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고아, 귀족 집안에서 쫓겨난 하인, 자신의 마을 이름조차 지도가 바뀌면서 사라진 이주민들. 그들은 시장에서 빵을 사고, 일터에서 하루를 보내고, 해가 지면 수로 근처의 값싼 여인숙으로 돌아갔다. 서로의 이름을 물을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숟갈'에 찾아온 소녀에게는 이름 하나가 세상의 전부였다.
“엄마 이름은 마리아였어요.”
소녀가 말했다.
도현은 소녀가 들고 온 종이 봉투를 받았다. 안에는 어제 구운 꿀빵과 비슷한 모양의 빵이 있었다. 다만 한쪽 면에 작고 흐릿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둥근 접시와 거꾸로 놓인 왕관. 벨리온이 내밀었던 공문과 루카스의 연회 초대장에 나타난 문양이었다.
“이건 어디서 났니?”
“엄마 물건을 보관하던 상자에서 찾았어요.”
소녀는 자신의 이름이 리아라고 했다. 왕도 남문 근처에서 재봉 일을 하는 이모와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실종된 뒤 일곱 해 동안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고, 어느 날부터는 이름도 사라졌다고 했다. 전날 도현이 만들어 준 빵을 먹고 나서야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엄마가 이 빵을 구울 때 노래했어요.”
“무슨 노래?”
리아는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멜로디는 생각났지만 가사는 몇 마디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밀알 하나를 나누면….”
그 뒤는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리아는 반죽 그릇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올린 채 노래가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아이의 표정이 밝아질수록 도현은 조심스러워졌다. 소녀는 기억을 되찾고 있었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기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제 집에 가서는 잠을 잘 잤니?”
“네. 그런데 엄마 꿈을 꾸었어요.”
“어떤 꿈?”
“커다란 부엌이었어요. 창문이 없고, 사람들은 계속 빵을 만들었어요. 엄마는 맨 안쪽에서 반죽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어요.”
리아는 말을 멈췄다. 손톱 밑에 낀 밀가루를 한참 들여다봤다.
“제가 엄마를 부르니까 돌아보셨어요. 그런데 얼굴이 안 보였어요.”
“무서웠겠네.”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어제 소녀에게 먹인 빵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맛과 향이 닫힌 기억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면, 나쁜 기억도 같은 방법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것을 치료라고 부르는 게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은 네가 원하는 만큼만 기억해도 돼. 나머지는 나중에 해도 되고.”
“그럼 엄마가 어디 있는지 못 찾으면요?”
“기억 하나에 모든 답이 숨어 있지는 않을 거야. 다른 방법도 찾아보자.”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밀가루를 체에 쳐 내려보았다. 하얀 가루가 공기 중에서 잠깐 떠올랐다가 나무 그릇에 소복이 쌓였다. 한국의 주방이었다면 제빵사가 하던 일이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작은 도구 하나까지 손수 만들어야 했다. 브론이 체의 가장자리를 붙잡자 꼬리 때문에 밀가루가 사방으로 날렸다.
“브론 씨. 꼬리는 멈추고요.”
“기분 좋으면 움직이는 건데요.”
“밀가루가 기분 좋다고 다 날아가면 빵을 못 만들어요.”
리아가 웃으며 브론의 꼬리에 작은 천을 묶어 주었다. 늑대인간은 조금 억울한 표정이었지만,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고는 얌전히 서 있었다.
반죽을 만지던 리아의 손길은 처음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밀가루가 손가락 사이에 묻었을 때는 평범한 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렸고, 반죽이 생각보다 부드러워지자 신기한 듯 웃었다. 도현은 그 모습이 좋았다. 이 소녀의 모든 시간이 실종된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시간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도현은 서둘러 말하지 않았다. 기억이 억지로 떠오를 때보다 편안할 때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요리하며 여러 번 보았다. 특정 향을 맡으면 어릴 적 골목이 생생해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리아의 기억을 더 강하게 자극하면 자신에게 남은 저주가 반응할 수도 있었다.
“우리 주방에서 같이 빵을 만들어 볼래?”
“제가요?”
“밀가루 만져 본 적 있지?”
