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종이 세 번 울린 뒤 왕도는 십삼 초 동안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우물에서 물을 긷던 여자가 두레박을 놓친 채 서 있었고, 거리의 마차는 달리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시장의 생선 장수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잃었다. 십삼 초 뒤 모든 것이 다시 움직였지만, 누구도 방금 무엇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백도현은 십삼 초를 모두 기억했다.
종이 울릴 때마다 자신의 손목에 남은 석화 저주가 굳어 갔고, 기억 저주는 눈앞의 풍경에서 색을 지워 버렸다. 세 번째 종소리가 끝나자 식당 창밖의 시민들이 동시에 한마디를 속삭였다.
“잘 먹겠습니다.”
도현은 그 말을 듣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식당 안에서 유일하게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에스텔이었다. 마녀는 종소리가 시작되자마자 창문에 검은 천을 덮고, 가게 현관문에 은빛 가루를 뿌렸다. 브론은 주방 구석에서 두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저건 누구한테 밥 먹으라고 하는 종이죠?” 도현이 물었다.
에스텔은 대답 대신 탁자에 앉았다.
“궁에 가야 해.”
“공주님 출입증은 오늘부터 유효합니다.”
“그럼 더 늦기 전에 확인해야지. 왕궁이 종을 울렸는지, 아니면 종을 울릴 자가 왕궁 안에 있는지.”
도현은 그 차이를 마음속에 새겼다. 마녀가 아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이 있다는 뜻이었다.
수로 옆의 광장에서는 신발 수선공이 가게를 닫고 아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새벽부터 머리가 아프다며 자기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바로 옆 과일 좌판에서는 상인이 손님에게 자두 한 개를 건네고도 가격을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해 같은 계산을 세 번 반복했다.
도현은 공책에 그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두 사람 모두 공주와 같은 검은 왕관 표식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주와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증상이 너무 다양해서, 누구를 만나든 같은 병이라고 쉽게 말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저주가 퍼지는 걸까요?” 브론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어젯밤 종 때문에 원래 있던 증상이 두드러진 걸 수도 있죠. 무턱대고 치료하면 위험합니다.”
도현은 길가의 작은 찻집에서 따뜻한 물을 한 잔씩 샀다. 잠시 멈춰 마시는 동안 광장의 소란을 살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질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브론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저는 종이 울렸을 때 아버지 얼굴이 생각났어요.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라 희미한데, 갑자기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좋은 기억이었습니까?”
“처음에는요.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는 아무도 밥을 먹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된 뒤였죠.”
도현은 브론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또렷해졌다. 왕국이 '전원 구제'라고 기록한 사건은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잊고 싶은 날이었다. 같은 사건이 영웅담과 재앙으로 동시에 남아 있었다.
“왕궁 기록에 살아남은 사람만 적혀 있다면 반쪽짜리 역사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그럼 어떤 기록을 찾아야 하죠?”
“식사를 나눈 사람도, 음식을 만든 사람도, 그 뒤에 무엇을 잃었는지도 전부 적힌 기록이요.”
찻집의 작은 종이 울렸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손목을 감쌌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제 평범한 종소리에도 놀라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씁쓸하게 웃었다.
왕궁으로 향하는 길은 평소보다 혼잡했다. 누구나 새벽의 이상한 정적을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하늘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사람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며 웃어넘겼다. 벽에는 붉은 종을 그린 낙서가 나타나 있었고, 경비병들은 그것을 급히 지우고 있었다.
도현과 브론은 서쪽 성문에서 출입증을 제시했다. 담당 병사가 늑대인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왕실 기록보관소에 짐승 출입은 금지다.”
브론의 귀가 낮게 내려갔다. 도현은 출입증을 다시 건넸다.
“이분은 제 직원입니다. 사람보다 글씨를 잘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냄새는 훨씬 잘 맡아요.”
“규정상—”
“공주님 허가입니다. 직원 출입이 안 된다면 저도 돌아가죠.”
