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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저주받은 식당의 요리사가 되었다 · 9화
PAYLUA ORIGINAL · 제9화

9화. 왕실 주방의 보리 수프

저주받은 식당의 요리사가 되었다 · 5,698자

오프라인 책장
그날 저녁, '마지막 한 숟갈'의 메뉴판에서 보리 수프가 사라졌다. 백도현은 칠판에 적힌 글씨를 지우고, 그 자리에 새 메뉴를 적었다. [오늘의 추천: 냉정해지는 차.] [가격: 동화 두 닢.] [효능: 급한 결정을 잠시 미룰 수 있음.] 브론이 칠판을 읽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허브차잖아요.” “맞아요.” “손님들을 속이시는 겁니까?” “냉정해질 시간은 줄 수 있죠. 뜨거워서 바로 못 마시니까.” 브론은 한참 생각한 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거 대박 상품인데요.” 하지만 도현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왕실 보관소에서 가져온 장부 한 장은 식당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가 이세계에 떨어진 장소, 처음 받은 두 개의 저주, 아일린 공주의 방문까지 우연이 아닐 수 있었다. 에스텔은 반쯤 열린 장부를 보며 긴 침묵을 지켰다. “이 식당에서 첫 만찬을 만들었다고?” “네. 기록에 분명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 기록은 없애지 못했구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없애려고 한 사람이 누굽니까?” 에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녀가 비밀을 숨기는 방식까지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씁쓸해졌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에스텔은 먼저 침묵했다. 그 침묵을 끝내게 만드는 건 언제나 누군가 다친 다음이었다. “에스텔 씨. 이제라도 말해 주세요.” “말하면 넌 여기서 떠날 거야.”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마녀는 한동안 눈을 감았다. “옛날에 왕실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기적의 음식을 나눠 줬어. 하지만 그 음식을 만든 레온조차 재료의 본질을 몰랐지.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전부라고 믿었어. 그리고 요리가 완성된 날, 이 식당은 스스로 문을 닫아 버렸어.” “문을 닫았다고요?” “건물 전체가 밖과 다른 장소가 됐다는 뜻이야. 아무도 나갈 수 없었어. 누군가는 저주를 끌어안고 이곳에 남아야 했지.” 도현은 낡은 주방 문을 떠올렸다. 한국의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버려져 있던 문을 열고 이곳으로 왔다. 어쩌면 그 문은 우연히 나타난 입구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럼 왜 제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까?” “그건….” 그때 왕실의 봉인 문양이 찍힌 편지가 식당 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는데 봉투는 스스로 바닥을 따라 움직였다. 브론이 주워 읽었다. “왕실 자선 만찬 사전 시식회? 내일 정오, 왕궁 서쪽 주방. 조리 실력을 인정받은 자만 참석….” “저희한테 초대장이 왔네요.” 도현이 말했다. “안 돼.” 에스텔이 즉시 답했다. “가야 합니다.” “왕실이 함정을 판 거야.” “그렇겠죠. 하지만 왕궁 주방에 들어갈 기회이기도 합니다.” 에스텔은 손목에 감긴 저주의 흔적을 바라봤다. “너는 아직 두 개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면서.” “그래서 요리하러 가는 게 아니라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그 둘의 차이가 얼마나 오래 지켜질 것 같아?”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장부에 짧게 적었다. [대원칙: 사람에게서 저주를 받는 조리 금지.] [예외: 없음.] 다음 날 왕궁 서쪽 주방에는 각지에서 모인 요리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청동 냄비들은 사람 키보다 컸고, 바닥의 대리석은 발소리가 울릴 만큼 매끄러웠다. 창문마다 푸른 유리 장식이 빛나고, 거대한 화덕에서는 여섯 개의 불길이 동시에 타올랐다. 도현은 잠시 감탄했다. 이런 곳에서 하루라도 요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곧 스스로의 생각이 우스워졌다. 세상을 구할 단서보다 주방 설비부터 평가하다니,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요리사였다. “재료 보관은 훌륭한데 작업 동선은 좋지 않네요.” 그가 중얼거렸다. “누가 감히 왕실 주방의 동선을 평가하지?”