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빈이 검은 솥의 뚜껑을 닫자 보관소의 식탁들이 동시에 삐걱거렸다.
다리를 끌며 한 발씩 다가오는 소리는 마치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 같았다. 브론은 귀를 세우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루카스는 아일린을 위해 출구까지의 길을 먼저 살폈다. 그러나 세르빈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식탁 사이에 놓여 있던 검은 촛대 하나를 옆으로 밀어 통로를 비웠다.
“오늘은 더 이상 안쪽에 계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궁금해지네요.” 도현이 말했다. “방금 전까지 원본을 보존해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맞습니다. 원본을 보존해야지, 지금 새로 적히는 명령까지 원본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요.”
세르빈은 보관소의 문 옆에서 잠깐 멈춰 섰다. 천장에는 오래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기록관리관은 식탁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손님의 이야기를 훼손 없이 지키는 자라는 문장. 그가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읽었던 말이었다.
“제가 이곳에 처음 온 것은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세르빈이 말했다. “아버지는 작은 인쇄소를 하셨지요. 굶주린 사람들의 배급표를 찍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인쇄소에 같은 이름이 쓰인 두 장의 식권이 들어왔고, 아버지가 왜 두 장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을 멈췄다. 붉은 불빛이 안경에 비쳤다.
“그 뒤로 아버지의 이름이 장부에서 지워졌습니다. 살아 있는데도 아무도 그분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보관소에 들어왔습니다. 지워지는 이름을 지키고 싶었거든요.”
도현은 질문을 참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의 규칙을 지키고 계셨군요.”
“네. 처음엔 규칙을 알면 누구도 이름을 함부로 지우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규칙을 이해하고 보니, 제가 지켜야 할 기록과 제가 지키게 된 명령이 뒤엉켜 있더군요.”
브론이 머리를 갸웃했다. “그럼 왜 그동안 그냥 두셨습니까?”
세르빈은 차가운 손잡이를 잡았다. “이곳을 한꺼번에 부수면 장부 속의 증언까지 사라질 수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저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지금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부수지 않고 열어 보죠.” 도현이 말했다. “그게 저희가 요리를 할 때도 하는 일입니다. 재료가 상했다고 솥부터 깨지는 않잖아요.”
“상한 것을 손님에게 내놓지는 않겠지요.”
“그건 당연합니다.”
둘은 잠시 마주 봤다. 세르빈의 얼굴에 피로가 드러났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 행동하지 않았다. 자신이 막았던 기록 열람과 그 과정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권리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보관소를 지켜 온 세르빈의 이야기를 듣자 루카스는 창가의 작은 식탁 하나로 갔다. 거기에 보관된 증언에는 날짜가 없었지만 구겨진 빵 포장지가 함께 붙어 있었다. 그는 포장지에 찍힌 제분소 마크를 살펴봤다. 비슷한 문양을 북부 루덴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형태가 오래되고 달라서 같은 곳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세르빈 씨. 이런 포장지도 원본입니까?”
“기록 속 물건이 무엇이든 그날의 사람에게 의미가 있었다면 보관합니다. 그저 장부 숫자를 확인하는 자료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름을 일부는 지웠습니까?”
“지우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곳에 왔을 때 이미 지워져 있었어요.”
도현은 세르빈을 바라봤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판단할 방법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자기 아버지가 지워졌다는 말을 할 때의 표정과 이 빈 포장지를 보는 표정은 조금 달랐다. 전자는 오래된 상처였고 후자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 같았다.
“아버지 이름을 되찾으셨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세르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어느 장부에서 지워졌는지만 알아냈습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여전히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인쇄소에서 만든 식권에는 그분이 일한 흔적이 사라졌지요. 제가 무엇을 기억하느냐보다 다른 사람들이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걸 찾으려고 이 일을 시작하셨군요.”
“처음에는요. 나중에는 아무 이름이나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원본을 묻는 사람에게 ‘규정상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게 됐지요.”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흰 장갑에는 검은 얼룩이 한 점 찍혀 있었다. 일부러 닦지 않고 남겨 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기록을 열게 되면 아버지의 이름도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도현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지우도록 만든 방법은 찾아볼 수 있겠죠. 그리고 그때까지 당신이 직접 본 일만은 지워지지 않도록 같이 기록할 수 있습니다.”
