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식탁 제3창고의 자루에는 두 종류의 무게가 적혀 있었다.
첫 번째는 곡물의 무게였다. 마른 밀알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알려 주는 숫자였다. 두 번째는 이상했다. '대기 중인 식사: 16'. 도현은 창고 뒤편에서 유리아가 건네준 장부 사본을 한참 들여다봤다. 포대 하나에 식사 하나가 대응한다는 뜻인지, 열여섯 포대 전체가 한 식사로 처리됐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왜 물건에 식사가 적혀 있죠?” 브론이 물었다.
“북부의 검은 밀밭에서도 사람을 일한 시간으로 바꿔 적었잖아요. 이번엔 누군가의 식사가 물건에 묶였을 수 있습니다.”
에스텔은 서류를 받아 들고 한쪽 귀퉁이를 비췄다. 오래된 잉크 아래 새롭게 바른 얇은 막이 보였다. 손톱으로 긁으면 문장이 바뀔 듯한 마법 흔적이었다.
“원본이 아니야. 항구에서 유통하는 송장에는 항해에 필요한 수량만 남기고, 누구에게서 왔는지는 덮어 놓았어.”
“그럼 덮인 글씨는 어디서 읽을 수 있습니까?”
“소금이 건조해지기 전이라면 원래 글씨가 비칠 거야. 단, 종이를 함부로 젖히면 계약이 읽은 사람에게 달라붙을 수 있어.”
도현은 종이를 젖히지 않았다. 창고를 열기 위한 방법을 찾는 동안 무리해서 함정을 건드릴 이유는 없었다. 유리아는 물때를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바닷물이 빠지는 밤, 옛 방파제를 따라가면 새 창고의 지반 아래로 통하는 배수로가 드러났다. 합법적인 조사로는 막혔지만 증거를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바닷물에 들어갈 일은 싫은데요.” 브론이 말했다.
“늑대인간도 물을 싫어합니까?”
“늑대인간은 털을 말리는 데 세 시간이 걸립니다.”
“저도 젖은 요리사 모자 말리기 싫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가벼웠지만 준비는 신중했다. 유리아는 오래된 방파제가 붕괴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물때가 어긋나면 순식간에 물이 차고, 돌계단 일부는 바닷풀 때문에 미끄러웠다. 루카스는 밧줄을 네 개 준비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용할 기름등을 따로 챙겼다.
도현은 들어가기 전 출입 목적과 동행자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나중에 누군가 ‘항구에 오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에스텔도 그 아래에 서명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적고 한참 펜을 멈췄다.
“서명하기 무섭습니까?”
“예전에는 이름을 적으면 책임을 다한 줄 알았어.”
“지금은요?”
“이름을 적고도 도망갈 수 있다는 걸 알아.”
에스텔은 다시 펜을 잡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사본을 남길게.”
오후 내내 그들은 항구의 화물 무게를 조사했다. 육지로 들어온 밀 자루는 표준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장부에는 하나당 쉰 근이라고 적혔지만, 유리아가 같은 운송조합의 빈 포대를 가져오자 도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자루의 바닥은 밀알이 아니라 긴 나무판을 넣을 수 있도록 평평하게 꿰매져 있었다.
“이걸 곡물 자루라고요?” 브론이 물었다.
“마른 보리를 담으면 무게가 아래로 모여요. 그런데 이건 옆으로 눕혀서 나르는 물건 같아요.” 도현이 말했다.
유리아는 검은 밀 자루가 실려 나가던 날을 기억한다는 인부를 불렀다. 이름은 펠릭스. 그는 키가 작고 어깨가 넓었다. 손등에는 굵은 밧줄이 긁고 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 자꾸 창문을 살폈다.
“어떻게 옮겼습니까?”
“네 사람이 함께 들었습니다. 너무 무거운 자루가 있었어요. 물기 많은 곡물처럼 출렁거리지 않았고요.”
“무게가 전부 같았나요?”
“아뇨. 넷째 자루는 거의 비어 있었어요.”
