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호는 배라기보다 항구의 일부처럼 보였다.
오래전에 닻을 내린 뒤 움직이지 않은 선박의 선체에는 조개와 해초가 두껍게 붙어 있었다. 갑판 위의 큰 돛은 걷힌 채 묶여 있었고, 선미의 이름은 소금 때문에 절반이 지워져 있었다. 항구 아이들은 이 배가 밤마다 조금씩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낮에는 물 위에 있고 밤에는 물속을 항해한다는 뜻이었다.
도현은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배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증언과, 배 아래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증언을 구분했다. 그래도 밤의 물때가 바뀌기 전에 백연호의 구조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검사 허가를 얻기까지 한차례 소란이 있었다. 항만청에서는 백연호의 선체에 손을 댈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오랫동안 운항하지 않아 책임자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유리아가 오래된 부두 이용료 장부를 꺼내자, 사용료는 지난달에도 꼬박꼬박 납부된 것으로 나왔다.
“주인이 없다면서 돈은 누가 내고 있죠?” 루카스가 물었다.
직원은 장부의 작은 칸을 가리켰다. '하얀 식탁 관리인 대납.' 결제자는 사람이 아니라 직책이었다. 도현은 북부의 허위 급식 기록이 떠올랐다. 당사자 이름은 지우고, 돈을 주고받는 기관 이름만 남기는 방법.
“선박이 정말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뜻이군요.”
“관리 기관이 있다는 말과 실제 소유주가 있다는 말은 다릅니다.” 루카스가 답했다.
그는 직원에게 소유권에 관한 판단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안전 검사에 협조해야 할 관리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만 확인했다. 항만청도 그 주장에는 답을 피하기 어려웠다.
검사 준비 중에 브론은 등불 세 개를 서로 다른 색 천으로 감쌌다. 하나는 길 찾기, 하나는 위험 신호, 하나는 즉시 철수 신호였다. 유리아가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말소리가 멀리 안 갈 수도 있어요.”
브론은 으쓱했다. “제가 국을 젓는 것 말고도 배울 게 있군요.”
“원래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주방장님은 왜 칭찬 끝에 꼭 설거지 얘기를 하십니까?”
그들은 웃었지만 소지품 검사까지 마친 뒤에야 배로 향했다. 밧줄의 매듭을 다시 확인하고, 각자가 철수 신호를 이해했는지 소리 내어 말했다. 도현은 일행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대신 각자가 위험을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북부에서 사람 하나가 갇힌 이유가 바로 선택권 없는 노동이었다.
유리아는 오래된 부두 관리인에게 정식 정박선 검사 허가를 얻었다. 루카스가 왕실 공문을 보태고, 백연호가 주변 선박의 수로를 가로막고 있다는 안전상의 이유를 제시한 끝에 허가가 떨어졌다. 배에 오르는 인원은 네 명이었다. 유리아, 루카스, 도현, 브론. 에스텔은 부두에서 구조 마법을 준비하기로 했다.
“제가 배를 잘 타는 줄 알고 데려가시는 거죠?” 브론이 물었다.
“발소리 구분이 필요하니까요.” 도현이 말했다.
“그럼 다행입니다. 물에는 못 떠요.”
유리아가 두툼한 밧줄을 내밀었다. “그런 말은 타기 전에 해야죠.”
갑판은 삐걱거렸지만 생각보다 튼튼했다. 도현은 배의 뱃머리에서 뒤집힌 식탁 한 개를 발견했다. 원래 선원들이 밥을 먹던 곳일 것이다. 그런데 네 다리마다 식권을 꽂을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그릇을 놓는 자리보다 식권을 꽂는 홈이 더 깊었다.
“배에서 먹는 식사까지 기록했군요.”
유리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선원들은 물속에서 배를 고칠 때도 식사표를 받았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먹을 시간은 없었지만요.”
도현은 목재 아래를 두드렸다. 같은 넓이의 판자 중 한 곳만 다른 소리가 났다. 루카스가 허가서에 명시된 안전 점검 범위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판자를 들어냈다. 밑에는 낮은 계단이 있었다. 계단 끝에는 철문이 하나, 그 옆에는 작은 동판이 있었다.
[제0접안지.]
[운반물은 도착했으나 수령인은 도착하지 않음.]
유리아가 숨을 들이켰다. 지도에 없던 네 번째 길이 정말 배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문은 갑판보다 낮은 위치인데도 바닷물이 들이치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 같은 막이 계단 끝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법입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네. 그런데 어떤 마법이든 만들 때는 틈이 생기죠.” 도현은 동판 가장자리를 살폈다. 소금이 굳어 막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게 무너지면 물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억지로 열지 맙시다.”
그때 숟가락이 주머니에서 울렸다. 레온의 쇠숟가락 일곱 홈 중 하나가 빛나며 동판의 글씨를 비췄다.
[임시 관리인 백도현. 입장 자격 없음.]
[최초 입회인의 증언이 필요한 문입니다.]
도현은 바깥에 있는 에스텔에게 신호를 보냈다. 에스텔은 밧줄에 묶인 작은 편지에 답을 적어 올렸다. '내 이름을 부르지 말고, 내가 무슨 말을 읽었는지 물어.'
