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다섯 시의 왕궁 주방은 사람을 깨우는 방식이 거칠었다.
나무 도마 위에서 칼이 두드리는 소리, 커다란 화덕에 장작을 밀어 넣는 소리, 재를 털어 내는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새벽빛은 높은 창에만 머물렀고, 바닥에 놓인 구리 냄비는 아직 밤의 냉기를 품고 있었다. 백도현은 다른 요리사들보다 먼저 도착했지만 주방장 베네딕트가 이미 한참 전부터 당근을 다듬고 있었다.
“왕국을 구하겠다면서 늦잠은 안 자나 보군.”
“오늘은 아침 장사를 해야죠. 왕국 구하는 건 영업시간 뒤에 하겠습니다.”
베네딕트가 코웃음을 쳤다. “왕궁 주방의 하인이 그렇게 말하면 잘릴 걸세.”
도현은 그가 내민 칼을 받았다. 칼날에 이가 하나 빠져 있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새것을 달라고 했겠지만, 도마의 방향을 바꿔 쓰면 큰 문제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칼이 아니라 재료와 먹을 사람이었다.
“원재료를 저희가 준비한다는 조건이 인정됐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정식으로 구입한 보리와 양파, 감자, 가벼운 산미가 나는 사과를 쓰려고요. 백성들 집에서도 만들 수 있는 요리를 내고 싶습니다.”
“궁정 요리 대회에 사과와 보리죽을 내놓겠다고?”
“보기에는 소박해도 따뜻한 음식입니다.”
베네딕트는 도현의 손목을 봤다. 석화 저주가 남긴 회색 자국은 손가락 사이까지 얇게 퍼져 있었다. 도현이 칼을 쥐는 힘을 조절하며 엄지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네 몸 상태부터 확인했나?”
“오늘은 움직입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썰기는 힘들 수 있어요.”
“그럼 나눠서 하게.”
베네딕트는 칼을 돌려 자기 도마를 두드렸다. 오래된 주방장은 더 이상 도현에게 혼자 무리하라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 쓰러진 요리사들의 뒷모습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양파를 다듬는 사이 브론이 뒤뜰에 커다란 짐수레를 세웠다. 수레에는 보리 한 포대, 말린 버섯, 감자 자루와 얇은 소금 주머니가 실려 있었다. 매번 물건마다 판매자의 이름과 가격이 적힌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세 장부입니다!” 브론이 뿌듯하게 외쳤다.
“재료는 네 가지인데 장부가 왜 세 개죠?”
“시장 장부, 저희 식당 장부,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먹을 간식 장부요.”
“세 번째는 무엇을 샀는데요?”
“치즈요.”
도현이 이마를 짚었다. “영수증을 꼭 따로 보관하세요.”
“걱정 마십시오. 치즈를 먹기 전에는 언제나 장부를 씁니다.”
에스텔은 수레 가장 아래에 놓인 가죽 자루를 확인했다. 감자 옆에 아주 작은 검은 점들이 붙어 있었다. 손으로 문지르자 점들은 모래처럼 떨어지지 않고 손바닥 위에서 가늘게 움직였다.
“이거 검은 시럽의 찌꺼기야.”
도현은 수레 주인을 불러 세웠다. 포대는 분명 서쪽 농가에서 직접 들어온 것이었고, 판매자도 값을 받았다. 중간 창고를 거쳤다는 사실 외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에스텔은 검은 점이 붙은 포대를 따로 옮기자고 했다.
“원인은 아직 몰라. 오염된 재료를 검증에 쓰면 안 돼.”
도현은 새 포대를 사기로 했다. 비용이 두 번 드는 일이었지만, 누군가의 몸을 빌려 실험하는 것보다 나았다. 시장으로 돌아가는 브론에게 그는 장부에 이 사실을 남기라고 부탁했다.
새 포대가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쯤 걸렸다. 도현은 그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왕궁 주방의 기본 식재료 목록을 베꼈다. 어떤 곡물이 어느 계절에 들어오는지, 누구의 농장에서 나는지, 입고 담당자가 누구인지 기록했다. 베네딕트는 그의 수첩을 보다가 낡은 서랍에서 장부 한 권을 꺼냈다. 지난 십이 년 동안 왕궁에 공급된 보리의 목록이었다.
“원래는 서류를 너무 싫어해서 견딜 수가 없었네. 칼과 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베네딕트가 말했다.
“지금은 어떠십니까?”
“주방에서 누가 사라졌는지 기억하려면 이런 게 필요하더군.”
그는 굵은 손가락으로 한 항목을 가리켰다. 어느 해에는 보리 포대가 백 자루 들어왔다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 배급표에는 백이십 자루를 사용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반대로 다른 해에는 들여온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왕실의 큰 만찬이 열렸다고 기록돼 있었다.
“이런 걸 보셨으면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베네딕트의 칼끝이 도마에 멈췄다. “처음에는 계산을 잘못한 줄 알았네. 두 번째에는 말을 꺼냈지. 그러자 내가 서명하지 않은 납품 확인서가 나타났어. 그 뒤로는 누구도 나를 믿지 않았지.”
그는 말끝을 흐렸다. 주방의 다른 조리사들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채소를 썰고 있었지만, 도현은 그 조용한 소리 아래 오래된 두려움이 숨어 있음을 느꼈다.
“오늘 기록은 같이 남기죠.” 도현이 말했다.