병사는 한참 고민하더니 마침내 길을 열어 주었다. 브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감사는 월급날 하세요.”
“월급을 깎으실 생각은 아니죠?”
“오늘 지각한 건 봐드리죠.”
둘은 왕궁 내부의 길고 서늘한 회랑을 통과했다. 높은 천장에는 풍작과 전쟁 승리를 묘사한 벽화가 이어져 있었다. 벽화 속 왕들은 모두 풍성한 식탁 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백성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야 할 배경은 붉은 칠로 덮여 있었다.
“이건 원래 이런 그림입니까?” 도현이 물었다.
“후대에 보수한 걸 거예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아일린이 나타났다. 공주는 베일 대신 소박한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손등의 검은 왕관은 더 뚜렷해져 있었다.
“종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십삼 초 동안 왕도가 멈췄습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왕궁 시계는 정확히 십삼 초 늦어졌거든요.”
아일린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공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더 울리면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묵살됐고요.”
도현은 그녀가 준비해 둔 서류 꾸러미를 보았다.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기록보관소를 열어 주신 거군요.”
“공식적으로는 조리법 조사입니다.”
“왕국을 구하겠다면서 주방에서부터 시작하면 덜 위험해 보이겠죠.”
공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보관소는 왕궁 동쪽 지하에 있었다. 복도마다 마법 등불이 켜져 있고, 벽에는 수백 년간의 연회 참석자 명단이 보관되어 있었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가죽 냄새가 얽혀 숨이 답답했다. 기록관 세딘은 공주가 직접 안내한 방문객을 보고도 인상을 찌푸렸다.
“일반 요리사에게 왕실 문서를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보려는 건 왕의 비밀 편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뭘 먹었는지 적은 기록입니다.” 도현이 답했다.
“왕이 먹은 식단도 왕실 기밀이오.”
“그럼 왕이 안 먹은 식단은 괜찮겠네요.”
세딘은 도현을 빤히 보았다. 브론이 옆에서 큼큼거렸다.
“이 방은 종이 냄새보다 곡식 냄새가 강해요.”
“잉크와 양피지의 혼합 향이지.” 세딘이 말했다.
“아뇨. 오래된 보리, 검게 탄 설탕, 축축한 빵 냄새입니다.”
도현은 브론이 가리키는 서가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왕실 연회 문서가 아니라 기근 당시의 배급 장부가 따로 모여 있었다.
[제27대 국왕 재위 19년. 대기근 마지막 겨울.]
도현은 장부를 펼쳤다. 굶주린 마을의 이름, 배급량, 이송 인원, 사망자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기록은 잔인할 만큼 세밀했다. 맨 뒷장에는 한 줄이 반복되었다.
[정상 공급. 전원 구제. 후유증 없음.]
“당시 전원 구제라니요. 이 시대에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세딘이 대답했다.
“기근 말미에 왕실이 신성한 곡물을 발견했소. 빵 한 덩이로 열 사람이 배를 채웠다는 전설이지.”
“그 곡물은 어디서 났습니까?”
“기록에는 기적이라고만 되어 있소.”
“기적은 보통 납품처가 없습니까?”
세딘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도현은 한 장씩 넘기다가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배급을 받은 사람의 이름 옆에 적힌 작은 별표. 처음에는 식량 부족 가구를 표시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별표가 있는 사람의 자녀와 손자에게도 같은 표시가 이어져 있었다.
“이 표시가 뭡니까?”
세딘은 장부를 급히 덮으려 했다. 아일린이 손을 얹어 막았다.
“답하세요.”
“왕실 구호 대상자의 혈통 확인 표시입니다.”
“왜 구호를 받은 사람의 후손까지 기록한 거죠?”
“모릅니다. 저는 전달받은 기록만 정리합니다.”
브론이 별표가 있는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 있습니다.”
도현이 그를 돌아봤다.
“확실해요?”