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금빛 단추가 달린 흰 조리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에는 오래된 화상 흉터가 있었고, 은빛 칼집 여러 개가 허리에서 흔들렸다. “왕실 총주방장 베네딕트다.” “백도현입니다. 작은 식당에서 일합니다.” “알고 있다. 공주님에게 수프 한 그릇을 내고 왕궁을 어지럽힌 자.” “수프는 멀쩡했는데요.” 주변 요리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베네딕트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오늘은 장난치는 자리가 아니다. 각 요리사는 한 가지 식사를 준비해 평가를 받는다. 평가자는 왕실 고문단이다.” 도현은 그 말의 어색함을 느꼈다. “자선 만찬 사전 시식회라면서요. 먹는 사람은 어려운 이웃들이 아니고 고문단입니까?” “요리의 안전을 검증하기 위함이다.” “그분들이 배고픈 사람들이 실제로 먹을 음식을 아실까요?” 베네딕트가 도현을 노려봤다. 그러나 반박하지는 않았다. 주방장의 지시에 따라 요리사마다 작업대 하나씩이 배정됐다. 도현에게 돌아온 자리는 가장 끝,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였다. 물을 길으러 가려면 다른 요리사들의 뒤를 지나야 했고, 오븐까지는 열 걸음이 넘었다. “일부러 이 자리를 준 것 같네요.” 브론이 속삭였다. “원래 신입은 가장 불편한 자리부터 받기도 해요.” “그건 좋지 않은 풍습인데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은 동선부터 고쳐 봅시다.” 도현은 물통의 위치를 옮기고, 채소를 손질할 자리를 조리대 한쪽에 정했다. 재료를 놓는 순서만 바꿔도 움직임이 훨씬 줄었다. 브론은 처음에는 무슨 차이가 있냐며 의아해했지만, 직접 바구니를 나르다 보니 금방 이해했다. 바로 옆 작업대에는 남부 귀족 가문을 위해 일한다는 젊은 요리사 네린이 있었다. 그녀는 향신료 병을 일렬로 세운 뒤 도현이 보리를 씻는 모습을 흘끗 봤다. “왕실 시식회에 그걸 가져왔어요?” “보리요?” “대단한 기술을 보여야 인정받는 자리예요. 사람들은 화려한 걸 원하잖아요.” “자선 만찬이라는데요.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네린은 잠시 망설였다. “제 고향도 지난겨울 곡식이 부족했어요. 그래도 왕궁에 오면 좋은 재료로 실력을 보여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도현은 그녀의 조리대 위에 놓인 얇은 고기 조각을 보았다. 잘 손질된 고기였지만 값이 너무 비싸 많은 사람에게 나누기는 어려웠다. “손님이 누구인지 아는 게 더 어려운 실력입니다.” 네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얼마 뒤 자신이 만든 향신료 소스를 작은 병에 담아 왔다. “이거 조금 쓰실래요? 수프에 넣으면 향이 좋을 거예요.” 도현은 향을 맡아 본 뒤 고개를 저었다. “고맙습니다. 다만 오늘은 누구나 같은 재료로 재현할 수 있는 요리를 만들고 싶어요.” 네린은 잠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가 도현의 장부를 보았다. “그럼 나중에 조리법을 보여 주실래요?” “물론이죠. 대신 당신 소스도 만드는 법을 알려 주세요.” 그제야 네린이 웃었다. 서로 경쟁하는 주방에서도 조리법 하나쯤은 나눌 수 있었다. 도현은 이 작은 약속이 마음에 들었다. 준비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 어떤 요리사는 붉은 와인에 오래 졸인 고기를 선택했고, 다른 요리사는 진귀한 수정 소금을 사용해 얼음 위에 생선을 올렸다. 도현은 창고를 둘러보다가 가장 구석에 놓인 보리와 뿌리채소, 말린 콩을 집어 들었다. 브론이 놀랐다. “왕궁까지 와서 보리 수프입니까?” “오늘 손님들에게 필요한 게 뭘까요?” “기적 같은 음식?”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죠. 맛있고, 싸고,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 보여 주겠습니다.” 도현은 콩을 삶아 부드럽게 만들고, 잘게 다진 양파와 당근을 볶았다. 커다란 냄비 바닥에 버터를 조금 녹인 뒤 밀가루를 넣어 고소한 향이 올라오도록 볶았다. 거기에 닭 육수를 조금씩 부어 덩어리를 풀었다. 보리를 넣자 수프는 천천히 걸쭉해졌다. 작은 주방에서 수십 번 만들었던 음식이었지만 오늘은 일부러 조리법과 양을 명확하게 적었다. “왜 계량까지 하십니까?” 베네딕트가 물었다. “제 손맛만으로 만들면 다른 사람이 따라 하지 못하니까요.” “왕실 주방에서는 각자의 비법이 재산이다.” “그럼 왕국에 굶주린 사람이 생길 때마다 유명한 요리사만 기다려야 합니까?” 베네딕트는 한동안 도현의 장부를 바라봤다. “대량 배식에 적합하군.” 그 한마디에는 뜻밖의 인정이 담겨 있었다. 평가 시간이 되자 고문단이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는 국왕의 고문관인 회색 수염의 남자도 있었다. 귀족들은 화려한 요리를 먼저 맛본 뒤 도현의 수프 앞에서 멈췄다. “이것이 자선 만찬에 내놓을 요리인가?” “네. 부담 없이 만들 수 있습니다.” “왕실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데.” 