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의 바다는 낯설 만큼 매끈했다.
마을 뒤편 언덕에 올라가면 흰 화덕섬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닫힌 창문과 빈 식권이 달린 빨랫줄, 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당들이 파도와 같은 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도현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확인했다. 곧 큰비가 몰아칠 것이었다.
“우선 화덕 아래 창고부터 비웁시다.” 그가 말했다.
브론은 이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늑대인간은 비가 오기 전에 냄새가 달라진다고 했다. 그는 오래된 밧줄의 상태를 코로 확인하며 쓸 수 있는 것과 끊어질 것들을 나눴다. 루카스는 높은 창고의 문을 열고 바닥 높이를 재었다. 나리는 화덕 옆에 보관한 열여섯 개 조각의 위치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아르덴은 검은 돛의 배에서 인부 여섯 명을 데려왔다. 그들은 도현에게 적대적인 얼굴로 다가왔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자 누구보다 능숙했다. 물건을 옮기기 전 바닥을 쓸고, 화덕 벽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두꺼운 천을 깔았다. 도현은 이들이 모두 아르덴의 신념과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장비를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한 인부에게 말했다.
“일은 일이니까요.” 젊은 인부가 대답했다. “하지만 물건을 실어 가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먼저 알려 주세요.”
“알려 준다고 달라집니까?”
“적어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가져가지는 못하겠죠.”
인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낮은 화덕 아래 통로에는 바닷물이 허리 높이까지 차올랐다. 몇 해 전에 무너진 나무 계단은 쓰기 어려웠다. 도현과 브론은 천천히 물을 퍼내면서 벽의 틈을 막았다. 에스텔이 돌벽에 작은 빛을 띄우자 홈마다 다른 글씨가 드러났다.
[공개를 원치 않는 말은 당사자의 손으로 닫을 수 있다.]
[본인이 오지 못한 경우에는 대리인이 아니라 기다리는 자를 남겨 둘 것.]
도현은 두 번째 문장을 읽고 오래 생각했다. 기다리는 자. 누군가가 부재할 때 억지로 대신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돌아와서 선택할 자리를 비워 두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이걸 아일린 공주께도 보내야겠습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왕실 계약 수정 논쟁에서 중요한 문구일 수 있습니다.”
“원본과 대조하기 전에는 법적 효력이 있다고 쓰지 마세요.”
“네. 섬에서 발견된 고문구로 보고하겠습니다.”
점심 무렵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모두가 작업을 멈추고 돌집으로 피신했다. 도현은 재료를 한데 모았다. 빵은 오래되어 딱딱했고 콩은 충분히 불리지 못했다. 그는 물을 넉넉히 붓고 약한 불에 끓이면서 빵을 잘게 찢어 넣었다. 바다에 나가 일하던 인부들에게 따뜻한 한 그릇이라도 내주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음식까지 만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아르덴이 말했다.
“배가 고픈 건 누구나 같습니다.”
“당신이 만든 음식은 저주를 옮긴다고 들었습니다.”
“저주를 풀도록 만든 음식에서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보통 음식이에요. 저주 치료를 기대한다면 받지 마세요.”
도현은 항목이 분명한 작은 메뉴판을 놓았다. '보리와 빵을 넣은 수프. 무료 제공. 저주 해제 목적 아님. 받지 않아도 불이익 없음.' 브론이 그 밑에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추가 한 그릇은 직원과 상의.' 도현은 고개를 저었지만 지우지 않았다.
처음엔 아무도 그릇을 들지 않았다. 아르덴의 인부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어느 인부가 낮게 말했다. “무료라면서 뭘 받으려는 겁니까?”
도현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요. 다만 먹을지 결정하는 건 여러분 몫입니다.”
그는 자신부터 한 숟갈 먹었다. 특별한 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뜨겁고 조금 싱거운 수프였다. 인부 하나가 따라 먹었고, 나리도 아주 작은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천천히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오늘은 드시네요.” 브론이 기뻐했다.
“어제는 먹고 싶지 않았고, 오늘은 먹고 싶어요.” 나리가 대답했다.
그 한마디에 돌집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러나 아르덴은 끝내 먹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물만 마신 뒤 자신의 서류를 접었다. 도현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거절을 존중하려면 자신에게 불편한 사람의 거절도 존중해야 했다.
오후 두 시,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창문 하나가 열렸다. 물방울이 안쪽 바닥까지 날아왔고, 빈 식권들이 줄줄이 찢어져 하늘로 날렸다. 나리는 서둘러 장부를 품에 안았다. 브론은 창문을 몸으로 막았다.
“저는 이제 한동안 창문이 싫겠습니다!”
“창문도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도현이 답했다.
수프가 식어 갈 무렵 아르덴의 인부 가운데 이렌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그릇을 들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릇의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 집에는 다섯 살 딸이 있는데,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자신이 먹은 식사값이 가족 앞으로 청구된 적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무 착오라고 여겼지만 나중에는 같은 일이 다른 집에서도 일어났다고 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회수국에서 일합니까?” 브론이 물었다.
