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햇빛이 서쪽 별관의 푸른 지붕에 닿을 무렵, 왕궁 관리인들이 검증대의 화덕을 철거하러 왔다.
도현은 멀리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여섯 명의 인부가 굵은 쇠사슬을 어깨에 메고 광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비켜 달라고 외치며 검증대 주변에 붉은 줄을 쳤다. 가장 앞에 선 감독관은 궁정 인장이 찍힌 종이를 흔들었다.
“공개 검증 시설 임시 폐쇄 명령입니다. 안전상 이유로 모든 화덕을 회수합니다.”
“누가 명령했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구호위원회에서 내려왔습니다.”
도현은 이미 식혀 놓은 자기 화덕을 돌아봤다. 사용하던 솥은 깨끗이 닦아 뒤편에 놓았고, 장작도 모두 빼 두었다. 검은 국물이 솟았던 다른 화덕은 여전히 조사용 봉인을 한 상태였다. 안전 문제가 있다면 그곳을 먼저 통제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인부들은 도현의 화덕으로 곧장 다가왔다.
“왜 이것부터 옮깁니까?”
“이 화덕은 개인 소유의 장비라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희가 직접 반입했다는 기록은 있고, 설치 허가도 받았습니다.”
감독관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지금은 철거 지시가 우선입니다.”
브론이 화덕 앞에 몸을 세웠다. 덩치가 큰 늑대인간이 양팔을 벌리자 인부들이 움찔했다.
“주방장님이 뭘 잘못했습니까? 화덕이 말을 듣지 않는 것도 아니고, 제 몫까지 평범하게 끓여 줬습니다!”
“브론, 비켜요.” 도현이 말했다.
“하지만 저 사람들이 화덕을 가져가면—”
“사람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지킬 물건은 아닙니다.”
도현은 감독관에게 다가가 화덕의 소유와 반입 기록을 보여 줬다. 그리고 다른 조리 시설을 마련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감독관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은 듯 멈칫했다. 화덕을 없애면 검증이 끝날 줄 알았지, 다른 화덕으로도 요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공개 검증을 위한 적법한 대체 장소가 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그건 제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럼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동 부엌에서 하겠습니다. 화덕은 시장에도 있으니까요.”
감독관은 표정을 굳혔다. “왕실 검증을 민간 부엌에서 한다고요?”
아일린이 단상 뒤에서 걸어왔다. “참관객에게 사실을 공개하고, 위원회가 정식으로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조리 장소를 특정하는 조항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니까요.”
그 순간 인부 하나가 쇠사슬을 놓쳤다. 사슬 끝이 검은 화덕의 봉인 줄을 스쳤다. 아무도 불을 붙이지 않았는데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이어 화덕 아래에 쌓인 장작더미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불이야!”
사람들이 뒤로 밀려났다. 광장 중앙에 설치해 둔 천막이 불꽃에 닿자 얇은 천이 순식간에 탔다. 루카스가 관람객을 출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브론은 넘어질 뻔한 아이를 안아 들고 뛰었다. 도현은 냄비에 남아 있던 따뜻한 물을 찾다가 멈췄다. 뜨거운 기름이 있는 곳에 물을 무작정 붓는 일은 위험했다. 그는 먼저 불씨가 붙지 않은 장작을 치우고, 모래주머니로 불길이 번지는 길을 막았다.
에스텔은 바람을 낮추는 짧은 주문을 걸었다. 마법이 불꽃의 가장자리를 누르는 사이 왕궁 소방대가 도착했다. 화덕 위에는 밀가루 포대가 쌓여 있었다. 도현은 인부들에게 포대를 함부로 던지지 말라고 외쳤다. 가루가 흩날리면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었다.
그들이 한참 동안 불길을 막는 사이 라우렌이 나타났다. 그는 사건을 보자마자 손을 들어 외쳤다.
“개인 화덕 때문에 발생한 사고입니다! 검증을 중단하고 모든 관련 기록을 회수하겠습니다!”
루카스가 대꾸했다. “아직 원인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지시한 철거 작업 중에 발생한 사고입니다.”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도현이 모래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사람이 위험하니까 먼저 대피시키고 불을 꺼야죠. 그다음 원인을 조사하면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들을 만큼 분명했다. 라우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꽃은 금방 약해졌지만 천막 일부는 검게 탔다. 남은 연기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도현이 맡은 냄새는 검은 시럽과 비슷했다. 그는 그 사실을 말하기 전에 실제 남은 찌꺼기를 확인하자고 했다.
그때 검은 화덕이 스스로 움직였다. 바닥의 돌판이 울리더니 화덕 안쪽에서 글씨가 떠올랐다.
[사용되지 않은 식사 7인분.]
[철거 시 강제 정산 예정.]
“철거하면 빚이 생긴다는 뜻인가요?” 브론이 물었다.
세르빈이 그 글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화덕을 없앤 사람을 수령자로 등록하려는 구조일 수 있습니다.”
“그럼 저 인부들이 대신 빚을 지는 겁니까?”
도현은 인부들을 돌아봤다. 감독관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명령서가 그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그의 무지를 꾸짖는 일이 아니라 잘못된 기록을 멈추는 일이었다.