“네. 제 고향 이름도 맞아요. 할아버지는 기근 때 배급 빵을 처음 받은 분이셨어요.”
그의 손끝이 떨렸다. 도현은 장부의 표시가 세대마다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공주의 손에 새겨진 숫자가 출생과 죽음에 따라 바뀌는 이유가 어렴풋이 보였다. 저주는 단순히 음식을 먹은 사람뿐 아니라 그 후손에게까지 묶여 있었다.
“배급 받은 사람이 모두 저주에 걸린 건 아니었군요.” 도현이 말했다. “그들의 후손까지 계약 대상으로 잡힌 겁니다.”
아일린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계약이라고요?”
“이런 숫자는 저절로 남지 않습니다. 누군가 명단을 관리하고 있다는 거죠.”
도현은 마지막 장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총괄 조리 책임자: 레온.]
지하실 냄비에 적혀 있던 전임 요리사의 이름이었다. 그 아래로 아주 오래된 잉크로 된 다른 문장이 보였다.
[승인 권한자: 왕실 구호위원회.]
[계약 대가: 수혜자 일가의 미사용 생명력과 기억 일부.]
아일린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럴 리가 없어요. 구호 사업이 사람들을 살린 것은 사실이에요.”
“사람들을 살렸겠죠.” 도현이 말했다. “다만 값을 누가 냈는지 말하지 않은 겁니다.”
그때 보관소의 등불이 차례로 꺼졌다. 세딘은 안절부절못하며 문 쪽으로 움직였다. 복도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왕실 문장을 단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었다. 맨 앞에는 아일린의 호위기사 루카스가 서 있었다. 그가 낮게 말했다.
“공주님. 국왕 폐하의 명령입니다. 오늘 열람한 문서를 모두 봉인하고 방문객을 인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일린이 그를 바라봤다.
“루카스, 그대도 알고 있나요? 저 장부에 무엇이 있는지.”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쥔 긴 나무 주걱만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도현이 선물한 물건이었다.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기사들이 앞으로 걸어왔다.
바로 그 순간 루카스가 손에 든 주걱으로 옆의 비상문을 가리켰다.
“다만 이 복도는 지금 보수 중이라, 도주자가 발생하면 추적하기 어려울 겁니다.”
도현은 그의 표정을 읽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경고였다.
“좋은 건축 정보 감사합니다.”
그가 말했다.
브론이 장부에서 낱장 두 장을 재빨리 뜯어 앞치마 안에 숨겼다. 세딘이 외쳤지만 아일린이 그의 앞을 막았다.
“오늘 저들이 본 것은 오래된 요리 기록입니다. 제 허락으로 열람했습니다.”
도현은 문 앞에서 공주를 돌아봤다.
“공주님은요?”
“저는 왕궁 안에 있어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아일린은 쓰게 웃었다.
“괜찮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도현과 브론이 비상 계단을 내려가자 뒤에서 쇠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먼지와 습기 속에서 둘은 오랫동안 뛰었다. 지상으로 나오자 왕궁 서쪽 뜰에는 늦은 오후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도현은 숨을 몰아쉬며 브론이 훔쳐 온 낱장을 펼쳤다. 첫 장은 구호 식단이었다. 보리와 감자, 검은 시럽, 이름 모를 육수. 두 번째 장에는 도저히 음식이라고 부를 수 없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최종 첨가물: 한 사람의 귀환 가능성.]
도현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귀환 가능성을 먹인다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었던 골동품 주방 문을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그 문이 어느 골목에 있었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소녀의 저주가 조금 더 자란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계약에 묶이고 있는 것일까.
낱장 맨 아래에서 그가 알아볼 수 있는 문구가 떠올랐다.
[첫 만찬의 조리 장소: 마지막 한 숟갈.]
도현의 손이 멈췄다.
왕국 전체를 묶은 식탁은 왕궁이 아니라 그들이 매일 장사를 하던 작은 식당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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