“그럼 송장에 각각 쉰 근이라고 적힌 건 잘못됐겠군요.”
펠릭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그날 서명을 했습니다. 들어 올린 사람 이름이 서류에 없으면 임금을 못 준다고 해서. 그런데 다음 주에 제 임금에서 운송 보관료가 빠졌어요.”
도현은 펠릭스가 서명한 종이의 사본을 요청했다. 펠릭스는 자기가 서명한 것이 배송 확인서인지 채무 인정서인지 그때 설명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부두의 인부들에게 얕은 지식으로 계약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직접 겪은 일과 관리인에게 들은 말을 구분해 적었다.
“우리는 기록을 가져가는 대신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남기겠습니다.”
펠릭스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저한테도 사본을 주세요.”
그들은 항만청에서 받은 밀납으로 증언 사본 세 부를 봉했다. 한 부는 유리아가, 한 부는 펠릭스가, 한 부는 루카스가 보관했다. 사본을 나누는 일은 작은 소모품과 시간이 들었지만, 누군가 원본 하나를 빼앗아 모든 말을 지워 버리기 어렵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에스텔은 그 과정을 지켜보다가 도현에게 물었다. “네가 원했던 것은 결국 이런 일이니? 모두를 위해 하나의 큰 마법을 쓰는 대신, 사람들이 말할 자리를 만들겠다는 것.”
“큰 마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때 누구의 목숨을 쓰는지 모른 채 주문부터 외우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펠릭스에게 마르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름만 듣고는 믿지 못하던 인부가, 실제 출입 의사를 확인한 기록까지 보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런 사람이 정말 있어요? 창고에서 나오고도 또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보리죽을 먹고 내일은 빵을 구울 사람입니다.”
펠릭스는 얼굴을 가렸다. 도현은 그의 어깨를 잡지 않았다. 울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대로 두기로 했다.
썰물은 해가 완전히 진 뒤 시작됐다. 검은 물이 서서히 밀려나자 방파제 아래 사각형 돌기둥들이 드러났다. 저 멀리 창고의 커다란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그 기초를 받친 돌벽 사이에는 사람이 겨우 지날 틈이 있었다. 유리아가 먼저 손을 넣어 조개껍데기를 걷어 냈다. 브론은 뒤에서 계속 귀를 움직였다.
“문 너머에 사람이 있습니까?” 루카스가 속삭였다.
“숨 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물소리만 있습니다. 그런데 발소리처럼 반복되는 게 있어요.”
틈 안쪽은 낮고 어두웠다. 벽에는 오래된 물때가 여러 겹 붙었고, 위쪽에는 새 건물에서 떨어진 소금가루가 하얗게 쌓였다. 도현은 한 손으로 벽을 더듬어 움직였다. 한참 들어가자 바닥에 동그란 철제 뚜껑이 나타났다. 뚜껑에는 열여섯 개의 홈이 있었다.
“이게 자루 창고로 가는 길인가요?” 브론이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도현은 레온의 숟가락을 꺼냈다. 금속 홈에서 희미한 빛이 났지만 열쇠가 맞는다는 표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열지 말고 표면을 확인합시다.”
유리아가 천에 묻힌 흑연으로 뚜껑의 문양을 떠냈다. 열여섯 홈 사이에는 각기 다른 작은 표시가 있었다. 밀 이삭, 가위, 반죽 칼, 오븐 삽. 모두 조리 도구였다. 하지만 한 홈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사라진 요리사 열여섯 명과 맞지 않습니까?” 브론이 목소리를 낮췄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요리사들의 무덤인지, 작업 도구를 보관한 자리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때 윗부분에서 쇠사슬 끄는 소리가 들렸다. 브론이 귀를 바짝 세웠다. 유리아는 등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물었다.
“이번에도 포대를 사람이라고 적을 겁니까?”
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니. 사람은 비싸고 포대는 싸. 이번에는 포대라고 적어야 해.”