도현이 철문 앞에서 말했다. “최초 계약의 입회인이 확인한 구호 대금 부담자는 왕실이었습니다. 후손의 식사 시간으로 변경하는 문장은 당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 소금 막에 금이 생겼다.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안쪽에서 묶인 서류 몇 장이 보였다. 안에는 배의 운항일지 대신 '증언 보관표'가 쌓여 있었다. 열여섯 칸. 하나의 칸마다 조리 도구와 작은 접시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 아래 누가 갇혀 있을까요?” 브론이 속삭였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기록이 있다고 사람이 있는 건 아닙니다.”
루카스는 바다 쪽에서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선체가 흔들리자 유리아가 밧줄을 붙잡았다. 도현은 유리 막 너머의 작은 글씨를 베껴 적었다. 맨 아래에는 붉은 도장이 있었다.
[변경 계약 승인 대리: 카르도.]
[운임 수령 명의: 하얀 식탁 관리인.]
[실제 수령 여부: 검증 전.]
갑자기 벽 너머에서 손이 하나 나타났다. 사람 손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유리 막에 눌리며 손바닥을 펼쳤다. 브론이 숨을 삼켰다. 손바닥에는 소금 가루가 묻어 있었다. 곧 그림자는 사라졌다.
“사람입니까?” 유리아가 물었다.
“그림자일 수도 있습니다.” 도현은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말했다. “손 모양을 봤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막 너머의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도현이 몸을 낮춰 자세히 보자 유리 같은 표면 안쪽으로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복도 벽에는 손바닥 크기의 나무패들이 촘촘히 꽂혔다. 각각의 나무패에는 음식의 이름이 적힌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아침 여섯 시, 제분소. 밤 열한 시, 항만. 새벽 두 시, 제0접안지. 다른 곳에서 일한 사람들의 시간이 한곳에 나란히 놓인 것이다.
“저 시간을 다 더하면 뭐가 되죠?” 브론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다만 누가 일한 시간을 나눠서 팔았다는 생각은 듭니다.”
유리아가 한쪽 나무패의 아래를 가리켰다. '보관된 짠맛의 기억, 반납 희망자 대기.' 세탄이 가진 표와 같은 문구였다. 오래된 선원들 일부는 자신이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고 싶어 했지만, 반납할 때마다 새로운 보관료가 붙었다. 기록을 되찾으려는 행동조차 새로운 운임으로 기록되는 셈이었다.
“이게 사람을 구하는 제도였을까요?” 브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도현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큰 기근에 사람이 먹을 걸 제때 못 받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이는 건 그 대가를 미루고 돌려 청구하는 장치입니다.”
에스텔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작은 통신 주문을 통해 이어지는 소리였다. “무리해서 문을 열지 마. 그 안쪽은 바다의 수압과 소금 계약이 같이 버티는 곳이야. 둘 중 하나만 무너지면 통로가 잠길 수 있어.”
루카스는 곧바로 손짓해 일행을 뒤로 물렸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복도 끝을 보았다. 거기에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북부의 화덕과 달리 등받이가 높고, 마치 누군가 식탁을 차리기 위해 기다리는 자리처럼 보였다. 의자 뒤에는 검은 막이 드리워져 있어 앉은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너머에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유리아가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문을 부수면 물에 휩쓸릴 수도 있어요.” 도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확인할 수 있는 상태에서 다시 와야 합니다. 오늘은 증거를 가져갑시다.”
브론은 아쉬운 듯 귀를 내렸다. 그는 북부에서 마르타를 찾아냈을 때처럼 누군가 손을 잡고 나올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도현도 마음은 같았다. 그러나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다. 게른이 이곳에 있다는 확증도, 엘마가 저 의자에 앉아 있다는 근거도 없었다.
도현은 동판의 문장을 작은 종이에 탁본으로 뜨고, 막 안쪽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렸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이전보다 커졌다. 복도 끝의 의자가 아주 조금 앞으로 당겨지는 듯 보였다. 그는 눈을 비볐다. 실물이 움직인 것인지 빛이 흔들린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때 막 너머에서 세 번의 작은 노크가 들렸다. 제8창고에서 처음 들었던 리듬과 같았다. 도현의 손이 순간 멎었다. 루카스가 어깨를 붙잡았다.
“같은 소리일 수는 있지만, 같은 사람이란 뜻은 아닙니다.”
“알아요.” 도현이 말했다. “그래서 더 돌아와야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구조용 종이 세 번 울렸다. 물때가 예상보다 빨리 바뀌고 있었다. 배 아래의 바닷물이 검게 차오르고, 유리 막에 세로로 금이 생겼다. 루카스는 도현을 먼저 밀어 계단 위로 올렸다. 브론이 뒤따랐고, 유리아가 밧줄을 당겼다.
철문이 닫히기 직전 안쪽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증언 보관 16건 중 1건 이의 신청 처리 중.]
[신청자의 소재 기록: 제3창고가 아님.]
도현은 더 읽으려 했으나 루카스가 그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선체가 기울었다. 네 사람은 기울어진 갑판을 미끄러지듯 지나 부두로 돌아왔다. 에스텔이 짧은 주문으로 밧줄을 고정했고, 유리아는 마지막 사람이 올라온 것을 확인한 뒤 무릎을 꿇었다.
“이 배 밑에 누군가 있는 건가요?” 브론이 거친 숨을 쉬며 물었다.
도현은 젖은 수첩을 가슴에 안았다. “모르겠어요. 다만 사람의 목소리를 물건처럼 보관하는 문은 찾았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백연호를 바라봤을 때, 선미의 지워진 이름 아래 새 글씨가 보였다.
[출항 예정: 내일 새벽.]
몇 년째 움직이지 않던 배가 항로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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