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은 그날 밤 거의 잠들지 못했다.
빈집 천장의 틈으로 별빛이 들어왔고, 벽 너머에서는 브론의 낮은 코 고는 소리가 났다. 바다 건너 먼 왕도에는 아일린이 있을 것이고, 북부에는 마르타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가족이 있었다. 도현은 한 장의 종이에 그들이 모두 같은 식탁에 앉는 그림을 그리려다 그만두었다. 아직 비워 두어야 할 자리가 너무 많았다.
새벽에 그는 손목의 반점을 살폈다. 회색 자국은 어제보다 손등 쪽으로 조금 더 길게 퍼져 있었다. 이 세계에 처음 도착한 날에는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날이 움직이는 자신의 손가락이 더 중요했다. 도현은 검지와 엄지를 맞대고, 눈을 감은 채 바닷바람 속의 짠내를 구별했다.
짠내는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뒤 한국에서 먹던 구운 김의 맛을 떠올리려 하자, 기억이 중간에서 끊어졌다.
에스텔이 문가에 섰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는 게 어때?”
“무리하지 않는 것과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다르겠죠.”
“내가 먼저 화덕 기록을 읽을게.”
도현은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에스텔은 여전히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녀에게 아무 일도 맡기지 않을 수는 없었다.
“두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혼자 들어가지 말 것. 기록에서 본 것과 기억나는 일을 구별해서 말할 것.”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아침 식사는 마른 빵을 적신 버섯죽이었다. 나리는 오늘도 자신의 몫을 먹지 않았다. 브론은 그녀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은지 걱정했지만 도현은 물을 마시고 싶은지만 물었다. 나리는 따뜻한 물을 받았다. 그 뒤로 브론도 더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오전 내내 화덕 외벽의 손자국을 살폈다. 스물여섯 개는 어른 손 크기였고, 낮은 자리의 손자국 세 개는 아이의 것이었다. 도현은 처음 아이가 한 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세 자국의 모양이 달랐다. 엄지의 각도와 손가락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최초의 세 아이라고 했죠.” 루카스가 말했다.
“한 아이의 손을 세 번 찍은 게 아닐 수도 있겠네요.”
나리는 손가락으로 가장 낮은 자국을 가리켰다. “저건 거절한 아이의 것, 나머지는 먹지 못한 아이들의 것일 가능성이 커요.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은 첫 자국뿐입니다.”
그녀의 말은 도현을 한 번 더 멈춰 세웠다. 당시 섬에 있었다는 사람도 오래전 모든 장면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기억과 기록, 추측을 분리하지 않으면 조사는 단단해지는 대신 아름다운 거짓말이 될 것이다.
도현은 레온의 쇠숟가락을 꺼냈다. 숟가락의 뒷면에는 작은 홈 일곱 개가 있었다. 북부 첫 화덕에서 빛났던 홈이었다. 그가 화덕 외벽의 두 번째 손자국에 숟가락을 가까이 대자 홈 하나가 희게 변했다.
[표식 대조 중.]
[기록 대상: 최초 수령 미완료 세 사람.]
[기억 편집 흔적: 2건.]
[거절 기록: 1건.]
브론이 깜짝 놀랐다. “그럼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까?”
“아직요. 게다가 수령하지 못한 것과 수령을 거절한 건 다를 수 있습니다.”
나리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아이들은 해변에서 생선 그물을 말리던 가족의 아이들이었어요. 그날 이름을 부를 때 모두 다른 방향을 봤지요.”
“기억나시는 이름이 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나리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발음은 기억나요. 부르면 누군가 뒤를 돌아봤죠. 그런데 지금은 입 안에서 소리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의 이름을 말하려고 하면, 내가 왜 말하려 했는지 먼저 잊어버려요.”
에스텔의 표정이 굳었다. “이름 삭제 저주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진 않아. 이름을 지우는 대신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의 의도를 잘라내는 방식이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계약의 변경 권한이 있는 사람. 혹은 변경 권한을 흉내 낼 수 있는 존재.”
도현은 카르도의 대리 수령권과 베르크의 은색 열쇠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이 섬에 그들이 왔다는 직접 증거는 없었다.
한쪽에서는 브론이 오래된 허브를 분류하고 있었다. 그는 냄새가 좋은 잎과 이미 곰팡이가 핀 잎을 나누면서 뜻밖에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현이 조용히 다가가자 브론이 물었다. “주방장님, 저는 오늘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무슨 말이에요?”
“요즘 주방장님은 기억이 없어지면 저희한테 확인하겠다고 하시잖아요. 그러면 저는 어떤 기억을 맡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도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는 브론을 실수 많은 종업원이라고 생각했다. 주문을 헷갈리고 그릇을 깨뜨리는 사람이 중요한 기록을 맡을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항해에서 배가 기울었을 때 제일 먼저 루카스를 붙잡은 건 브론이었다. 제3창고 화재 때도 연기 속 사람을 찾아낸 것이 그의 후각이었다.
“당신은 냄새를 잘 맡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음식의 향과 사람의 냄새를 기억해 주세요. 저는 나중에 맛이 아니라 향을 잊을지도 모르니까요.”
