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를 떠나는 날, 백도현은 감자부터 샀다.
길을 나서는 사람이라면 말의 먹이나 지도, 여벌 옷부터 챙겨야 할 것 같았지만 도현의 생각은 달랐다. 동부 유리 온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더라도 사람은 하루에 몇 번씩 배가 고팠다. 저주받은 음식만 있는 장소라면 차라리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재료를 들고 가는 편이 나았다.
왕도 동문 시장의 가을은 선명했다. 상인들은 늦게 수확한 사과를 광주리에 담아 놓았고, 골목에서는 젖은 낙엽을 쓸어 모았다. 양털을 실은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공기에 마른 풀 냄새가 났다. 식당에서 가져온 구리 냄비를 수레에 고정하던 브론은 감자 자루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여행 중에 요리하십니까?”
“안 먹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건 맞습니다. 다만 감자는 무겁습니다.”
“어제는 여행 음식에 감자가 꼭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요.”
“먹을 감자는 가볍고 나를 감자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도현은 자루 하나를 브론에게 건넸다. 브론은 두 팔로 그것을 안고 한숨을 쉬었다. 그 옆에서 루카스가 여정 허가서와 물품 목록을 대조했다. 이번 조사단의 공식 명목은 '동부 원재료 보존지 현장 확인'이었다. 왕실이 보증하는 방문이지만 시설 운영권을 빼앗거나 보관물을 임의로 열 권한은 없었다.
“현장 책임자가 문을 닫으면 어떡합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문을 닫을 권한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죠. 그리고 닫는다면 이유를 적어 돌아옵시다.”
에스텔이 투덜거렸다. “넌 가끔 문을 열려고 이세계에 온 건지, 문 닫은 사람에게 영수증 받으러 온 건지 모르겠어.”
“문을 잘못 열어서 여기 왔으니까요.”
그 말에 셋이 잠깐 웃었다. 에스텔은 웃음을 멈춘 뒤 도현의 손목을 보았다. 석화의 회색 반점과 기억 저주의 검은 가닥이 아직 남아 있었다. 두 저주는 사라지지도,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가지도 않았다. 도현은 매일 아침 손가락을 굽혀 보며 그 사실을 확인했다.
출발 전 아일린이 작은 마차를 타고 왔다. 검은 왕관 문양을 가린 흰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장갑 끝까지 올라온 그림자를 감추지는 못했다.
“저도 동행해야 하는데.”
“공주님은 공개 검증 결과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오늘 떠나시면 라우렌 쪽에서 기록을 다시 고칠 수도 있어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아일린은 봉인된 두 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하나는 동부 행정청에 보내는 조사 협조 요청서, 다른 하나는 일행이 돌아오지 않을 때 공개하도록 세르빈에게 맡긴 확인서였다. 공주는 먼저 서명한 뒤 자신의 보증이 무엇을 뜻하는지 차분히 설명했다.
“저는 왕실의 잘못을 전부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알아볼 권한을 빌려드립니다. 당신들의 결론을 대신 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도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들이 왕도에서 사흘을 달렸을 때 길가의 풍경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가을 수확을 끝낸 밭 옆으로 연한 초록빛 목초지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햇볕을 잘 받는 구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나뭇가지에 맺힌 꽃망울과 누렇게 마른 잎이 같은 나무에 달려 있는 광경이 보였다.
“저 나무는 계절을 헷갈리는군요.” 브론이 말했다.
에스텔은 수레에서 내려 흙을 한 줌 집었다. 땅은 차가웠는데 흙 위의 풀잎은 따뜻했다. 그녀는 검은 밀 싹을 보관한 유리병을 꺼냈다. 왕도 우물에서 건져 격리한 싹의 모양을 그린 그림일 뿐, 실제 싹은 왕실 검사소에 남겨 둔 상태였다.
“온실에서 새어 나온 마력이야.”
“위험합니까?”
“식물이 바로 죽는 종류는 아니야. 오히려 계속 자라게 하지. 다만 자란 뒤의 시간을 어디에서 가져오는지는 모르겠어.”
길가에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꽃 핀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며 가지를 잘라 내고 있었다. 도현은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물을 샀다. 농부는 금액을 듣자 먼저 손사래를 쳤다.
“이 근처에선 내일 갚겠다고 적는 게 빠릅니다. 돈은 나중에 정산하거든요.”
“오늘 물을 받았으니 오늘 드리겠습니다.”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하더군. 저 길 끝에서 돌아온 사람은 별로 없지만.”
“왜 돌아오지 못했습니까?”
농부는 대답 대신 먼 언덕을 가리켰다. 숲 위로 둥근 유리 지붕 하나가 솟아 있었다. 햇빛을 받으면 금빛이어야 할 지붕이 희고 푸른 색으로 빛났다. 그곳으로 이어진 수레길에는 바퀴 자국이 수없이 겹쳐 있었지만 반대편으로 난 자국은 희미했다.
“온실에 들어간 사람들은 봄이 좋다더군요. 일도 많고 꽃도 피니까요. 그런데 수확할 날이 오지 않아요.”
도현은 농부가 건넨 물을 마셨다. 물맛은 평범했다. 먼지와 바람을 맞은 뒤 마시는 물이라 더 반가웠다.
“바깥 밭의 수확은 어떻습니까?”
