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서 나온 식권은 젖어 있지 않았다.
도현은 그것을 두 손가락으로 잡았다가 곧 평평한 돌 위에 내려놓았다. 식권에는 잊어버린 맛 하나를 돌려준다는 문장이 선명했다. 한국에서 어머니가 끓여 주던 미역국의 맛. 자기 손으로 복원하려 애써도 감각이 닿지 않는 그 빈자리였다.
브론이 옆에서 눈을 반짝였다.
“주방장님, 그걸 쓰면 기억이 돌아오는 겁니까?”
“그렇게 적혀 있네요.”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도현은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대가: 기억을 대신 건넬 것.' 누군가의 기억인지, 자신의 또 다른 기억인지, 무엇을 얼마나 빼앗는지 없었다.
“어디에서 나가는 돈인지 모르는 할인권은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브론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왕도 음식점에서도 그랬죠. 공짜 추가 메뉴 먹었다가 그릇 세척비가 세 배 나온 집.”
“그 식당은 곧 망했습니다.”
“우리 식당이 아니어서 다행이군요.”
“아직은요.”
도현은 식권을 봉투에 넣고 '사용하지 않음'이라고 써 놓았다. 루카스는 발견 장소와 시각, 봉투의 소유자를 기록했다. 나리는 그 과정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안도가 비쳤다.
“이 섬은 원하는 것을 아주 정확히 보여 주죠.” 그녀가 말했다. “문제는 원하는 것의 값을 무엇으로 받을지 뒤늦게 알려 준다는 데 있어요.”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값을 들은 다음에 결정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음식을 받은 뒤에 값이 결정되었어요.”
도현은 우물과 화덕을 번갈아 봤다. 마을이 비어 있는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었다. 모두 떠났을 수도 있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섬 자체가 계약의 방식을 바꿔 온 오랜 실험 장소였다는 의심은 점점 짙어졌다.
해가 높이 뜰 무렵 나리는 창고에서 자그마한 양철상자를 가져왔다. 뚜껑에는 조각을 한꺼번에 섞지 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르덴 같은 집행관들이 오기 전에는 섬의 주민들이 서로의 증언을 다뤘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자를 허락 없이 열 수 없었다. 다만 상자의 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해마다 녹이 슬면, 나리처럼 남은 사람들이 빈 상자를 대신 돌봤다.
“그럼 누가 돌아와서 자기 상자를 찾겠다고 하면요?” 도현이 물었다.
“찾을 수 있도록 번호를 남겼죠.”
나리는 오래된 작은 장부를 보여 줬다. 이름칸은 대부분 비어 있었고, 대신 원래 주인이 고른 표시가 붙어 있었다. 조개껍데기, 이 빠진 숟가락, 반달 모양 못, 꼬리 둘 달린 물고기 그림. 읽고 쓰지 못해도 자신을 구별할 방법이었다.
도현은 게른 어머니가 그려 준 소라껍데기를 꺼냈다. 세 번 꺾이는 선과 기울어진 별이 보였다. 나리의 장부에도 비슷한 곡선이 있었지만 별은 네모에 가까웠다. 도현은 일부러 그 차이를 옆에 적었다. 조금 닮았다는 이유로 게른이 이곳에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었다.
“저 표식을 보고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쩌죠?” 브론이 물었다.
“본인이 왜 아는지 물어야죠.” 나리가 말했다. “진짜 주인일 수도 있고, 남이 쓰는 표시를 보고 외운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잠시 후 도현은 무거운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열어 보는 일이 자기 기술을 뽐내는 행사처럼 되어서는 안 됐다. 그는 작업대에 깨끗한 흰 천을 먼저 깔았고, 각 조각을 들 때마다 나리에게 동의를 구하기로 했다. 브론은 오래된 조각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작은 나무 칸막이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음식 담는 상자 같네요.” 브론이 말했다.
“맞아요. 차이가 있다면 이건 먹어 버리면 안 되는 내용이란 거죠.”
그는 자신의 말에 잠시 멈췄다. 왕국의 식탁은 기록과 기억을 '먹는다'는 표현을 너무 자주 썼다. 도현은 그 말이 언제부터 실제 사람을 삼키는 구실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날 낮에는 열여섯 개의 도자기 조각을 하나씩 점검하기로 했다. 나리는 조각을 모두 펼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요구했다. 읽은 말을 임의로 합치지 말 것, 조각에서 나온 음성을 실종자의 가족에게 전달하기 전 출처를 검증할 것. 도현은 조건을 종이에 적어 서명했다.
작업대에는 물을 담은 대야와 깨끗한 흰 천을 놓았다. 에스텔은 조각에 깃든 마법을 살폈고, 루카스는 문장의 형태를 베꼈다. 브론은 나무 상자를 옮기며 각 조각의 위치가 바뀌지 않도록 번호표를 붙였다. 도현은 손목의 저주가 반응하지 않는지 확인하며 조각을 차례대로 들었다.
첫 번째 조각에서는 '나는 그날 빵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들렸다. 두 번째에는 '그릇이 내 앞에 오지 않았다.' 세 번째에는 '값을 낼 사람이 여기 없다.' 네 번째에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섯 번째는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들렸지만 문장이 되지는 못했다.