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날 오전 식당은 임시 제빵 교실로 바뀌었다. 브론은 앞치마를 두 개 가져왔는데 하나는 손님용, 다른 하나는 자신이 특별히 주문한 늑대인간용이었다. 꼬리가 나오는 구멍까지 뚫어 놓은 바람에 도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브론 씨, 우리 제빵 교실 학생이 몇 명인데요?”
“두 명이죠. 꼬리 달린 학생과 안 달린 학생.”
“꼬리 달린 학생은 설거지부터 하세요.”
“교육의 평등이 무너졌습니다!”
리아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도현은 밀가루에 소금과 미지근한 물을 넣고 반죽을 시작했다. 손바닥 아래에서 가루가 작은 덩어리로 뭉치고, 끈적하던 반죽이 힘을 받으며 매끈해졌다. 리아는 그 움직임을 유심히 따라 했다.
“너무 세게 누르지 않아도 돼. 반죽이 밀려나면 다시 접어 줘.”
“엄마도 그렇게 말했어요.”
“정말?”
“네. 반죽하고 싸우면 안 된다고.”
도현은 손을 멈췄다. 어머니를 잃은 기억은 남아 있는데 가르쳐 준 말이 돌아오다니. 저주가 기억을 없애는 방식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었다. 어떤 기억은 닫혀 있고 어떤 기억은 열렸다. 그는 그 차이를 알아내고 싶었다.
반죽을 발효시키는 동안 리아가 가져온 빵 조각을 살펴보았다. 빵은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속에 들어 있는 검은 설탕 같은 물질은 변색되지 않았다. 에스텔이 마법 렌즈를 가져왔다.
“이건 평범한 설탕이 아니야.”
“마법 재료입니까?”
“기억을 붙잡는 결정이야. 마법사들은 향수를 만들 때 쓰기도 해. 그런데 식품에 넣는 건 오래전에 금지됐어.”
“왜요?”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붙잡을 수 있으니까. 잘못 쓰면 음식 하나가 먹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엮어 버려.”
도현은 공주의 손등에 있던 왕관을 떠올렸다. 왕국 전체를 한꺼번에 묶는 저주. 그리고 기근 당시 나눠 준 음식.
“리아, 어머니는 어디서 일하셨니?”
“예전에는 빵집이요. 나중에는 큰 부엌에 갔어요.”
“왕궁?”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왕궁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빵을 만드는 곳이라고 했어요.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 준대요.”
도현은 굳은 빵을 뒤집었다. 낙인의 홈에 오래된 곰팡이가 아니라 검은 밀가루가 끼어 있었다. 그는 바늘로 아주 조금 긁어 유리병에 넣었다. 창고에서 발견한 검은 밀알과 같은 냄새였다.
도현은 빵에 남은 낙인을 얇은 종이 위에 옮겨 그렸다. 선 하나가 닳아 있었지만 거꾸로 된 왕관과 접시는 또렷했다. 리아는 그림을 보자 작은 손으로 왕관의 한쪽 끝을 가리켰다.
“여기 원래 별이 있었어요.”
“별?”
“엄마가 빵을 만들 때 표시했어요. 별이 있으면 우리가 만든 빵이고, 없으면 그냥 배급 빵이라고.”
도현은 종이에 별을 하나 추가했다. 빵의 겉면에는 원래의 낙인 위로 굳은 반죽이 덧씌워져 있었다. 이것이 누군가 일부러 표시를 지운 흔적이라면, 마리아는 공식 배급 식량과 자신이 만든 빵을 구분하려 했을지 모른다.
“엄마는 배급 빵을 좋아하셨니?”
“처음엔요. 배고픈 사람들이 웃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했어요.”
“무슨 냄새?”
리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달콤한데 속이 메슥거리는 냄새요. 사람들이 계속 달라고 해서 엄마가 무서워했어요.”
도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감미로운 음식이 지나치게 강한 기억과 감정을 불러올 수도 있고, 마법 재료가 사람의 욕구를 증폭했을 수도 있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너무 많았다.
그는 흰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확인할 것: 별표 없는 빵을 누가 만들었는가.]
[확인할 것: 검은 결정은 설탕인가, 마법 물질인가.]
[확인할 것: 먹은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는 효과는 누가 의도했는가.]
브론이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 식당에 탐정 사무소 간판도 걸까요?”
“누가 탐정 의뢰비를 주면 생각해 보죠.”