도현은 대꾸 대신 수프를 작은 그릇에 담았다. 고문관은 못마땅해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첫입을 먹었을 때 표정이 달라졌다. 두 번째 숟가락 뒤에는 고개가 조금 숙여졌다. “소박하지만 괜찮군.” “맛을 아는 분이라 다행입니다.” 그때 도현은 고문관의 손을 보았다. 장갑 아래로 검은 실금이 뻗어 있었다. 공주의 손에 새겨진 왕관과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젓가락처럼 긴 선들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고문관이 세 번째 숟갈을 뜨자 도현의 눈앞에 문장이 떠올랐다. [식탁 연결자 접촉.] [연결 인원: 183,442명.] [이번 식사로 저주 이전 가능성: 낮음.] 도현은 수프가 그를 치료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다른 점을 주목했다. '식탁 연결자'.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저주를 이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고문관이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잘했네, 요리사. 내일 본 만찬에서는 좀 더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주겠나?” “본 만찬에는 참석이 어렵습니다.” “왜지?” “손님들이 누구인지, 어떤 재료를 쓰는지, 무슨 목적으로 내놓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고문관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왕실이 보증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왕실이 보증하는 음식이 사람들의 기억을 빼앗았다면요?” 식당 같은 주방에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고문관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 말의 책임을 질 수 있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어떤 기록이지?”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도현은 벨리온처럼 발설 금지 저주가 없다는 사실에 잠깐 감사했다. 다만 눈앞의 고문관이 자신을 그대로 보내 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베네딕트가 나섰다. “고문관 각하. 그는 오늘 시험에 초청된 요리사입니다. 그의 조리법은 유익하며, 불필요한 분쟁은 주방의 명예를 해칩니다.” 고문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좋다.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고문단이 빠져나가자 베네딕트는 도현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네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고 있나?” “왕실 음식이 안전한지 알아보는 중입니다.” “나는 삼십 년 동안 이 주방을 지켰다. 그동안 요리사들이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도현의 눈빛이 변했다. “이 식당의 요리사들 말입니까?” 베네딕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마지막 음식은 언제나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희생을 요구한 자들은 단 한 번도 스스로 숟가락을 들지 않았지.” 그는 자신의 칼집에서 녹슨 작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내일 만찬이 열리기 전에 서쪽 주방 아래로 가라. 그곳에 예전 구호 조리실로 통하는 문이 있다. 난 그곳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도현은 열쇠를 받아 들었다. “왜 제게 주십니까?” “너는 맛을 먼저 보는 사람이 아니라 먹을 사람부터 생각하더군.” 베네딕트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네 수프에는 그때 쓰던 검은 시럽이 없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도현은 칼집 같은 열쇠를 손안에서 굴렸다. 손바닥에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제7조리실 출입 열쇠.] [주의: 내부에는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은 손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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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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