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로 돌아오는 길은 기억보다 길었다.
벨로스에서 출발한 마차는 붉은 석산을 지나 북쪽 관문으로 향했다. 가을비가 내린 뒤라 길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남아 있었고, 수레바퀴는 돌에 부딪칠 때마다 요란하게 튀었다. 도현은 덮개 사이로 지나가는 마을을 보며 한국의 퇴근길을 떠올리려 했다. 버스 창문, 늦은 밤 식당의 불빛, 휴대전화에 남겨 둔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 얼굴은 기억났지만 그날 통화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에 손톱을 눌렀다. 기억 저주는 조용히 자라는 병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잃었는지 확인하는 순간에야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병이었다.
“또 그 기억입니까?” 에스텔이 물었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 맛이요. 기억하려고 할수록 더 멀어지네요.”
“네 손에 남은 저주를 내가 풀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랬으면 진작 풀어 주셨겠죠.”
에스텔은 웃지 않았다. 그녀가 숨겼던 일을 도현은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은 같은 가방을 들고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용서가 끝난 관계가 아니라, 책임을 피하지 않기로 한 관계였다.
저녁 무렵 일행은 오래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여관 주인은 귀한 왕실 문장을 본 뒤 방값을 두 배로 불렀다. 브론이 항의했다.
“왕실 호위와 함께 왔으면 오히려 할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왕실 사람이 밤에 찾아오는 여관은 다음 날 지붕 수리비가 든다네.” 주인이 말했다.
루카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도현이 방값을 지급하고 영수증을 챙기는 동안, 에스텔은 마당 끝에 있는 푸른 화덕을 보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왜요?”
“왕국 최초 구호 화덕과 같은 문양이야. 이 길을 따라 보급소가 여러 곳 있었거든.”
도현이 가까이 다가가자 화덕의 옆구리에 둥근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가운데가 비어 있는 손이었다. 그는 손을 대지 않았다. 모르는 마법 장치에 몸을 맡길 이유가 없었다.
여관 주인은 그 화덕을 오래전에 폐쇄했다고 말했다. 한때는 여기서 구호빵을 구웠지만, 어느 날부터 빵을 받아 간 사람들이 다음날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다. 주인은 그 소문을 믿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만 화덕의 불이 꺼졌는데도 따뜻한 냄새가 남아 있었던 것은 직접 경험했다고 했다.
“그 기록은 남아 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옛날 여관 장부에 있을지 모르지. 그래도 손댈 건가?”
“오늘은 아닙니다. 왕도에서 확인할 것이 있어요.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모든 흔적을 쫓으면 영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도현은 그 사실도 배워 가고 있었다.
여관을 떠난 뒤 마차는 산등성이를 따라 꼬박 반나절을 달렸다. 루카스는 길가의 옛 배급소 자리를 하나하나 짚어 설명했다. 어떤 곳은 포도밭으로 바뀌었고, 어떤 곳은 작은 예배당이 되었다. 그러나 돌문마다 빈 접시와 식탁 문양이 남아 있었다.
“이 길은 기근 이후 왕궁과 서쪽 항구를 잇는 주요 보급로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화덕들이 있던 거군요.”
“기근은 끝났어도 기록은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길에서 마주친 행상인은 특별한 빵을 판다고 소리쳤다. 빵 하나를 먹으면 다시 배고파지는 날이 하루 늦춰진다는 설명이었다. 브론은 당장 두 개를 사려고 했다. 도현이 살펴보니 마른 호밀빵 속에 짠 치즈와 구운 견과를 넣은 평범한 음식이었다.
“그런 효능이 있습니까?” 도현이 행상인에게 물었다.
“먹고 나면 오래 든든하지요.”
“그건 저도 만들 수 있습니다. 마법은 아니군요.”
“손님, 여기선 든든한 음식이 마법보다 귀해요.”
행상인은 시원하게 웃었다. 도현은 그 말에 빵을 두 개 샀다. 하나는 브론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여러 조각으로 나눴다. 이 세계의 음식이 모두 저주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늘도 농사를 짓고, 굽고, 팔고, 서로 나누며 살아갔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든든했다.
그들이 언덕을 내려갈 무렵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앞길에 낡은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 폭우에 다리 일부가 부서져 바퀴가 지나갈 수 없었다. 루카스는 우회로가 반나절 더 걸린다고 설명했다. 도현은 왕궁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일린을 떠올렸지만, 부서진 다리로 마차를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내가 다리를 얼릴 수 있어.” 에스텔이 말했다.
“얼리면 마차는 지나갈 수 있겠죠. 뒤에 오는 사람들은요?”
“기온이 낮아지면…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도현은 우회로를 택했다. 브론은 시간이 아깝다며 투덜댔지만, 얼마 뒤 다리 밑의 빠른 물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곳에는 조금 전 무너진 나무판들이 몰려 있었다. 얼음으로 덮인 다리가 순식간에 깨졌다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회로의 작은 마을에서 그들은 물 한 통을 구했다. 마을의 늙은 여자가 발목을 다친 손자를 위해 수프를 조금 달라고 했다. 도현은 쉬는 동안 가지고 있던 빵과 따뜻한 물로 묽은 죽을 만들었다. 특별한 마법은 없었다. 아이는 배를 채우고 잠들었다.
“이걸로 저주가 풀렸어요?” 브론이 묻자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주가 없어도 배가 고픈 아이는 있습니다. 우리도 그걸 잊지 맙시다.”