이렌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월급이 끊기면 아이가 당장 먹을 게 없어집니다. 그게 모든 일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도현은 수프를 휘젓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잘못된 제도 아래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같은 책임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주방장이라는 이유로 '맛있게 먹으면 된다'는 말만 할 수는 없었다.
“저는 이 세계에 와서 손님을 도우려다 제 몸에 저주를 두 개 받았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처음엔 그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제대로 몰랐고요. 지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렌이 놀라 물었다. “그럼 왜 계속 요리합니까?”
“요리를 안 할 이유까지는 아니니까요. 다만 누구를 위해 어떤 음식을 만드는지 먼저 묻고 싶어졌습니다.”
아르덴은 멀리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까와 달리 빈 잔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조금 느려졌다. 도현은 그의 마음을 멋대로 읽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아르덴이 다음에 어떤 서류에 서명하고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였다.
도현은 인부들을 위해 수프 한 냄비를 더 끓였다. 이번에는 물을 조금 줄이고 볶은 양파를 넉넉히 넣었다. 아르덴은 여전히 먹지 않았지만 따뜻한 컵 하나는 받았다. 그는 컵에 손을 대고 소리를 낮췄다. “당신이 말하는 선택권이 전부인 것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죽는 사람에게 정말 선택이 있겠습니까?”
도현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거절할 수 있다고 말해도 다른 음식이 없다면 그건 형식에 불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음식을 거절해도 굶지 않도록 만들어야겠죠.” 도현이 말했다. “다른 선택이 없도록 만드는 것부터 잘못됐습니다.”
아르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식탁 위의 거절할 수 있다는 안내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회수해 온 수많은 문서 가운데 이런 질문을 적은 것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부엌 창틀에는 폭풍이 오기 전 모여든 작은 검은 새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쏟아지는 비를 피해 가까운 건물 안으로 날아들었고, 브론은 반사적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도현이 그를 쳐다보자 브론은 민망하게 손을 들었다. “사냥하려던 게 아닙니다. 갑자기 움직여서요.”
인부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래된 제도와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순간을 심각하게만 살 수는 없었다. 도현은 그 짧은 웃음이 끝나기 전에 창문을 닫았다. 곧 비바람이 더 거세질 것이었다.
한동안 웃을 수 없었다. 마당을 가로지른 빗물이 두 번째 화덕 아래로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화덕의 돌기둥에 희미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에스텔은 손바닥을 얹어 마법 봉인의 안정성을 확인했다. 오래된 돌은 버텼지만 지하 배수구가 막혀 있었다.
“배수로를 열어야 해. 안 그러면 기록실이 잠겨.”
아르덴이 즉시 나섰다. “그럼 조각을 제 배로 옮기십시오. 바닥부터 무너지는데 무슨 선택권을 따집니까?”
도현은 젖은 지도와 섬의 경사를 겹쳐 봤다. 두 번째 화덕 뒤에는 예전 마을 사람들이 쓰던 작은 배수로가 있었다. 하지만 입구가 반죽처럼 굳은 흰 석회로 막혀 있었다. 물길을 열면 바깥 암초 방향으로 물을 뺄 수 있을지 몰랐다.
“먼저 배수로를 시도하겠습니다. 실패하면 물건을 옮기는 방안을 다시 논의하죠. 그때도 보관인 동의 없이 넘기지는 않습니다.”
아르덴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인부들을 내주었다. 도현은 그와 함께 현장에 뛰어들었다. 서로의 목적이 다르더라도 당장 집이 무너지는 일을 막는 데는 동의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물소리가 커졌다. 도현은 석회 틈에 금속 주걱을 밀어 넣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뻣뻣한 손목이 갑자기 저려 왔다. 잡고 있던 주걱이 미끄러졌다. 에스텔이 곧바로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해. 너 손이 먼저 굳겠어.”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조금 더 하다가 영영 손을 못 쓰면 누가 요리하지?”
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를 희생하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풀면, 이곳의 오래된 계약과 자신이 무엇이 다를까. 그는 주걱을 브론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도움을 받아들였다.
브론이 어깨로 판재를 밀고 인부들이 줄을 당기자 석회 덩어리가 조금씩 떨어졌다. 배수로 안쪽에서 검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 물에는 오래된 빵가루와 모래, 이름이 적힌 작은 나무패들이 섞여 있었다.
그중 하나에 글씨가 남아 있었다.
[먹지 않은 사람의 몫까지 팔지 말 것.]
폭풍 속에서도 문장은 씻겨 나가지 않았다. 도현은 그 나무패를 잠깐 바라봤다. 누군가 오래전에 남긴 아주 평범한 경고였다.
그러자 저 멀리서 사브라의 종이 길게 울렸다. 배수로 끝이 열리는 순간, 절벽 아래 숨겨져 있던 작은 돌계단이 드러난 것이다.
계단은 바다를 향하지 않았다.
섬의 가장 오래된, 지금은 문이 없는 첫 번째 화덕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제5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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