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보관소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식탁마다 깔린 흰 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일린의 손목에서 뻗어 나온 검은 문양은 구불구불한 나무뿌리처럼 굳어 있었다. 세르빈은 장부를 펼친 채 일행을 지켜봤다. 그가 마지막으로 종을 울린 뒤 문 밖에서는 어떤 발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신들이 중단한 것은 고작 한 번의 청구입니다.” 세르빈이 말했다.
“고작 한 번이라도, 부당하다면 중단할 이유가 있습니다.” 도현이 답했다.
“제공되지 않은 음식의 값을 없애면 누군가의 내일이 부족해질 겁니다.”
도현은 다시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누가 부족해지는지 확인해 봅시다.”
그는 식탁의 그림자에 손을 넣지 않았다. 손끝을 넣는 것만으로도 석화가 번질 수 있었다. 대신 브론에게 냄새를 구분해 달라고 부탁했고, 베네딕트가 적어 준 조리법과 대조했다. 이 보관소가 실제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는 가정이 맞다면, 장부에 기록된 가짜 제공량에는 공통된 흔적이 있을 터였다.
“거짓 기록에서도 냄새가 납니까?” 브론이 물었다.
“이 보관소가 냄새를 보존한다면요.”
“좋습니다. 저는 거짓말하는 수프와 싸우겠습니다.”
브론은 숟가락을 든 채 식탁 사이를 돌아다녔다. 어떤 곳에서는 소금을 지나치게 쏟은 냄새가 났고, 어떤 곳에서는 오래전에 타 버린 버터 냄새가 맴돌았다. 실제 조리를 한 흔적과 계산서가 만든 향기는 미묘하게 달랐다. 브론의 코는 그 차이를 도현보다 정확하게 구별했다.
“여기요. 빵 냄새는 있는데 화덕 냄새는 없어요.”
루카스가 바로 적었다. “제공 표시 열세 건, 조리 흔적 없음.”
“이쪽은 식초만 있고 고기 냄새가 없습니다.”
“제공 표시 다섯 건, 재료 불명.”
“그건 제가 본 게 아니라 맡은 겁니다. 그 정도까지 적어 주세요.”
브론의 말에 도현이 웃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 이 늑대인간은 그릇을 깨뜨리지 않는 방법도 잘 몰랐다. 이제 그는 자기 능력이 무엇을 증명할 수 있고 무엇은 증명하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다.
공주는 긴 의자에 잠깐 앉았다. 저주가 당장 목숨을 빼앗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손가락 끝의 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현은 그녀에게 물을 권했다. 공주는 물잔을 받았다가 자신의 오른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왼손으로 옮겼다.
“저는 왕국의 모든 식사를 책임질 수 있다고 배웠어요.”
“아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왕실이라면 해야 한다고들 했지요.”
“책임을 지는 것과 모두의 몫을 혼자 삼키는 것은 다릅니다.”
에스텔은 그 말을 듣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오래전에 놓쳤던 구별이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굶지 않기를 바라며 낯선 조리법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그 선택이 누군가의 미래를 빼앗는 데 이용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에스텔은 식탁들 사이에 놓인 작은 검은 솥을 발견했다. 그 솥은 불이 없는 곳에 있었는데도 뚜껑 아래서 물방울이 맺혔다. 그녀가 솥의 문양을 살펴보려 하자 세르빈이 먼저 길을 막았다.
“그 물건은 보관소의 시설입니다. 열람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시설이라기보다 주방 도구처럼 보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이곳에서 장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지요.”
도현은 그 안에서 무엇이 끓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뚜껑을 열지 않았다. 검은 솥에서 나는 냄새는 쌀이나 고기와 달랐다. 흡사 오래전에 꺼뜨린 성냥을 다시 켰을 때와 비슷한 냄새였다. 에스텔은 그것이 기억을 태울 때 나는 향이라고 말했다. 다만 예전에 한 번 맡았던 느낌일 뿐, 지금 솥 안에 정말 기억이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여기도 누군가의 내일을 끓이고 있는 건가요?” 브론이 물었다.