“왕실에서 주면요?”
“그쪽은 우선 밀린 수프값부터 받아야겠네요.”
리아가 웃었다. 무거워졌던 부엌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때 리아가 노래를 다시 불렀다.
“밀알 하나를 나누면, 배고픈 마음 둘이 웃네. 마지막 한 숟갈은 남겨 두어라….”
에스텔이 불쑥 물었다.
“마지막을 왜 남겨?”
리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엄마가 그건 꼭 남겨야 한다고 했어요. 다 먹어 버리면 누군가 집으로 못 돌아온다고.”
주방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도현은 그 말을 메모했다. 누구나 먹고 남기는 마지막 한 숟갈. 식당 이름과 정확히 같았다.
발효가 끝나자 도현은 반죽을 작은 빵으로 나누었다. 손님 한 명의 삶을 되돌려 줄 특별한 빵이 아니라, 지금 눈앞의 소녀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을 굽고 싶었다. 버터를 바르고 잘게 썬 사과를 넣어 오븐으로 밀어 넣었다. 이세계 오븐의 불길은 일정하지 않아 한쪽 면이 먼저 익었지만, 브론이 꼬리로 부채질을 하며 도와준 덕분에 색이 고르게 났다.
갓 구운 빵을 리아에게 건넸다. 아이는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한입을 먹었다.
“어때?”
“엄마가 만든 것하고는 달라요.”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너무 달아?”
“아니요. 이건 제 빵 같아요.”
리아는 남은 빵을 가슴 앞에 안았다.
“엄마가 있었다면 맛있다고 해 줬을 것 같아요.”
도현은 대답 대신 접시 하나를 더 내밀었다. 자신에게 남아 있던 기억 저주가 조용히 욱신거렸지만 추가 저주가 옮겨오지는 않았다.
오후가 되자 리아의 이모가 찾아왔다. 서둘러 달려왔는지 어깨에 실밥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식당이 위험한 곳이라는 소문을 들었다며 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리아가 울음을 터뜨리자 도현이 설명했다. 오늘은 어떠한 치료도 하지 않았고, 아이가 직접 빵을 구웠다고.
이모는 한참 뒤에야 진정했다.
“마리아는 제 동생이에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실종됐던 날, 왕실에서 보낸 사람들이 집을 뒤졌습니다. 반죽 그릇까지 깨뜨렸어요. 그 뒤 리아가 엄마를 잊기 시작했죠. 저는 이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줄만 알았습니다.”
“마리아 씨가 하던 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이전에는 공동 배식장에서 일했어요.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 주던 곳이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상자에 들어 있는 밀가루를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른 재료를 쓰면 왕실에서 벌을 준다고요.”
“그 상자의 문양은요?”
이모는 도현이 내민 빵의 낙인을 보자 뒤로 물러났다.
“그거예요.”
“그 상자는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수로 끝 창고. 붉은 돛을 단 배가 밤마다 들어왔어요.”
벨리온이 가리켰던 곳이었다.
도현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리아가 이모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더 캐물으면 아이가 또 두려움 속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이모는 고개를 숙였다. 리아는 식당 문을 나서기 전에 돌아섰다.
“아저씨. 엄마를 찾으면 다시 빵을 구워도 돼요?”
“당연하지. 이번엔 네가 메뉴를 정해.”
“그럼 엄마가 좋아하던 걸 만들래요.”
“뭔데?”
리아는 잠시 생각한 뒤 웃었다.
“아직 몰라요. 찾고 나서 물어볼래요.”
해가 지고 손님들이 돌아간 뒤, 도현은 오래된 빵 조각을 장부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빵 안의 검은 결정들이 작은 진동을 일으켰다.
검은 결정은 아주 작은 글씨를 만들었다.
[배식자 마리아: 제7조리실.]
[소재 상태: 소멸 처리.]
그 문장을 읽은 도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소멸 처리.
사람의 이름 옆에 붙일 단어가 아니었다.
브론이 물었다.
“주방장님, 소멸 처리가 뭐예요?”
도현은 굳은 빵을 조심히 병에 넣으며 말했다.
“누군가 사람을 재료나 물건처럼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창밖에서 수로를 따라 작은 배가 지나갔다. 검은 물 위로 펼쳐진 돛은 어두운 붉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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