열여섯 번째까지 확인한 결과, 분명한 문장 여덟 개, 해석하기 어려운 소리 다섯 개, 완전히 침묵한 조각 세 개였다. 목소리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같은 사람이 여러 번 남긴 것일 수도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확정할 만한 증거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럼 실종 요리사 열여섯 명의 증언이라는 말은 틀린 겁니까?” 브론이 물었다.
“틀렸다고도, 맞다고도 못 합니다.” 루카스가 대답했다. “지금 확인한 건 열여섯 조각이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에스텔은 조각 뒷면에 있는 미세한 문양을 보다가 멈췄다. “잠깐. 세 번째와 아홉 번째 조각에 같은 손이 닿았어.”
“같은 사람이 말했습니까?”
“그건 아니야. 보관 과정에서 같은 마법 도장이 사용됐다는 뜻이야.”
그녀는 도르만이 준 출항 보류 접수증을 꺼냈다. 거기 있는 파도와 밀 이삭 문양과 아주 비슷했다. 하지만 선의 간격 하나가 달랐다. 베르크의 열쇠에서 본 문양과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도현은 차이를 표시했다. 닮은 문양 세 개. 원본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나리가 화덕 옆에 있는 좁은 계단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계단 끝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바닥에는 원형으로 열여섯 개의 홈이 파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아무 글씨도 없는 자리 하나가 남아 있었다.
“옛날에는 누군가가 자신의 사연을 여기 두고 갔어요.” 나리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그 사연을 듣기 전에, 본인이 공개해도 되는지 물을 수 있도록요.”
“그런데 누가 이걸 창고로 보낸 겁니까?”
“전쟁 뒤에 관리인이 바뀌었어요. 나는 그때 본토에 있었고, 돌아왔을 때 기록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도현은 가운데 빈자리를 바라봤다. 열여섯 조각을 전부 맞춘다고 해서 곧바로 사람 열여섯 명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공개를 원하지 않는 사연이 강제로 펼쳐질 수도 있었다.
그는 나리에게 물었다. “조각을 읽지 않겠다고 한 사람의 의사는 어떻게 확인하죠?”
“여기서는 한때 열일곱 번째 자리가 그 일을 했습니다.”
“열일곱 번째요?”
나리는 가운데의 빈 홈을 가리켰다. “듣는 사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들려주지 않아도 되는 자리지요.”
조각을 정리하던 브론이 물었다. “만약 저 소리가 정말 실종된 요리사들의 목소리라면요? 가족에게 들려주지 않고 숨기는 것도 잘못 아닌가요?”
도현은 그 질문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디선가 자신이 보낸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면, 누군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숨겨도 괜찮을까.
“숨기는 것과 확인하는 동안 공개를 멈추는 건 달라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확인할 계획이 없으면 그건 그냥 숨기는 거예요. 가족에게도 지금 어떤 단서를 조사하고 있는지 설명해야겠죠. 단, 그게 가족의 목소리라고 단정하지 않고요.”
루카스는 각 조각의 확인 계획을 따로 적었다. 음성의 보관 도장 비교, 섬에 남은 기록과 북부의 실종 시점 대조, 생존 당사자가 나타났을 때 검증할 방법. 항목이 늘어날수록 일은 복잡해졌다. 브론이 지친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이 요리해 주면 다 해결되는 간단한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군요.”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도현이 대답했다. “하지만 손님을 하나의 그릇으로 만드는 순간, 저쪽 사람들이 하던 일과 같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브론은 조각 사이에 칸막이를 하나 더 넣었다. 작은 행동이었지만 이제 그는 남의 이야기가 서로 부딪혀 깨지지 않도록 돕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루카스가 가져온 서류에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보관물 회수 요청 접수.]
[신청 건수: 1.]
[신청자: 본인 확인 대기.]
도현의 가슴이 뛰었다. 백연호가 출항하기 전 발견된 '열여섯 건 중 한 건의 서명 회수 요청'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서류에는 누가 요청했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회수 요청이 들어왔다면, 그걸 막으면 안 되겠네요.”
브론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증거면요?”
“중요한 증거라고 해서 그 사람의 말을 영원히 우리 손에 붙들어 둬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에스텔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 자신이 침묵한 탓에 어떤 말이 계약에 이용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해가 낮아질 무렵 섬의 북쪽에서 희미한 돛이 보였다. 사브라는 만 안쪽에서 비상 신호를 두 번 울렸다. 원래 약속한 짧은 종소리와 달랐다.
도현 일행이 해변으로 내려가자 사브라가 외쳤다.
“항만청 배가 아니야! 흰 돛에 검은 접시 문장이 있어!”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배의 선수에는 커다란 빈 접시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깃발이었지만, 화덕 주변의 오래된 글씨와 비슷한 문양이 있었다.
나리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회수하는 사람들이 오겠군요.”
“무엇을 회수합니까?” 도현이 물었다.
“사람이 직접 돌려달라고 한 말도, 돌려달라고 말할 수 없게 된 이름도요.”
그때 도현의 손에 쥔 첫 번째 조각이 아주 작게 울렸다.
'이번에는… 내 말부터 듣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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