세르빈이 차갑게 답했다. “검증하지 않은 추측을 말하지 마십시오.”
“좋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그럼 솥의 관리 기록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는 수첩에 요청 시각을 적었다. 세르빈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상대가 자신을 고발하기보다 확인할 문서를 늘려 가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그때 공주의 검은 왕관 문양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아일린은 숨을 들이켜 식탁 끝을 붙들었다. 문양은 손등을 따라 새로 자라지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에 작은 점들이 나타났다. 도현이 도움을 청하자 루카스가 곧장 공주의 의자를 가져왔다. 에스텔은 짧은 진정 주문을 시전했다. 피부의 통증은 조금 가라앉았으나 저주는 그대로 남았다.
“여기서 계속 계셔도 괜찮겠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듣고 싶어요. 하지만 더 아파지면 나가겠습니다.” 아일린이 대답했다.
“그 결정은 전하가 하실 일입니다.”
세르빈은 그 대화를 듣고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왕국을 대표하는 분이 어쩌다 이런 요리사에게 결정을 물으시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묻는 건 주방장의 허락이 아닙니다.” 아일린이 말했다. “이곳을 조사할 권리와 제 몸을 지킬 권리를 함께 행사하는 겁니다.”
도현은 그녀의 말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모든 말이 증거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기 권리를 선언하는 순간에는 그저 옆에 서 있는 편이 나을 때도 있었다.
세르빈은 그들의 대화를 듣더니 다른 장부를 꺼냈다. 표지에는 붉은 인장으로 '레온'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전임 요리사의 기록을 찾는다고 했지요. 원하는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장면이 나타나기 전에 장부의 페이지마다 다른 온기가 번졌다. 차가운 종이 사이에서 오래된 주방의 열기가 올라왔다. 도현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자신이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 식당 화덕에서 느꼈던 불의 온도와 비슷했다.
브론은 장부 곁에 코를 가까이 대었다. “밀가루 냄새는 진짜입니다. 오래됐지만요.”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순 없습니다.” 루카스가 주의를 줬다.
“물론이죠.” 브론이 대답했다. “지금 제가 맡는 냄새가 진짜라는 뜻이지, 거기 있는 사람이 한 말을 전부 믿는다는 건 아닙니다.”
도현은 브론의 등에 손을 얹었다. 처음에는 툭하면 그릇을 깨던 늑대인간이었다. 언제 이렇게 믿음직한 조사 동료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에스텔이 책을 가리켰다. “저 장부는 레온의 필체를 흉내 내기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레온은 어떤 날은 손가락을 다쳐 글씨가 기울어졌거든. 모르는 사람은 항상 같은 글씨를 쓰는 줄 알아.”
“그럼 오늘 보이는 글씨를 어떻게 검증할까요?”
“기록된 장면과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기록을 비교해야겠지. 내가 직접 봤던 장면도 따로 말할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오래전 자신이 레온과 주방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고통스럽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결국 세르빈의 장부만 남을 것이다.
“나는 그날 레온에게 사람들이 구호빵을 먹고도 굶는다고 말했어. 레온은 빵이 부족하면 더 구워야 한다고 했지. 부족한 미래를 대신 빌려 쓰는 방법은 끝까지 반대했어.”
“그 기억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항상. 하지만 그 뒤에 누가 들어왔는지는 아직도 흐릿해. 내가 직접 문을 열어 준 것 같기도 하고, 레온이 누군가를 기다린 것 같기도 해.”
도현은 그녀의 증언을 적고 그 옆에 [기억 불완전]이라고 표시했다. 에스텔은 한숨을 쉬었지만 항의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네가 내 말을 전부 믿지 않는데도 덜 외로워.”
“확인할 수 있는 건 같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에스텔은 웃었다. 그리고 레온의 장부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오래된 화덕의 불꽃이 페이지 끝을 붉게 물들였다.