“내 말을 믿겠다는 건가?”
“아뇨. 말씀하신 장부를 실제 입고 수량과 비교하겠다는 겁니다.”
베네딕트는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웃었다. “자넨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도 참 이상하군.”
“주방장이 근거 없이 위로만 하다가 손님에게 상한 음식을 내면 안 되니까요.”
두 사람은 서랍을 잠갔다. 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오래 묻어 둔 장부가 처음으로 자기 자리 밖에 나갈 준비를 하는 듯했다.
“실패한 구매도 지우지 마세요. 나중에 필요할 수 있으니까.”
“제가 실패한 간식 구매도요?”
“그건 반성문에 남기시고요.”
오전 중반, 라우렌의 서기관 둘이 주방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검은 칠을 한 나무상자 하나를 들어 보였다.
“검증에 앞서 참가자용 식재료를 점검해야 합니다.”
“저희는 자체 조달을 신청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 검증용으로 지급되는 표준 재료를 한 번 열람해야 합니다.”
도현은 손을 씻고 상자 뚜껑에 붙은 문구를 읽었다. ‘열람 및 수령 확인.’ 두 단어가 한 줄에 이어져 있었다. 그는 서명하지 않았다.
“열람이 수령을 뜻하는 건 아니겠죠?”
서기관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은 글씨를 가리켰다. “상자를 열면 확인이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럼 상자를 열지 않겠습니다.”
“규정 위반입니다.”
“물건을 받기 전에 규정을 확인하는 게 왜 위반입니까?”
에스텔은 문턱에 서서 그들의 발치에 생긴 검은 실을 보았다. 검은 실은 상자가 열릴 장소를 미리 재고 있었다. 그녀는 가벼운 불꽃을 피워 실의 그림자를 벽에 비췄다. 벽에는 열람 확인이라는 글자보다 훨씬 긴 문장이 나타났다.
[재료 수령자는 최초 제공 책임의 미정산분을 승계한다.]
도현이 웃음을 지었다. “열람도 비싸군요.”
서기관들은 상자를 내리지 못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세르빈이 나타났다. 그는 증인으로 동행한 루카스를 가리켰다.
“제4항에 따라 열람 거부 이유를 기록하겠습니다. 이 상자는 중립 보관소로 옮겨 봉인을 확인하도록 하죠.”
“왕실 물품인데 마음대로 가져가셔도 됩니까?” 한 서기관이 물었다.
“원재료 제공자가 확인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지급할 수 없습니다. 그걸 증명하러 왔습니다.”
세르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가 지닌 도장에서는 이전과 다른 단호함이 느껴졌다.
상자가 물러간 뒤 도현은 수레로 돌아왔다. 보리 포대의 봉인이 잘려 있었다. 누구의 발자국도 선명하지 않았지만 새벽에 온 감자 자루 가운데 하나가 없어졌다. 자루를 놓았던 바닥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물은 끈적했고 소금기보다 달큰한 냄새가 강했다.
브론이 코를 가까이 대자 귀를 세웠다.
“시럽 냄새입니다. 그런데… 이건 음식 냄새가 아니에요.”
“어떤 냄새입니까?”
“누군가 한참 울다가 손을 씻었을 때 나는 냄새요.”
에스텔은 물웅덩이에 손끝을 댈 듯 말 듯 멈췄다. “감정이 아니라 기억을 담는 데 쓴 시럽일 가능성이 있어.”
도현은 주머니에서 작은 접시를 꺼내 물 한 방울만 받았다. 그 위에 은수저를 가까이 가져갔지만 접촉시키지는 않았다. 물방울은 금방 식어 얼음처럼 굳더니 가느다란 글자를 만들었다.
[비교군 조리사: 백도현.]
[불출 재료: 회수된 기억 한 끼분.]
도현의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자기 기억을 음식의 재료로 계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몇 년 전에 잃어버린 미역국의 맛이 문득 떠오를 듯하다가 사라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것이 진짜 기억이라면 왜 지금 여기서 나타나려 하는지 먼저 따져야 했다.
“이건 버리는 게 좋을까요?” 브론이 물었다.
“증거로 남겨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맛보지 말아요.”
그는 접시 가장자리를 밀봉했다. 은수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현이 주걱으로 그 위를 가리자 문장 하나가 더 나타났다.
[비교군의 첫 반응: 잃어버린 맛을 회복하고 싶어 함.]
에스텔의 얼굴이 굳었다. “도현, 누가 널 시험하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엔 네 마음이 먼저 움직일 거야.”
도현은 자기 앞치마의 끈을 단단히 묶었다.
“그럼 마음이 움직였다는 사실도 적어 두겠습니다. 원하는 것과 받기로 한 것은 다르니까요.”
그날 저녁, 왕궁 창고의 깊은 벽에서는 아침에 없어진 자루 하나가 발견되었다. 감자 대신 검은 병이 들어 있었다. 병 아래에는 이름이 적힌 종잇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후보 1: 백도현.]
[검증 첫 단계: 그리운 맛을 거절할 수 있는가.]
창고를 지키던 서기관이 병 속에서 솟는 미약한 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요리사가 거절하면, 다음에는 무엇으로 부르지?”
검은 액체의 표면에서 작은 손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천천히 다른 병을 가리켰다. 두 번째 병에도 이름이 쓰여 있었다.
[레온.]
제8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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