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 서쪽 별관에서 종이 세 번 울리는 날에는 문지기들이 제복을 바꿔 입었다.
평소에는 파란 조끼와 짧은 망토였지만, 공개 조리 검증을 앞둔 오늘만큼은 검은 조끼에 은색 단추가 달린 긴 외투를 입었다. 궁문 밖에서는 시민들이 그 모습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아이들은 성대한 연회가 열리는 줄 알고 손뼉을 쳤지만, 어른들은 길어진 대기줄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 사이로 ‘검증을 보기만 해도 수혜가 인정된다’는 소문이 벌써 퍼져 있었다.
아일린은 별관의 높은 계단 앞에 임시 안내대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안내대 위에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관람은 식사 수령이 아닙니다.]
[기록과 출석은 본인 동의 없이 채무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실제로 왕실이 보장할 수 있는 문장입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제가 오늘 확인하겠습니다.”
공주는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 밑에는 피로가 깔려 있었다. 검은 왕관 저주가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번질 때마다 몸 안의 열이 잠깐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녀는 손을 감싸 쥐며 어제 도현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아프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의사를 대신 결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도현은 그 시각 별관 뒤편의 작은 조리실에서 장작을 살펴보고 있었다. 공개 검증에 사용할 화덕은 일곱 개였다. 가장 작은 화덕은 오랫동안 쓰지 않은 탓에 재와 녹슨 철조각이 가득했다. 도현은 제일 먼저 굴뚝을 확인했다. 연기가 제대로 빠지지 않으면 검증이고 뭐고 시작도 할 수 없었다.
“왕실이 준비했다는 화덕이 왜 이렇게 낡았죠?” 브론이 물었다.
“사용할 사람보다 구경할 사람이 중요했나 보죠.”
“저는 구경할 사람한테도 연기 냄새가 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굴뚝을 고치는 겁니다.”
브론은 지붕 위로 올라갔고 루카스는 아래에서 밧줄을 잡았다. 잠시 뒤 쌓여 있던 검은 재가 쏟아졌다. 브론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새까매진 채 지붕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주방장님! 이제 제가 숯처럼 보입니까?”
“그대로 구워도 될 것 같습니다.”
“늑대인간 구이는 메뉴에 없습니다!”
그 소란을 들은 베네딕트가 웃음을 삼키며 다가왔다. 그는 일곱 화덕의 불씨를 순서대로 검사했다. 여섯 번째까지는 평범한 나무가 타는 냄새였다. 그런데 일곱 번째에서는 아무것도 태우지 않았는데도 싸늘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이 화덕은 쓰지 말게.” 베네딕트가 말했다.
“고장입니까?”
“옛 구호 조리실에서 가져온 것 같군. 불을 놓으면 음식 대신 장부의 한 장을 태운다고들 했네. 예전에는 괴담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함부로 웃을 수 없겠어.”
도현은 화덕 벽의 균열을 종이에 베꼈다. 균열은 우연한 금이 아니라 일곱 가닥으로 갈라진 왕관 모양이었다. 아일린의 저주와 닮았다.
그때 별관 안에서 급히 부르는 소리가 났다. 참가자 명단이 공개됐다는 것이었다.
긴 복도의 끝에는 회색 벽보가 붙어 있었다. 첫 번째에는 백도현, 두 번째에는 레온이 적혀 있었다. 세 번째 이름은 북부 루덴에서 돌아온 마르타였다. 네 번째는 왕궁 주방장 베네딕트. 나머지 세 칸에는 이름 대신 흐릿한 먹줄만 있었다.
“레온 씨는 아직 제7조리실에 갇혀 있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저 역시 신청하지 않았네.” 베네딕트가 덧붙였다.
마르타는 왕도에 오지도 않았다. 북부에서 몸을 회복하며 공동 부엌을 돕고 있다는 편지가 며칠 전 도착했을 뿐이다. 그런데 명단은 네 사람을 참가자로 적어 놓고 있었다.
“이것도 장부가 사람보다 먼저 작성된 건가요?” 브론이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라우렌이 복도 건너편에서 나타났다.
“왕실이 검증의 정확성을 위해 과거 경험자들을 포함했습니다.”
“마르타 씨의 허락을 받았습니까?”
“서류상 후보 추천은 가능합니다.”
“추천과 참가를 구별해 주세요.”
도현의 말에 라우렌은 손에 든 명단을 접었다. “일곱 자리는 일곱 자리가 있어야 하기에 마련한 겁니다.”
“비어 있으면 비어 있는 대로 두면 됩니다.”
라우렌이 미간을 좁혔다. “백 요리사, 한 끼 식사로 사람 수십만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그런 형식 문제쯤은—”
“한 끼로 끝낼 수 있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도현은 주머니에서 지난번 공개 심리의 결정문을 꺼냈다. 기존 저주와 왕국 전체 채무는 미해결이라는 마지막 줄에 굵은 밑줄을 그었다.
“근거 없이 기적을 광고하면, 절박한 사람들이 그 약속부터 믿습니다.”
그때 벽보 아래의 먹줄이 흔들렸다. 두 번째 칸의 레온 이름에서 검은 액체 한 방울이 떨어졌다. 도현의 앞치마에 넣어 둔 부러진 주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걱 손잡이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불참자의 이름으로 발생한 의무: 무효 심사 대상.]