장부가 펼쳐지자 제7조리실의 풍경이 나타났다. 검은 돌솥이 끓고, 젊은 레온이 밀가루 묻은 손으로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옆에는 에스텔과 닮은 은발의 마녀가 서 있었다. 에스텔은 그 모습을 보자 흠칫했다.
“그날이야.”
레온의 모습은 살아 있는 환영처럼 움직였다. 그는 처음부터 저주를 옮기는 요리를 만들지 않았다. 기록 속 레온은 식재료에 깃든 다른 사람의 몫을 따로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녀는 그에게 거절당한 식사의 값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었다. 레온은 반죽을 접으면서 대답했다.
'먹지 않은 사람이 값을 내선 안 돼. 음식을 만들지 못한 쪽에서 남은 것을 책임져야지.'
도현의 눈이 커졌다. 흰 화덕섬에서 발견한 금속판의 문구와 같았다. 그러나 장면의 다음 부분이 중요했다. 레온은 장부에 세 줄의 조리법을 적었다. 첫 번째는 제공하기 전의 확인, 두 번째는 먹을 사람의 선택, 세 번째는 먹고 남은 몫을 되돌려 놓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줄만 검은 얼룩으로 가려져 있었다.
“무엇을 지웠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세르빈이 눈썹을 올렸다. “오래된 기록은 훼손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그 줄입니까?”
“우연일 수도 있지요.”
도현은 말을 멈췄다. 세르빈의 대답이 거짓이라고 확정할 증거는 아직 없었다. 하지만 지워진 조리법 앞에서 레온이 왜 검은 돌솥에 갇혔는지는 조금 선명해졌다. 사람들의 저주를 요리사에게 모으지 않고 원래의 계약으로 돌려보내는 방법을 알아낸 사람이었을 수 있었다.
레온의 환영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치 기록 바깥의 도현을 직접 보는 듯했다.
'주방은 음식을 만들지만, 식탁은 책임을 나누는 곳이다.'
장면이 끝나자 종이가 반으로 접혔다. 레온의 쇠숟가락이 밝게 빛났다. 손잡이의 일곱 홈 가운데 네 번째에서 작은 금이 생겼다.
[제3 조리 원칙: 잔여분의 원위치.]
[세부 조리법: 열람 제한.]
그 문장을 확인한 순간 도현은 두려웠다. 원위치라는 말이 자칫 저주받았던 사람에게 저주를 되돌려 주라는 뜻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먼저 그 해석을 지웠다. 손님에게 다시 저주를 돌려주는 것은 해제가 아니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모릅니다.”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을 찾아가야 해. 그가 직접 설명할 수 있다면.”
“우선 이 기록을 지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일린이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왕실 인장을 장부 옆에 내려놓았다. 작은 금빛 빛줄기가 표지의 붉은 글씨를 둘러쌌다. 세르빈이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하시면 보관소가 반발할 겁니다.”
“기록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훼손 여부를 조사하겠다는 표시예요.”
공주는 레온의 이름을 다시 읽었다. “이 사람은 아직 왕실 기록에서 실종이 아니라 업무 중으로 남아 있습니다.”
도현은 어둠 속 식탁들을 바라봤다. 사람 하나가 수십 년 동안 업무 중으로 남을 수 있는 나라라니. 이곳의 제도가 얼마나 오래된 식사를 이어 가고 있는지 그제야 실감났다.
그때 붉은 표지 아래에서 다른 글씨가 나타났다.
[레온: 제7조리실 위치 확인.]
[접근 조건: 식사 종이 일곱 번 울리기 전.]
[남은 종소리: 두 번.]
브론이 귀를 세웠다. “우리 오던 길에서 몇 번 울었죠?”
도현은 손에 쥔 쇠숟가락을 내려다봤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 시작됐다. 하지만 서두르며 확인하지 않은 문을 열었다가 누군가를 또 대신 묶어 놓을 수는 없었다.
제6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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