루카스가 손가락으로 모두를 멈췄다. 도현은 천장 틈으로 보이는 그림자를 살폈다. 사람 둘이 수레를 밀고 지나갔다. 한 사람은 목에 은빛 표찰을 달았고, 다른 사람은 손에 붉은 잉크병을 들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뒤 유리아가 바닥에 귀를 댔다. “위쪽에 빈 포대를 쌓는 모양입니다. 자루들은 이미 나갔나 봐요.”
도현은 흑연으로 떠낸 문양을 보관 봉투에 넣었다. 그 순간 철제 뚜껑 아래에서 작은 종이 올라왔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뚜껑이 한 치쯤 들린 것이다. 아래에는 밀가루가 아니라 하얀 소금 결정이 가득했다. 결정 틈새에 검은 머리카락 한 올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에스텔이 마력을 비추자 결정 속에서 문장이 떠올랐다.
[운송 대상: 증언 보관 단위 16.]
[생체 탑승 여부: 별도 장부 참조.]
[포대 실물: 현재 위치 미확인.]
브론이 숨을 내쉬었다. “사람 열여섯이 들어 있던 건 아니군요?”
“적어도 이 기록은 사람 수송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오히려 증언을 물건으로 분류했다고 적혀 있어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뚜껑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오래된 식권처럼 폭이 좁고 새하얀 종이였다. 거기에 이름 두 개가 적혀 있었다. 하나는 엘마, 다른 하나는 오도.
노라의 어머니와, 북부에서 기록만 발견했던 조리사. 도현은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종이 아래 작은 글씨가 있었다.
[위 이름은 증언 보관 표식이며 현재 생존 여부를 증명하지 않음.]
그는 그 줄까지 읽고 종이를 접었다. 실종된 사람을 찾는 마음이 커질수록, 확인되지 않은 희망을 사실처럼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철제 뚜껑을 덮으려는 순간 브론이 멈칫했다. 그는 소금가루 사이에서 자신의 발자국과 다른 무늬를 보았다. 아주 작은 둥근 홈들이 여러 개 이어져 있었다. 사람의 신발자국은 아니었다. 바닥을 굴러간 수레의 바퀴 흔적일 수도 있고, 소금 자루가 쓸리며 만든 자국일 수도 있었다.
“소리가 안 나게 짐을 옮기려면 어떻게 하죠?” 브론이 물었다.
유리아가 손으로 벽을 짚었다. “나무 수레를 쓰면 바퀴가 돌을 울려요. 대신 바닥에 천을 깔고 끌 수도 있죠.”
도현은 작은 홈 한 줄을 그렸다. 무게를 숨기려는 사람이 어떻게 기록을 바꾸는지 알 수 없어도, 어떻게 짐을 끌고 다녔는지는 흔적에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는 표면에 남은 것을 함부로 긁지 않고 손으로 빛만 가렸다. 그림자를 바꾸자 바퀴처럼 보이던 자국이 납작한 홈으로 드러났다.
“직접 보신 흔적과 우리가 추정한 운송 수단을 나눠 적읍시다.”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의 물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고, 이제는 돌아갈 때였다.
돌아가는 길에는 물이 예상보다 빠르게 차올랐다. 유리아가 앞에서 길을 잡고 루카스가 뒤에서 밧줄을 걸어 한 사람씩 움직였다. 브론은 젖은 털을 털 틈도 없이 올라왔고, 에스텔은 소금 결정 하나가 신발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결정 속에서 또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
[증언 보관 단위 중 1건, 서명 회수 요청 접수.]
[회수인: 기록 없음.]
누군가 자기 목소리를 되찾으려 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어디에서 신청한 것일까. 도현이 질문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소금 결정이 바스러졌다. 흰 가루가 손바닥에 남았다.
그날 밤 도현의 장부에는 열여섯이라는 숫자 옆에 새로운 단어가 적혔다.
[열여섯 자루: 증언 운송 기록과 연결. 실종자 직접 이동은 미확인.]
그 문장을 끝내자마자 창고 쪽에서 한밤중에 울릴 리 없는 출항종이 두 번 울렸다.
제4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