에스텔은 그 문장을 보자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레온이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야.”
“그러면 그가 동의했다고 판단해도 됩니까?” 라우렌이 물었다.
“아니요. 방금 확인한 건 반대입니다.”
세르빈이 명단 앞에 섰다. 그는 참가자의 이름 옆에 따로 이의 표시를 붙였다. 레온과 마르타의 칸에는 ‘당사자 직접 확인 불가’, 베네딕트의 칸에는 ‘참가 거절’이라고 썼다. 첫 번째 도현의 칸에는 '조건부 참여 의사, 공급자 책임 승계 거부'라고 적었다.
보관소의 종이 반응했다. 붉은 빛이 벽을 타고 올라갔다. 라우렌이 눈을 돌리자 세르빈이 말했다.
“지워진 이름을 그대로 두는 일도 기록관리관의 의무입니다. 잘못 적힌 이름에는 잘못이라고 남겨야지요.”
고개를 돌린 도현의 눈앞에 어린 여자가 서 있었다. 소박한 주방복 차림의 메리안이었다. 화상 자국이 남은 손으로 작은 쪽지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살핀 뒤 속삭였다.
“어제 밤 일곱 번째 화덕을 닦으러 갔다가 병을 봤어요.”
“검은 병을요?”
“네. 이름 일곱 개가 적혀 있었는데, 잉크가 모두 똑같았어요.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병에도 새 글씨가 있었어요.”
도현은 쪽지를 펼쳤다. 메리안이 병 밑에서 베껴 온 글자였다.
[요리사마다 한 번씩만 선택 기회를 준다.]
[선택을 거절하면 같은 대상의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시험을 변경한다.]
미역국의 맛이 머릿속에서 스쳐 갔다. 그 향이 정말 어머니의 음식이었다면, 도현이 반드시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을 누군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혹시 그 병을 만졌습니까?”
메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닦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손대지 않았어요.”
“잘하셨습니다.”
도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잠깐 생각했다. 왕실 시종의 일자리를 보장할 권한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루카스가 대신 설명했다. 당사자가 동의하는 범위에서 익명으로 진술을 남기고, 보복이 발생하면 왕실 감사 절차에 신고할 수 있다고. 다만 그 절차에도 시간이 걸리고 모든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다고 했다.
메리안은 한참 듣더니 손등의 화상 자국을 매만졌다. “저는 큰일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릇을 닦았는데 없던 음식이 나왔다고 쓰이는 일이 싫어요.”
“그럼 그 사실부터 지키면 됩니다.” 도현이 답했다.
메리안은 아주 조금 웃었다. 식당 주방에서 그녀가 잠시 쉬는 동안 브론은 따뜻한 차를 놓아 주었다. 누군가 자기 말을 이용해 새로운 영웅담을 만들지 않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편안한 모양이었다.
메리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그 일로 주방에서 쫓겨날지도 몰라요.”
“어떻게 할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다만 오늘은 본인 이름을 어디에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날 밤 도현은 오래된 메모를 읽다가 자기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식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궁문 옆 작은 급식소를 지나쳤다. 급식소에는 하루 일을 마친 청소부와 마차 기사가 줄을 서 있었다. 누구는 양배추가 더 많은 그릇을 골랐고 누구는 기름진 국물을 피했다. 맨 끝에 선 남자는 조용히 그릇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오늘 속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급식 담당자는 그에게 억지로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곁에 있던 왕궁 서기가 수령 명부에 표시를 하려 하자 남자가 다급히 말했다.
“저는 안 먹었습니다.”
“배급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 수령한 것으로 처리해야 해요.”
“그럼 내가 안 먹은 그릇은 어디로 갑니까?”
서기는 답하지 못했다. 도현은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급식 담당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서기가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명부와 실제 남은 그릇 수가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도현은 수첩을 꺼내 오늘의 수량을 직접 셌다. 스물네 그릇을 끓였고 열아홉 사람이 받아 갔으며 다섯 그릇이 남아 있었다.
“그릇이 남았는데 기록에는 전부 나갔다고 적힙니까?”
서기가 불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정량 기준으로 처리하면 간단합니다.”
“간단한 쪽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는 빈 그릇 다섯 개를 세워 두었다. 그릇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는 마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현이 말없이 다섯 개를 가리키자 줄 끝의 남자가 굳게 다문 입술을 조금 풀었다. 누군가 자기가 먹지 않았다는 말을 비로소 있는 그대로 받아 준 것이다.
급식 담당자는 불편할지라도 실제 수령과 예정량을 따로 적겠다고 말했다. 도현은 그 약속이 내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배급표의 빈칸에 남았다.
브론이 밖으로 나오며 낮게 말했다. “주방장님, 이 나라 사람들은 다들 밥 먹은 걸 왜 그렇게 세고 있습니까?”
“밥을 안 먹은 사람도 먹었다고 적기 때문이죠.”
“저는 제가 먹은 건 하나도 빼먹지 않고 말할 자신 있습니다.”
“그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첫날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만 생각했다. 지금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 마음을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그 마음을 값으로 매겨 병에 담았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창밖의 왕궁 탑에 불이 하나씩 꺼졌다. 남아 있던 일곱 번째 불빛은 끝내 꺼지지 않았다.
그 불빛 아래에서 검은 병의 마개가 안쪽에서부터 조금씩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제8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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