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안은 자기 이름이 나타났던 접시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백도현은 그 말을 듣고 접시를 천으로 덮었다. 식당에서 누군가 음식 냄새가 싫다고 말하면 다른 메뉴를 내듯, 두려운 증거 앞에 사람을 억지로 세울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물컵을 천천히 돌렸다. 손등의 화상 자국이 컵 가장자리에 닿을 때마다 아주 조금씩 움찔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건 언제 보셨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어제 밤입니다. 창고에서 접시를 씻는데 바닥에 글자가 나타났어요.”
“혼자 계셨습니까?”
“다른 시종도 있었지만 그 사람도 봤는지는 몰라요. 내가 크게 놀라는 걸 보고 도와주러 왔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따로 물을 수 있겠네요.”
메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제 이름을 대신 말해 주지는 마세요.”
도현이 먼저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접시를 다뤘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만 기록하죠. 이름은 당사자 허락을 받고요.”
베네딕트가 주방 문을 닫아 주었다. 기록을 보존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왕궁에서 실제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권력자의 싸움을 모두 알아야 할 의무도, 그 싸움에서 희생양이 될 이유도 없었다.
점심이 지나자 주방 뒷문에 낡은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는 밀가루 세 자루와 작은 나무 상자를 내렸다. 상자는 북부 루덴에서 온 것이었다. 겉에는 노라의 글씨로 ‘돌려드릴 수 있는 증거만 보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도현은 손을 씻고 봉인을 확인했다. 상자를 열자 작은 빵틀과 마르타가 새긴 나무 이름표가 들어 있었다.
동봉된 편지에는 마르타가 첫 가게를 다시 열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루덴의 아이들이 아침부터 빵 냄새를 맡고 일어나며, 오래된 제분소 대신 공동 화덕을 번갈아 사용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편지에는 다른 이름도 있었다. 실종 요리사 중 한 사람의 형제가 여전히 형의 행방을 묻고 있었다. 그는 자기 형이 살아 있다는 희망에 기대어 이미 여러 번 헛된 값을 치렀다고 했다.
도현은 그 문장에 오래 시선을 두었다. 북부를 떠날 때 이미 모두를 구할 수 없는 자신이 미안했다. 그렇지만 생존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살아 있다고 선언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마르타 씨의 귀환과 가게 개업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나머지 열여섯 분에 대해서는 아직 생사나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항구에서 운송된 열여섯 자루가 증언 기록과 이어진다는 정황은 있지만 사람들의 이동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자료가 확인되면 허락받은 내용부터 전달하겠습니다.]
브론이 옆에서 편지를 읽었다. “조금 차갑게 들리지 않습니까? 기다리는 가족은 희망적인 말을 듣고 싶을 텐데요.”
“그럴 겁니다. 저도 희망적인 말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희망을 값으로 팔기 시작하면 저쪽 장부와 다를 게 없어지잖아요.”
브론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중에 가족을 만날 때는 그냥 빵을 들고 가죠. 그때 먹고 싶은지 먼저 물어보는 걸로요.”
“좋습니다.” 도현이 웃었다.
빵틀의 뒷면에는 북부에서 만들던 오래된 표식 하나가 남아 있었다. 도현은 그것을 만지지 않고 종이에 따라 그렸다. 표식의 획수는 열여섯 개였지만 그 아래에는 작은 점 셋이 찍혀 있었다. 그 점들은 벨로스의 보존물 일부에서 확인한 것과 유사했다. 동일한 근원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도시의 작은 주방들이 서로 이어져 있었음을 암시했다.
도현은 편지와 표식 사본을 나란히 놓았다. 서로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장부 한 장보다 오래 버틸지도 몰랐다. 마르타에게는 열여섯 명의 이야기를 대신 확정하지 말고 본인이 실제 본 일만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자신이 오늘 본 그릇의 상태를 적는 것처럼, 각자가 자기 기억의 범위를 지키는 방식이 이 싸움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루카스는 북부에서 받은 탁본과 벨로스의 증언 목록을 가져왔다. 북부 루덴의 마르타는 압류가 멈춘 뒤 자기 이름으로 다시 빵을 만들고 있었지만 다른 16명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벨로스에서 찾아낸 열여섯 자루가 증언 운송 기록과 이어진다는 단서는 있었으나, 사람들을 실제 운반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도현은 그 차이를 계속 지키려 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이름들이 접시와 이어질까요?” 브론이 물었다.
루카스는 낡은 명단을 펼쳤다. “이름이 아니라 번호가 먼저 일치합니다. 북부 보관소의 열여섯 미귀환 표식, 하얀 식탁 창고의 열여섯 증언 운송 포대, 그리고 지금 왕궁의 일곱 접시 가운데 마지막 것에 나타난 수령 대기 번호. 이 가운데 중복되는 표식이 있습니다.”
“몇 개나?” 에스텔이 물었다.