브론의 귀가 천천히 섰다. “그건 제가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먹은 수프에 뭐가 들어갔는지 맞혀 보세요.”
“콩, 양파, 버섯, 그리고 주방장님이 덜 씻은 팬 냄새!”
“마지막 건 굳이 기억 안 하셔도 됩니다.”
“잘하라고 하셔 놓고요!”
둘은 짧게 웃었다. 도현은 처음으로 브론이 단순히 도와주는 직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일부를 함께 기억해 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감정이 정리되기 전 에스텔이 멀리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녀도 누군가를 믿었다가 잃었던 적이 있을까. 도현은 묻지 않았다. 대신 저녁에 같이 요리하자고 손짓했다.
나리는 한쪽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사라진 이름을 혼자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했어요.”
“그러면 여럿이 지키면 될까요?” 도현이 물었다.
“그것도 답은 아니에요. 다만 누군가 잊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요.”
정오 무렵 화덕이 자발적으로 빛났다. 세 손자국 아래에 각각 작은 홈이 열렸다. 세 개 모두 빈 그릇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루카스가 살피자 첫 번째 홈에는 오래전에 지워진 먹자국, 두 번째에는 물에 닳은 숫자, 세 번째에는 밥값을 보호자에게 청구한다는 문구가 남아 있었다.
“아이가 세 명이었던 이유는 세 가지 선택을 비교하기 위해서였겠네요.” 도현이 말했다.
“선택을 비교한 게 아니라 사람을 시험한 것일 수도 있어.” 에스텔이 대답했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시험이라면 누군가 점수를 매겼겠죠. 저는 일단 각각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나리는 화덕 뒤의 작은 창고를 열어 주었다. 그곳에는 마른 해초와 오래된 나무 상자가 있었다. 상자 안쪽에는 무슨 일인지 모를 수십 장의 서명 목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맨 위에는 '동의한 사람에게만 제공'이라는 문장이 반복됐지만, 나중 문서로 갈수록 '응답 없는 사람은 동의한 것으로 간주'라는 단서가 늘어났다.
루카스가 서명 형식을 베껴 적는 동안 도현은 유난히 작은 항목 하나를 발견했다.
'아이의 법정 보호자가 부재한 경우, 내일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원래는 빈칸이었다. 누군가 나중에 잉크를 덧칠해 '왕실 대리인'이라고 적어 놓았다.
“이걸 어떻게 입증하죠?” 루카스가 물었다.
“잉크와 종이의 오래된 정도를 비교할 수 있어요. 항만청 조사관에게 보내면 정확한 감정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나리는 또 다른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는 오래전에 찍힌 작은 손바닥 인장이 있었다. 봉투는 뜯지 않은 상태였다.
“이건 거절한 아이가 남겼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면 나중에 먹을 사람에게 보여 주라고 했어요.”
“왜 지금까지 열지 않으셨습니까?”
“나에게 보여 준 게 아니니까요.”
도현은 봉투를 바로 받지 않았다. 누가 나중에 먹을 사람인가. 자신인가. 실종자들의 가족인가.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인가.
그는 나리에게 물었다. “누구에게 전달할지 정해지지 않았다면, 보관 책임도 같이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나리는 한참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를 가져갈 대신 세 사람이 공동 보관하도록 했다. 나리, 도현, 루카스. 봉투는 섬의 창고에 남기고, 봉인 상태를 확인하는 도장을 셋이 찍었다.
그러자 화덕의 안쪽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수신인 미지정 봉투: 강제 개봉 불가.]
[공동 보관 합의: 승인.]
브론이 혀를 내둘렀다. “이 섬은 식당이라면서 문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알던 식당도 장부 때문에 망할 뻔했어요.” 도현이 말했다.
해가 저물 무렵 사브라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내일 밤부터 큰비가 내릴 가능성이 있었다. 귀환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도현은 창고 문을 닫고 빈 마을 거리를 돌아봤다. 누군가는 이곳에 오래전 이름을 남겼고, 누군가는 자신이 가질 내일조차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나리와 루카스가 봉인을 찍는 동안 에스텔은 창밖을 내다봤다. 마을 언덕 위에는 흰 화덕이 두 개 서 있었고, 그 뒤로 오래된 물길이 있었다. 그녀는 도현에게 자신이 처음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을 다시 말했다. 당시 그녀는 빵을 만들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대금이 왕실에서 나올 거라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믿고 싶었어.”
“믿고 싶었던 이유는 이해합니다.” 도현이 말했다. “하지만 그게 계약서 확인을 대신하지는 않겠죠.”
“알아. 그래서 이번엔 너한테 확실하지 않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그녀는 오래전 멈춰 버린 마을 종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자신을 심판해 주면 차라리 편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잃어버린 사람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앞으로는 한 문장씩 사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었다. 도현은 그 일을 대신 용서해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 마을 끝의 우물에서 작은 물결이 일었다. 아무도 물을 긷지 않았는데 두레박이 혼자 올라왔다. 안에는 물 대신 오래된 식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수령인: 현재의 첫 조리사.]
[지급 항목: 잊어버린 맛 하나.]
[대가: 기억을 대신 건넬 것.]
도현은 식권을 바라봤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문장이었다.
제5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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