“철거 작업을 중지하겠습니다.” 아일린이 말했다. “불에 그을린 자재는 안전 담당자가 확인한 뒤 옮기도록 하죠.”
공주의 명령이 내려오자 감독관은 서둘러 인부들을 물렸다. 검은 화덕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 아래에서 아주 희미한 마찰음이 났다. 무언가 먹지 않은 식사를 억지로 다음 사람에게 넘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저녁 무렵 시장의 공동 부엌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불길이 잡힌 뒤, 소방대는 불에 탄 천막의 잔해를 치웠다. 인부 하나가 손등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고, 왕궁 의무관이 즉시 치료했다. 사고를 지켜본 사람들이 그를 수군거리자 도현은 옆에서 손을 거들었다. 화덕을 잘못 건드린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도, 다친 사람을 그대로 두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감독관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위에서 시킨 대로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화덕을 옮기는 일 자체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그런데 어떤 화덕을 먼저 옮길지 정한 사람은 따로 있는 거죠?”
“명령서에는 당신의 화덕부터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명령서 사본을 받을 수 있습니까?”
감독관은 망설이다가 루카스를 바라봤다. “제가 이걸 드렸다는 이유로 해고되면 어떻게 합니까?”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증언을 기록하되 공개 여부와 신분 보호를 먼저 상의하겠습니다. 약속할 수 없는 걸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감독관은 처음으로 어깨의 힘을 조금 풀었다. 그는 사본을 넘겨주되 자신이 읽지 못했던 각주 한 줄을 가리켰다. '비정상 화덕 분류'라는 제목 아래에는 작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실물 조리가 확인되는 화덕을 우선 철거할 것.]
도현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검은 시럽이 솟는 화덕보다 실제 사람이 요리한 화덕을 먼저 없애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 목적이 안전이었다면 설명할 수 없는 순서였다. 에스텔도 문장을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저 사람들은 사고를 막으려 한 게 아니야. 비교할 음식을 없애려 했던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도현이 말했다. “다만 누가 그 문장을 써 넣었는지는 아직 확인해야 합니다.”
사본을 봉인하는 동안 화상을 입은 인부가 멀리서 손을 들어 인사했다. 도현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화덕은 부서질 수 있고 천막은 다시 세울 수 있지만, 한 번 다친 사람이 원래대로 회복하는 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화덕이 철거됐다는 소식보다, 검증을 아예 취소하지 않겠다는 소식이 더 빨리 퍼졌다. 오래된 우물 옆에 나무 탁자가 여러 개 놓였다. 시장 상인들이 자기 화덕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빵집 주인은 굴뚝을 점검해 주겠다고 했고, 수레 주인은 물을 운반하겠다고 했다.
“제가 빵을 구울까요?” 리아가 물었다.
“오늘은 어른들이 하게 두자.” 마리아가 말했다. “넌 먼저 따뜻한 곳에 앉아 있어.”
도현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지만, 왕국의 미해결 문제를 대신 떠안을 의무는 없었다.
상인들은 각자 가져온 재료와 값을 탁자에 적었다. 누군가는 돈을 받고, 누군가는 기꺼이 무상으로 나눴다. 무상으로 내놓은 재료에도 제공자의 이름과 목적을 남겼다. 이를테면 ‘오늘 저녁에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과 열 개 기부’ 같은 문장이었다.
브론이 커다란 글씨로 간판을 적었다.
[오늘의 메뉴: 평범한 수프.]
[값: 무료. 다음 사람의 내일은 받지 않음.]
“너무 길어요.” 도현이 말했다.
“그럼 줄일까요?”
도현은 한참 간판을 바라보더니 웃었다. “아니요. 오늘은 길어도 괜찮겠습니다.”
작은 광장에 불이 하나둘 피어올랐다. 왕궁의 검은 화덕 일곱 개와 달리, 이곳의 불은 누가 장작을 가져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도현은 그 차이를 내일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 무렵 시장의 공동 부엌에서는 늦은 수프가 끓었다. 오늘도 일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상인들은 음식을 무료로 나눠 주었지만 무상 제공을 미덕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재료비를 따로 모았고, 누군가는 노동 시간을 기록했다. 어제의 누락된 장부를 오늘의 친절로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마리아는 감자 껍질을 얇게 벗기며 도현에게 물었다. “요리한 사람이 누구인지 적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나고 설거지한 사람도 기록할까요?”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주방은 요리가 접시에 담긴 다음에도 계속되니까요.”
브론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제 이름을 맨 위에 적어 주세요. 오늘 그릇을 한가득 닦았습니다.”
“그릇 두 개 깨뜨린 것도 같이 적을까요?”
“그건 굳이 기록할 필요가 있습니까?”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도현은 그 소리를 들으며 구호위원회의 단상에서 들었던 종소리를 떠올렸다. 오늘 밤 두 공간을 나누는 것은 마법의 강약이 아니었다. 누구의 이름을 어떤 이유로 기록하는지, 틀렸을 때 고칠 수 있는지의 차이였다.
그러나 왕궁 안쪽에서 라우렌은 이미 새로운 명령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검증 장소 이탈 시 참가 자격 박탈.]
[보류된 식사 일곱 건은 최초 등록자에게 합산.]
최초 등록자의 이름 칸에는 백도현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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