“현재 확인 가능한 건 세 개뿐입니다. 나머지는 자료가 부족합니다.”
도현은 그 말을 적었다. [일치 세 건. 동일 인물인지 미확인.] 그는 괄호를 쳤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저 숫자를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들은 창고에서 허락받은 목판을 가져왔다. 목판의 뒷면에는 기름이 번져 있었다. 오래전 주방장이 조리대 위에 올려 두었던 흔적 같은 것이었다. 에스텔은 칼집의 방향을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온은 왼손잡이였어. 칼을 놓으면 늘 손잡이가 왼쪽을 향했지.”
“그것만으로 레온 물건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하지만 왜 여기에 레온의 문장이 나타났는지 확인할 실마리는 되겠지.”
그때 메리안이 가방 안을 뒤지더니 작은 실뭉치를 꺼냈다. 실은 붉은색과 푸른색이 번갈아 감겨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을 때마다 매듭을 하나씩 지으라고 하셨어요. 어제 접시를 본 뒤에도 하나 만들었어요.”
에스텔은 그 실을 보고 놀랐다. 흰 화덕섬에서 나리가 가르쳐 준 세 매듭의 방식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다만 색과 방향은 달랐다. 그녀는 메리안에게 누가 배웠는지 캐묻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 줘도 괜찮습니까?”
“아뇨.” 메리안이 즉시 답했다. “그냥 제가 기억하려고 만든 거예요.”
“알겠어요.” 에스텔은 손을 물렸다.
브론은 옆에서 종업원답게 빈 컵을 치우다가 멈췄다. “그런데 말입니다. 왕궁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 자기 이름이 접시에 적힌 걸 봤다고 말하는 사람이 메리안 씨만은 아닐 것 같아요.”
“그래서 찾아갈 겁니까?” 도현이 물었다.
“아뇨. 원한다면 말할 수 있는 곳을 만들면 어떨까요? 우리 식당에 방명록을 만들려다가 결국 못 만들었잖아요. 그때처럼요.”
도현은 브론을 바라봤다. 처음 식당에 온 날, 그가 손님들이 감사 인사를 남길 수 있는 방명록을 만들자고 제안했었다. 이제는 감사 대신 위험한 일을 기록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름을 적어 두는 방식은 조심해야 합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그 기록이 다시 압류 목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은 한참 의논했다. 결국 왕궁 식당 뒷문에 봉인함을 하나 두기로 했다. 누구나 접시나 식사에 대한 경험을 글로 적어 넣을 수 있지만 이름을 적을지는 본인이 선택했다. 봉인함을 열 때에는 루카스와 베네딕트가 함께 참석하고, 내용은 당사자 동의 없이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
첫날에는 아무도 종이를 넣지 않았다. 둘째 날 아침, 베네딕트가 주방 불을 켜러 왔을 때 봉인함에 종이 네 장이 들어 있었다. 한 장에는 그릇이 저절로 비었다는 이야기가, 다른 장에는 이미 먹은 사람에게 다시 배급표가 발급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 번째는 빈 종이였다. 네 번째 종이에는 단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우리는 열여섯이 아닙니다. 열여섯 개의 상자를 지키는 사람이 열여섯 명입니다.]
도현은 그 문장을 읽고 오래 침묵했다.
“그렇다면 누가 상자를 지킵니까?” 브론이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그럼 실종 요리사들과는 상관없는 겁니까?”
“상관없다고 할 수도 없어요.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로 묶던 숫자를 다시 풀어 봐야 합니다.”
종이 끝에는 물방울 자국이 있었다. 물기가 이미 말라 있어 소금인지 눈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도현은 유리병에 종이를 넣고 봉인했다. 종이에는 이름도 날짜도 없었다. 익명의 증언을 이유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를 무시해서도 안 됐다.
메리안이 뒤늦게 식당으로 찾아왔을 때 도현은 봉인함 이야기를 알려 주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어깨를 조금 폈다.
“그럼 제가 언젠가 말할 준비가 됐을 때 제 이야기를 남길 수 있겠네요.”
“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메리안은 문밖에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이상하네요. 여태 사람들은 저한테 무엇을 말하라고만 했어요.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이 끝났으면 쉬어도 되죠.”
브론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맞아요! 저도 오늘 저녁엔 쉬고 싶습니다!”
도현이 그를 돌아봤다. “브론 씨는 아직 설거지가 남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 왜 저한테만 적용되지 않죠?”
사람들이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루카스가 외투를 입으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원본 보관소에서 가장 오래된 영수증을 열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조건이 붙었습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봉인함에 들어온 익명 증언 중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도현은 웃음을 거뒀다. 누군가 익명으로 남긴 이야기를 원본 보관소가 벌써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조건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주방 밖에서 아주 멀리, 접시를 포개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의 증언을 열쇠로 쓰려는 규칙이 또 하나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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