다음 날 해질 무렵 왕도의 성문이 보였다. 성벽 위 깃발은 비에 젖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대로변에는 황금빛 가을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지만, 시장의 곡물 가격표는 지난번보다 높아져 있었다.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동전 한 닢을 놓고 빵 조각을 나누었다.
“왕도가 더 가난해진 것 같아요.” 브론이 말했다.
“처음에는 못 봤던 걸 이제 보는 걸 수도 있죠.” 도현이 답했다.
'마지막 한 숟갈'의 간판은 그대로 있었다. 낡은 처마 끝에 매달린 작은 숟가락 조각이 바람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식당 안에서는 리아가 청소용 천을 흔들고 있었다. 리아는 도현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아저씨! 이제 저녁 장사해요?”
“오랜만인데 보고 싶었다는 말부터 해 주면 안 되겠니?”
“보고 싶었어요. 그다음은 저녁 장사해요?”
브론이 소리 내 웃었다. 도현은 앞치마를 걸었다. 천은 전에 쓰던 것보다 조금 뻣뻣해져 있었고 주머니 안에는 오래된 동전 하나가 남아 있었다.
리아는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새 소식이 있는지 물었다. 도현은 벨로스와 흰 화덕섬에서 확인한 내용을 말해 주었다. 제7조리실과 연결되는 기록이 있었지만, 마리아의 현재 행방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아이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말없이 감자를 씻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동안 저도 요리를 배울래요.”
“좋아. 다만 뜨거운 냄비는 어른이 다루고,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해.”
오랜만에 켠 식당 화덕은 예전처럼 금방 달아오르지 않았다. 도현이 그을음을 닦는 동안 리아는 밀가루 주머니를 들고 식탁 사이를 오갔다. 빈자리였던 의자 두 개에는 새 손님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우체국에서 일하는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손목에 붕대를 감은 제빵사였다.
“그동안 영업을 안 해서 망한 줄 알았어요.” 노인이 말했다.
“그랬으면 간판부터 떼었겠죠.” 도현이 대답했다.
제빵사는 조용히 웃었다. “망한 가게도 간판은 남아 있더군요. 잊히는 게 싫어서.”
도현은 그 말을 장난으로 받으려다가 멈췄다. 자기 식당의 전임 요리사들 이름이 지워진 장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대신 따뜻한 수프를 내려놓으며 손님들이 얼마나 먹고 싶은지 물었다. 노인은 큰 그릇을, 제빵사는 작은 그릇을 골랐다. 서로의 선택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리아는 손님이 떠난 뒤 벽에 새 메뉴판을 걸었다. [오늘의 수프. 양은 말씀해 주세요.] 글씨는 삐뚤었지만 읽기 쉬웠다. 브론이 자기 이름도 넣자고 졸랐다.
“그건 왜?” 도현이 물었다.
“제가 양파를 토벌했으니까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브론 아저씨가 울었어요.”
“양파 때문에 울었습니다!”
도현은 오랜만에 주방이 웃음소리로 가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은 식당을 다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영웅보다 여러 사람이 같은 온도로 불을 지킬 수 있어야 했다. 그는 브론에게 수프 간을 확인하는 방법을 다시 설명했다. 검은 시럽처럼 위험한 재료가 들어오면 모두가 즉시 확인하도록 작은 붉은 표시를 칠했다. 왕궁을 조사하러 가더라도 식당 자체가 멈추지 않도록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저녁 수프를 끓이는 동안 왕궁의 전령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전령은 작은 은종을 허리에 매달고 있었다. 얼굴에는 극도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도현 주방장을 찾습니다.”
“저입니다.”
“아일린 전하께서 당장 입궁하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식당 문을 열자마자요?”
전령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손등 문양이 오늘 아침부터 팔꿈치까지 번졌습니다. 왕실 주치의는 저주가 곧 집단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도현은 국자를 멈췄다. '왕국의 식탁'은 183,442명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공주의 피부에 나타난 변화가 다른 사람에게도 곧바로 일어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공주님은 저를 요리사로 부르셨습니까, 아니면 기록의 증인으로 부르셨습니까?”
전령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두 가지 모두입니다. 전하께서 저녁을 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요?”
“왕궁 식탁에서 오늘 처음으로, 이미 식사를 마친 사람들의 이름이 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에스텔이 눈을 크게 떴다. 레온의 쇠숟가락이 주머니 안에서 떨렸다.
도현은 수프를 브론에게 맡겼다. “소금은 마지막에 넣어요. 손님들이 직접 간을 더할 수 있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방장님은요?”
“왕궁에 가서 누가 이미 먹은 밥을 다시 청구하는지 보고 올게요.”
그때 거리의 종이 여섯 번 울렸다. 인파 사이로 배급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는 노파가 보였다. 노파는 다른 사람에게 줄 식사를 들고 있었지만 자기 바구니에는 빵 한 조각도 없었다. 도현은 마차가 천천히 지나갈 때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그는 공주에게 왕국의 식탁을 조사하러 간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가 무엇이든 오늘 저녁 그 노파가 밥을 먹었다는 사실까지 대신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주방장님.” 루카스가 조용히 불렀다. “전하께서는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걱정됩니다. 제가 모르는 걸 아는 척하면 공주님도 위험해지니까요.”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없이 마차의 창을 조금 닫았다. 차가운 바람이 잦아들자 도현은 따뜻한 식당 화덕을 떠올렸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 잊고 싶지 않았다.
왕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도현은 손가락을 펴 보았다. 여전히 굳은 부위가 있었다. 그는 손을 주먹 쥐는 대신 열린 채 무릎 위에 놓았다. 어쩌면 오늘은 칼을 드는 일보다 숟가락을 내려놓을 권리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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