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검증대의 공기는 전날보다 차가웠다.
아침부터 왕궁 바깥에 모인 사람들은 작은 일만 생겨도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검은 국물이 솟았다는 소식은 밤새 왕도를 돌았다. 어떤 이는 왕실이 오래전 약속한 구호식을 되찾았다고 기뻐했고, 어떤 이는 실종된 요리사들의 유령이 돌아왔다며 문을 걸어 잠갔다. 상인들은 평소처럼 좌판을 열었지만, 검증대를 바라보는 눈길만큼은 쉽게 떼지 못했다.
백도현은 전날 남겨 둔 수프를 확인했다. 냄비 바닥에 붙지 않게 식혀 보관한 뒤, 오늘은 새로 끓인 음식과 섞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주무르며 기록을 읽었다. 검은 국물은 아무도 끓이지 않았고, 어느 누구의 손으로도 제공되지 않았는데 제공 완료라고 적혔다. 그 기록에는 카르도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잠시라도 쉬셔야 합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쉬고 있습니다.”
“계속 장부를 보고 계시는데요.”
“머리로 쉬고 있습니다.”
브론이 끼어들었다. “머리로 쉬면 머리가 항의하지 않습니까? 저는 위장으로 쉬는 게 좋습니다.”
도현은 결국 웃었다. 그 웃음을 듣고 에스텔도 창가에서 고개를 들었다. 얼마 전까지 그녀는 모든 잘못을 혼자 떠안으려 했다. 지금은 도현에게 따뜻한 물잔을 건네고, 그가 받겠다고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날 오전, 세르빈이 도착했다. 그는 검은 시럽 병의 반입 기록을 가져왔다. 병 일곱 개는 각기 다른 날짜에 보관됐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봉인 끈을 고정한 밀랍에는 모두 같은 제조 번호가 찍혀 있었다. 문제는 같은 날 봉인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병에도 ‘미래의 출전 후보’라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후보를 누가 오래전에 알고 있었을까요?” 세르빈이 물었다.
“오래전에 안 게 아니라 최근에 쓴 거겠죠.” 도현이 답했다.
“그렇다면 내용물과 기록의 나이를 구별해야 합니다.”
에스텔은 손가락으로 봉투를 펼쳤다. 오래된 시럽이 새 병에 옮겨졌을 수도 있었다. 이 시럽의 성질 자체를 알지 못한 채 위조라고 단정하면 오히려 증거를 놓칠 수 있었다.
“왕궁 안쪽에 있는 납품 창고를 조사해야 해.” 에스텔이 말했다.
아일린은 곧바로 출입 허가를 요청했다. 예상대로 승인은 지연됐다. 구호위원회는 조리 검증이 진행되는 동안 내부 저장실의 실물 조사까지 허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대신 서류 열람을 제안했다. 도현은 거절했다. 이미 서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 쓰이는 것을 보았다.
결국 아일린은 왕실 의무관 두 명과 독립 보관인 세르빈을 동행시키는 조건으로 보존 조사만 허가받았다. 어떠한 병도 열지 않고, 원래 있던 자리와 봉인을 기록하는 조사였다. 그들은 해가 높이 뜰 무렵 작은 철문 앞에 섰다. 철문 안에는 찬 공기와 검은 설탕 냄새가 가득했다.
창고는 생각보다 넓었다.
창고 벽에는 과거 구호소에서 썼다는 오래된 그림이 걸려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배를 채우는 모습이었다. 밝은 얼굴의 아이가 빵을 들고 있고, 뒤편의 왕실 사제가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친절한 벽화였지만 도현은 그림 아래쪽의 식탁을 오래 들여다봤다. 접시는 열 개였는데 의자는 아홉 개뿐이었다. 한 사람의 접시가 누구의 몫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림은 기록보다 정직할 때도 있군요.” 도현이 말했다.
세르빈은 벽화 아래 서명을 읽었다. 수백 년 전 왕실 구호위원회의 첫 창설을 기념하며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을 그린 화공의 이름은 남아 있었지만 주문자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도현은 그 사실도 적었다. 누가 그렸는지와 누가 그리라고 했는지의 차이는 작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찾는 것은 바로 그런 차이였다.
루카스가 벽의 다른 편을 조사하자 오래된 출입 표지판이 나왔다. [재료 저장실]이라고 적힌 화살표 옆에 [수확 이전 보관품]이라는 낯선 문장이 있었다. 실제 농장에서 수확하기 전의 곡물을 창고에 둘 수는 없었다. 그는 그 말을 아일린에게 보여 줬다.
“이런 용어는 왕실의 식량 관리 문서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일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평범한 곡물이 아닌 다른 것을 관리했다는 뜻일 수 있겠군요.”
도현은 차가운 돌벽을 만지려다 멈췄다. 그는 한국에서 신메뉴를 개발할 때 생물학적 재료의 수확 시점과 보관 기간에 민감했다. 버섯은 얼마나 말렸는지, 과일은 얼마나 익었는지에 따라 맛이 달랐다. 그런데 '수확 이전'을 영구히 저장한다는 발상은 요리사의 눈에도 기묘했다.
“농작물이 자라는 시간을 어딘가에 쌓아 놓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가 말했다.
“그걸 쓸 수 있나요?” 브론이 물었다.
“모르죠. 하지만 그 시간의 주인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재료라고 부르면 안 될 겁니다.”