농부는 비어 있는 창고 문을 바라봤다. “작년보다 줄었지요. 저곳에서 따뜻한 봄을 가져갈수록 우리 겨울이 길어져요.”
그들은 그 말을 주장으로만 기록했다. 온실이 정말 주변 땅의 겨울을 길게 만드는지 확인할 자료는 아직 없었다. 그러나 농부의 창고가 비어 있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 오후에는 바퀴 한쪽이 돌에 걸려 수레가 멈추기도 했다. 브론은 혼자서 수레를 들어 올리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차축을 비틀었다. 루카스가 수레 아래 돌을 받치는 동안 도현은 짐을 내려 무게를 줄였다. 수리비를 내야 하는 역참이 가까웠지만, 근처 밭의 농부가 도끼와 나무 쐐기를 빌려 주었다.
“이쪽 길은 해마다 지반이 조금씩 움직입니다.” 농부가 말했다. “그런데 온실 방향의 길만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어요. 비가 와서 흙이 씻겨 내려가도 저 언덕엔 패인 자국 하나 없죠.”
“거기까지 직접 가 보셨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몇 년 전엔 종자 배급을 받으러 갔지요. 곡식은 얻지 못했지만 번호표는 받았습니다.”
농부는 주머니에서 푸른 표 하나를 꺼냈다. 숫자는 거의 지워졌으나 모서리에 찍힌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첫 수확 시 우선 배정.' 몇 년 동안 갖고 있었다면서도 농부는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이거라도 없으면 다음 기근이 올 때 우리 차례가 사라질까 봐.”
도현은 표를 잠시 살펴보고 돌려주었다. 그곳에서 사람을 붙잡는 것은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올 거라는 구호의 약속도 사람들이 오랫동안 삶을 미루게 하고 있었다. 그는 표가 어디서 발급됐는지 기록해 두었다. 농부는 그를 도우면서도 자기 표를 넘겨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자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수레가 다시 움직일 즈음 지나가던 아이들이 개울가에서 꽃을 꺾어 놀고 있었다. 하나는 활짝 핀 꽃을 들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봉오리인 가지를 들었다. 아이들이 서로 어떤 것이 예쁘냐고 다투자 브론이 꽃 두 송이를 동시에 맡았다.
“저는 열매가 열리는 쪽이 좋습니다.”
아이들이 웃었다. “이 꽃은 열매가 안 열려요!”
“그럼 벌들이 뭘 먹습니까?”
“벌은 저 언덕에 안 가요. 꽃이 많아도 꿀을 못 가져온대요.”
브론은 표정을 바꿨다. 그는 벌이 없는 꽃밭의 냄새를 떠올렸다. 꽃향기는 짙지만 그 사이를 오가는 곤충 냄새가 적었다. 도현은 실제로 벌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아이들이 말한 장소를 지도에 표시했다. 길 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곳의 문제는 단순한 수확 지연보다 넓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농부에게 바퀴 수리와 물값을 각각 지불했다. 농부는 두 사람의 도움을 따로 기록하는 이유를 묻자 도현이 대답했다.
“나중에 누가 한꺼번에 저희를 도왔다고 적어 놓으면, 실제 누가 뭘 했는지 알 수 없잖아요.”
농부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표를 품에 넣고 돌아갔다.
해가 질 무렵 일행은 온실에서 한 고개 떨어진 역참에 묵었다. 도현은 감자와 양파로 걸쭉한 수프를 끓였고, 브론은 자신이 진 쌀자루만큼 감자를 먹었다. 에스텔은 창문을 열어 밤공기를 확인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초록빛 언덕 위에서 작은 꽃가루가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반대로 불어.”
루카스가 바깥의 풍향기를 살폈다. 역참 깃발은 동쪽을 향했지만 꽃가루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 계절의 조각을 유리 지붕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도현은 마당에 떨어진 꽃가루를 손가락으로 만지지 않았다. 접시에 받은 뒤 뚜껑을 씌웠다. 접시의 테두리에 글자가 떠올랐다.
[보존 대상: 아직 열리지 않은 첫 수확.]
[반입 기준: 도착한 내일을 사용하지 않을 것.]
“내일을 사용하지 않는다니요.” 브론이 물었다.
“내일이 와도 오늘이라고 우기는 곳인가 봅니다.”
새벽이 되자 역참의 시계가 한 번 멎었다. 종은 분명 여섯 번 울렸는데, 창가의 꽃은 여전히 전날 해질 무렵의 모습이었다. 일행은 서로의 시계와 기록을 대조했다. 실내의 사람들은 밤을 보냈고 배도 고팠다. 멈춘 것은 세상 전체가 아니라 온실을 향해 날아가는 꽃가루의 변화뿐이었다.
도현은 장부 첫 장에 적었다.
[동부 유리 온실 접근. 주변 자연의 계절과 생육 상태 불일치. 원인 미확인.]
그 아래에는 평소처럼 재료비도 기록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먼 언덕의 유리 지붕 아래서 종이 울렸다. 자그마한 종이었으나 소리는 계곡 전체로 번졌다.
그리고 역참 주인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저 종이 울리는 날은 온실에서 새 사람이 나오는 날인데.”
“좋은 일 아닙니까?” 브론이 물었다.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새 사람은 나오지요. 그런데 나가는 사람은 늘 어제 들어간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제9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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