서 재배 실험을 했습니다. 이후 시계가 움직였고, 여기서 서리가 발생했습니다. 실험과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겠습니다.” “조사하면 작물이 살아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달렌은 쇠삽을 땅에 꽂았다. “그럼 손해는 누가 갚소?” 도현은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왕실 허가서가 피해 보상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실험을 제안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피할 수 없었다. “우선 피해를 기록하고, 책임이 확인되면 누가 보상해야 하는지 공식적으로 요구하겠습니다. 오늘 당장 필요한 식사와 비닐 대신 덮을 천은 저희가 마련해 보겠습니다. 조사 결과와 관계없이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달렌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이 가지고 온 감자 자루를 농부들의 임시 화덕 옆에 내려놓자 일단 막아 서지는 않았다. 날이 밝았을 때 농부 달렌의 작은 딸이 온실 울타리까지 찾아왔다. 아이는 손에 검게 얼어붙은 완두콩 줄기를 들고 있었다. 다 자라지도 못한 잎이 손가락 사이에서 부서졌다. “아버지가 화가 많이 났어요.” 아이가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올해 먹을 게 부족해질 거라고 하셔요. 화를 내면 콩이 돌아오나요?” 도현은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했다. 자신의 실험이 원인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아직 인과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 자신이 전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는 것도 거짓일 수 있었다. “아직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확인하고 있어.” “그럼 아저씨도 모르는 거예요?” “응. 모르는 걸 알았다고 하면 더 위험해질 수 있어.” 아이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손에 쥔 줄기를 내려놓았다. “그럼 꼭 알아봐 주세요.” 도현은 그 줄기를 종이에 싸서 표본으로 남겼다. 그냥 대화 하나였지만 그는 약속이 얼마나 무거운지 느꼈다. 세상이 어려우니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은 이 아이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날 도현은 자기가 만든 작은 임시 식당을 밭 가장자리에 열었다. 농부들이 추위를 견디며 일을 마친 뒤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화덕 하나를 세웠다. 감자와 버섯으로 끓인 걸쭉한 수프는 화려하지 않았다. 대신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고, 누가 받았는지도 직접 셀 수 있었다. 달렌은 처음에는 그릇을 거부했다. “사과하려고 밥을 주는 거요?” “죄송한 마음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 드신다고 저를 용서하실 필요는 없어요.” 달렌은 그 말을 곱씹다가 그릇을 받았다. 수프를 먹은 뒤에도 표정이 풀리지는 않았다. 도현은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분노가 한 끼 식사로 없어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날 밤 달렌은 자신의 밭 온도를 잰 기록을 가져왔다. 바깥에서 체감한 서리의 시각과 온실 시계가 움직인 시각이 거의 맞아떨어졌다. 두 기록을 대조하자 새로운 조사 지점이 생겼다. 그는 도현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겪은 일을 사실대로 적어 줄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도현은 기록을 받아 적다가 왼손의 통증에 펜을 놓쳤다. 회색 반점이 손가락 관절에 조금 더 진하게 보였다. 에스텔은 잠시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쉬어. 네가 쓰러지면 이 사람들도 곤란해.” “아직 두 개뿐인데요.” “개수가 그대로라고 상태도 그대로인 건 아니야.” 도현은 손을 쥐었다 폈다. 엄지의 움직임이 살짝 느렸다. 석화 저주가 여전히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는 처음으로 업무를 루카스에게 넘기고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다른 사람의 내일을 지키겠다는 사람이 자기 손의 오늘까지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온실로 돌아온 일행은 실렌에게 보존 장치를 일시적으로 점검할 것을 요구했다. 실렌은 대답 대신 북쪽 보관실의 문을 잠그려 했다. 그를 막은 사람은 도현이 아니라 리벨이었다. “저 안의 장부를 봐야 합니다.” “그건 관리 권한 밖이다.” “제 이름으로 기록된 예정 임금이 저기 들어 있잖아요.” 실렌의 손이 멈췄다. 리벨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부터 두 개의 날짜를 써 온 일지를 펼쳐 보였다. “밖에서는 해가 지고 또 떴는데, 안에서는 내일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를 처음으로 적어 봤어요. 전엔 제가 틀린 줄 알았습니다.” 실렌은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세르빈에게 원본 열람 요청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절차를 밟으면 며칠 걸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며칠 동안 바깥 밭이 계속 얼면요?” 리벨이 물었다. “온실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 도현은 그때 실렌이 단순히 탐욕 때문에 침묵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 시설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굶게 된다고 정말 믿는 듯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다른 사람의 피해를 지워 주지는 않았다. 에스텔은 실렌에게 오랫동안 보존을 유지해 온 이유를 물었다. 실렌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릴 적 이 온실 문 앞에서 어머니가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당시엔 종자 한 줌이 한 마을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겨울을 겪지 않으려면 씨앗을 붙잡아 둬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씨앗을 보관하는 것과 첫 수확을 영원히 막는 것은 달라.” 에스텔이 말했다. “보관 마법을 끝내면 씨앗이 다 죽을 수도 있어.” “확인해 보지 않고 막는 것도 위험해.” 두 사람은 오래전 구호 계약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작됐다는 점에서는 생각이 같았다. 달라진 것은 그것이 언제 끝나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늦은 오후 리벨은 자신이 정리하던 배수관 기록에서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서리가 내린 날에는 온실 안의 '수확 예정 가치'가 정확히 같은 양만큼 증가했다. 바깥 밭의 손실을 온실의 미래 수확으로 옮겨 적는 장치일 수도 있었다. “수확을 하지도 않았는데 수량이 늘었다고요?” 브론이 물었다. “수량이 아니라 장부의 가치예요.” 루카스가 말했다. “그 숫자가 바깥 손실과 같은 단위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기록의 단위를 맞춰 보았다. 북쪽 밭 한 곳의 피해 면적과 온실 채권의 숫자가 일정한 비율로 변하고 있었다.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통계적 우연으로 넘기기엔 반복이 많았다. 도현은 실렌에게 다시 요청했다. “수로 장치를 함께 확인합시다. 지금 없애라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어디서 가져오는지 알아야 중단할지 유지할지 결정할 수 있어요.” 실렌은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안의 기록을 보면 당신들은 이곳을 없애라고 할 겁니다.” “그럴지 아닐지는 모르죠.” “그렇다면 내가 직접 보여 주겠소.” 실렌은 북쪽 보관실의 자물쇠를 풀었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자 흙 냄새 대신 묵은 빵 냄새가 진해졌다. 방 한가운데에는 열일곱 개의 작은 유리상자가 있었다. 열여섯 개에는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비쳤고, 나머지 하나는 비어 있었다. 브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안에 누가 있습니까?” 실렌은 도현을 돌아봤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그 사람들이 남긴 일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도현은 유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잃어버린 요리사 열여섯 명을 찾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열여섯 그림자를 그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었다. 빈 열일곱 번째 상자 밑에는 짧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첫 수확 거절자: 보관 불가.] [거절은 저장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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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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