에스텔은 벽화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전에 레온과 함께 보았던 검은 밀의 발아 실험이 떠올랐다. 그때 레온은 빈 화분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아무것도 심지 않았는데 싹이 난다면 먼저 무엇을 빼앗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그녀는 그 말을 도현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기록과 자신의 기억을 구별해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레온이 예전에 한 말을 기억해. 다만 그 말이 지금 여기의 진실인지는 따로 확인해야 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잃어버린 사람의 기억을 증거로 삼을 때도 그 사람의 말이 왜 나왔는지 알아야 했다. 벽면에는 쌀과 보리, 소금, 설탕, 마른 허브가 정리돼 있었다. 구석에는 쓸모없어진 오븐 문이 쌓였고, 그 뒤로 좁은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 끝 작은 방에는 검은 병이 아니라 텅 빈 나무 선반이 있었다.
“여기에 있던 병들이 검증대로 갔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선반에는 병마다 원래 이름표가 붙었던 자리가 남아 있었다. 여섯 개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일곱 번째 자리만 일부러 긁어 놓은 듯 지워져 있었다. 도현은 접촉하지 않고 빛을 비춰 살폈다.
[조리 후보가 아닌 제공 기록.]
[식사 시간 반환 대기.]
“일곱 병 모두 요리사 이름은 아니었군요.”
세르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번째 병은 누군가의 부재 자체를 담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때 갑자기 창고의 외문이 닫혔다. 묵직한 빗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루카스는 반사적으로 문 쪽으로 달렸지만 에스텔이 그를 막았다.
“서두르지 마. 이 방은 소리에 반응해.”
바닥 아래에서 쇠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선반 밑 검은 글씨가 번졌다.
[조사 인원: 6명.]
[예정 제공 식사: 6인분.]
“여기 아무 음식도 없는데!” 브론이 외쳤다.
도현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반대편 좁은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곳에는 바람이 들어왔다. 그는 벽을 따라 놓인 화덕 통풍구를 찾아 손가락으로 먼지의 흐름을 살폈다. 창고를 음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오인하게 만든 것은 이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사실뿐이었다. 사람 수를 곧바로 식사 수로 바꾸는 오래된 장치가 아직 작동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먹으러 온 게 아닙니다.” 도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증거 보존을 위한 조사입니다.”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에스텔은 힘으로 마법을 지우려다가 멈췄다. 함부로 부수면 누군가 이미 기록된 사람에게 손해가 돌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아일린이 물었다.
도현은 잠깐 생각한 뒤 자신의 수첩을 펼쳤다. 사람마다 현장에 들어온 목적과 담당 업무를 적어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여섯 명의 이름 대신 직무를 적었다. 조사자, 기록자, 안전 담당, 증거 보존 담당, 동행 의무관 둘. 그리고 그 아래에 썼다.
[식사 주문 없음. 조리 없음. 수령 의사 없음.]
세르빈이 공식 조사 번호를 덧붙였다. 창고 바닥의 글씨가 잠시 흔들렸다. 예정 제공 식사라는 문구 옆에 작은 글씨가 생겼다.
[수령 인원 미확정.]
빗장이 올라갔다. 루카스가 문을 열자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모두가 밖으로 빠져나온 뒤 아일린은 문을 다시 봉인했다. 그녀의 손등에 있던 왕관 모양 문양이 잠시 짙어졌으나 이내 가라앉았다. 저주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도현은 창고에 적힌 ‘식사 시간 반환 대기’라는 문장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사람의 시간을 담보로 잡는 계약이라면 누군가는 그 시간을 돌려줘야 할 터였다. 다만 그것이 특정한 한 사람의 희생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창고에서 나왔을 때 아일린은 계단 아래에서 잠시 멈춰 섰다. 구호위원회 건물의 높은 창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어릴 적 그녀는 이곳을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다. 사람들을 먹이고 병을 낫게 하는 왕실의 선의가 모인 곳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막상 문을 열어 보니 이름을 빌리고 시간을 청구하는 장부가 있었다.
“왕실이 모든 것을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그녀가 말했다.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당시에 실제로 사람들을 구한 일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 왜 이런 방식으로 바뀐 걸까요?”
“아직 모르죠. 다만 누군가를 먹인 일이 그 사람의 후손을 영원히 묶어 둘 허가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일린은 소매를 정리했다. 검은 문양의 끝이 옅게 떨렸다. 그녀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지 생각했다. 자신이 할 일은 왕국을 위해 죽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잘못된 규칙을 고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기록을 공개하겠습니다. 다만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은 동의 없이 내보내지 않겠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왕궁에 왔을 때 공주는 저주를 당장 풀어 달라고 말했다. 이제 그녀는 무엇을 어떻게 밝힐지 스스로 결정하고 있었다.
저녁에 세르빈은 창고의 조사 보고서를 정리하다 이상한 기록을 발견했다. 첫 번째 검은 시럽 병의 재료 목록은 비어 있었지만, 일곱 번째 병에는 재료 대신 장소가 적혀 있었다.
[원재료 보존지: 동부 유리 온실.]
[저장 품목: 수확하지 않은 봄.]
그가 그 글을 도현에게 보여 주자 브론이 고개를 갸웃했다.
“봄도 저장할 수 있습니까?”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계절까지 식재료로 계산한 계약이 있다면, 그곳에는 이 왕국이 아직 잃지 않은 미래가 갇혀 있을지도 몰랐다.
제8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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