세르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자신을 돕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늘 무언가를 먼저 요구했다. 누군가는 원본 열쇠를, 누군가는 열람 권한을, 누군가는 자기 가족의 기록을 대가로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요리사는 아직 어떤 대가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군요.” 세르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보관소에 온 사람이 문서를 덜 보고 돌아가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보관할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다시 와야죠.” 도현이 말했다. “그날도 당신이 이 자리에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르빈은 대답 대신 낡은 포장지를 두 번 접었다 펴고 원래 자리에 놓았다. 포장지에서 밀가루가 아주 조금 떨어졌다. 그는 그 가루를 닦지 않았다. 오랜만에 실제 음식의 흔적이 보관소에 남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일린이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장부를 고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까?”
“검은 솥의 불길을 거꾸로 추적하면 어느 문서에서 명령이 오는지는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누가 실제로 명령을 보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위험은요?”
“기록을 추적하는 동안 누군가의 기억이 임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기억이 본인 의사인지도 알 수 없고요. 가까이 있는 사람의 기억 저주가 반응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도현은 자기 손목을 바라봤다. 그가 가진 기억 저주가 이미 여러 차례 타인의 과거와 섞이려 했다. 덜컥 조사하겠다고 나섰다간 손님을 위해 쓰려던 기억까지 잃을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추적 장치에 손대지 않겠습니다. 오늘 확인한 명령의 시각과 내용만 기록하죠. 위험한 실험보다 지금 확보한 증거를 밖으로 옮기는 일이 먼저입니다.”
세르빈이 놀랐다. “당장 답을 보려 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답은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먼저 쓰는 대가라면 지금은 그만둘 수 있어요.”
아일린은 세르빈에게 왕실의 별도 봉인서를 건넸다. 원본은 보관소에 두되 새 문구가 추가되면 그 시각과 작성 경로를 표시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녀가 봉인서를 꺼내는 순간 문양이 팔꿈치까지 욱신거렸다. 공주는 짧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말했다.
“기록의 진위를 다투는 사람이 기록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세르빈 씨, 이 조치에 참여하겠습니까?”
“참여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과거에 내린 조치도 함께 조사받겠습니다.”
루카스는 그 문장을 정확히 적었다. 브론은 조심스럽게 세르빈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저도 당신을 지켜볼 겁니다. 이상한 냄새가 나면 바로 말할 거예요.”
“그러십시오.” 세르빈은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제 냄새가 어떤지 모르니까요.”
그들이 문을 나서려 할 때 보관소 구석의 식탁 하나가 스스로 돌아섰다. 그곳에는 오래된 배급표와 작은 나무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도현은 그 숟가락을 만지지 않고 식탁의 표면만 살폈다. 앞서 수프를 먹었던 하인이나 시종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원제공자 미확인]이라는 글자가 계속 반복되어 있었다.
세르빈이 그 글자를 지켜봤다. “왜 하필 원제공자가 비어 있을까요?”
“처음부터 안 적혔을 수도 있고, 적힌 뒤에 지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루카스가 답했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브론이 물었다.
“누가 제일 먼저 계산할 책임이 있는지 정하지 못하면, 항상 손쉬운 사람에게 넘기게 되니까요.” 도현이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식탁 끝의 작은 나무 숟가락이 조용히 굴렀다. 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숟가락 끝에서 물방울 같은 글자가 돋아났다.
[원제공자 대신 정산할 자를 선정하라.]
[공개 조리 검증 후보: 일곱 명.]
[첫 번째 후보 등록 완료: 백도현.]
도현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또 묻지도 않고 등록했군요.”
세르빈이 표정 없이 문장을 읽었다. “이번엔 대리 징수가 아니라 조리 검증입니다. 그러나 신청한 적 없다는 점은 같습니다.”
아일린이 곧바로 말했다. “왕실은 그런 후보 등록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원본 보관소 가장 안쪽에서 붉은 불빛이 솟았다. 빈 의자 일곱 개가 긴 식탁 주위로 차례로 나타났다. 처음으로 누가 그 자리에 앉는지보다, 누가 불을 켜는지가 문제 되는 밤이었다.
도현은 밖으로 나와 왕궁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에게는 아직 저주 두 개가 있었고, 열여섯 사람의 행방도, 왕국의 청구를 만든 사람의 정체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기록을 지키던 사람이 기록을 바꾸려는 힘과 맞서려 한다는 사실은 알게 됐다. 누구보다 늦게 도착한 동료였지만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믿을 이유가 있었다.
“세르빈 씨.” 도현이 돌아봤다. “공개 검증을 준비한다면 조건은 저희가 제시할 겁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요리사가 누구를 먹일지는 본인과 손님이 결정합니다. 사람을 식재료나 대금처럼 올리지 않아요.”
세르빈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의 손에서 처음으로 흰 장갑 한 짝이 벗겨졌다.
제7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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