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덴의 아침은 종소리가 아니라 도마 소리로 시작됐다.
공동 부엌 앞에서 네린이 양파를 썰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처마가 낮게 젖었고, 창고 한쪽에는 햇빛을 쬐려 꺼내 놓은 보리 자루 세 개가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검은 밀밭이 멈춘 뒤에도 마을의 부엌은 갑자기 넉넉해지지 않았다. 누군가 먹어야 할 아침은 여전히 매일 찾아왔다.
백도현은 양파 냄새를 맡으며 밀가루 묻은 손으로 편지 봉투를 펼쳤다. 왕도에서 도착한 지도였다. 왕실 구호위원회가 남긴 서부 항구의 거래 기록에는 '하얀 식탁' 문양이 찍혀 있었다. 제3 소금 창고에서 최근 반출된 검은 밀 자루 열여섯 개. 돌아오지 못한 요리사도 열여섯 명이었다.
“이 숫자, 일부러 보여 준 거 아닐까요?” 브론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죠.” 도현이 대답했다. “자루 열여섯 개 안에 사람이 열여섯 명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브론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래도 사람이 안 들어 있다는 건 확인해야겠죠?”
“그건 맞습니다.”
에스텔은 그들의 옆에서 지도의 모서리를 눌렀다. 오래된 종이에는 서쪽 해안선이 오늘날 지도와 조금 다르게 그려져 있었다. 항구가 확장되기 전, 짠물이 밀려오는 갯벌 위에 작은 제방이 하나 있었다. 그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 세 개가 창고를 뜻했다.
“이 지도는 십오 년 전 것이야.” 에스텔이 말했다. “제3창고는 지금의 세 번째 건물이 아닐지도 몰라. 이름은 유지하고 건물만 옮겼을 가능성도 있어.”
“언제부터 항구 지도를 이렇게 잘 아셨습니까?”
“처음 구호 곡물을 들여오던 때, 왕실이 바다의 소금을 계약 보존재로 썼어.”
도현은 그녀를 봤다. 에스텔은 변명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당시엔 문서를 오래 보존하려는 수단이라고만 들었어.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서명이 필요하다고.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의 시간이 그곳에 쌓였을 가능성이 있지.”
“그때 직접 보신 건 뭡니까?”
“하얀 소금 위에 놓인 검은 빵.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이름표.”
“추측은 별도로 적겠습니다.” 도현이 수첩을 폈다.
그는 목격한 것과 나중에 들은 것을 나눠 적었다. 예전 같았으면 에스텔의 말 한마디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부에서 배운 것은 분명했다. 잘못 적은 한 줄 때문에 사람이 수천 번 같은 날을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부엌 뒤쪽에서는 마르타가 의자에 앉아 비가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린이 먹다 남긴 죽을 치우려 하자 그녀는 그릇을 붙들었다.
“조금만 더 둘래요.”
“식으면 맛이 없을 텐데요.”
“식는 게 좋아서요.”
마르타는 미지근해진 보리죽을 한 숟갈 떠서 입안에 넣었다. 갇혀 있던 화덕에서는 모든 음식이 늘 같은 온도였다. 차가워지는 죽 한 그릇이 그녀에게는 시간이 흐른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다.
도현은 마르타에게 서쪽 항구의 노래를 다시 물었다. 질문은 세 번으로 줄여 준비했다. 무엇을 들었는지, 언제 들었는지, 누가 불렀는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은 알 수 없다고 답해도 된다고 먼저 말했다.
“여자 목소리였어요. 물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같이 났고요. 아침 종이 울리기 직전에 끝났어요.”
“몇 번 들으셨습니까?”
마르타는 눈을 감았다. “그게 어려워요. 제게는 같은 날이 열두 번도, 백 번도 아니었으니까.”
도현은 질문을 고쳐 적었다. ‘반복된 날마다 관찰’이라고 쓰려다가 지웠다. 마르타가 모든 날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한 번 이상. 횟수 미확인.”
마르타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적으니까 마음이 편하네요.”
그녀는 잠시 뒤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노래가 끊긴 뒤에는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났어요. 저는 그게 보리 자루를 끄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확신은 없어요.”
브론이 귀를 쫑긋했다. “사슬 소리와 자루 끄는 소리는 다릅니다. 바닥이 돌이면 특히요.”
“항구에 가면 네가 구분해 줘야겠네요.”
“제가 드디어 전문적으로 쓸모가 생겼군요!”
도현이 쳐다봤다. “그릇 안 깨는 일도 전문적으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브론의 귀가 축 늘어졌다.
도현은 일행이 떠날 준비를 하는 사이 마을의 저장 창고도 살폈다. 창고를 지키던 테오는 바닥에 여섯 개의 선을 긋고 있었다. 이번 주에 필요한 곡물과 실제 남아 있는 곡물을 나눠 세는 선이었다. 넉넉히 잡으면 일주일이었고, 아이들에게 죽을 조금 더 퍼 주면 나흘도 채 남지 않았다. 북부의 불합리한 계약을 멈추는 것과 먹을 것을 구하는 문제는 서로 떨어질 수 없었다.
“왕도에서 오기로 한 구호 수레는요?” 도현이 물었다.
“진흙길에서 늦어지고 있습니다. 공주님 쪽에서 정식 운송 허가를 받았지만 구호위원회가 바퀴를 고쳐 주는 건 아니니까요.”
테오는 웃어 보였으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눈이었다. 그가 전에는 허위 배급 기록을 적는 일이 생계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도현도 알고 있었다. 죄책감만으로 먹을 것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됩니까? 우리가 서쪽에서 곡물 공급선을 찾으면 어떤 수량이 필요한지 정확히 보내 주세요. 필요한 사람이 많은 건 알겠는데, 숫자는 증빙이 있어야 운송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작성하겠습니다.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고, 당장 수프를 먹어야 하는 환자 수도 적죠.”
“단, 사람을 다 계산한 뒤에는 빈칸도 남겨 주세요. 행정 명단에 없는 사람이 올 수도 있으니까.”
테오는 잠시 손에 든 분필을 내려다봤다. “예전 장부는 빈칸을 싫어했어요. 빈칸이 있으면 아무 이름이나 채우라고 했으니까. 이번에는 빈칸도 그대로 둘 겁니다.”
창고를 나오는 길에 노라가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따라왔다. 안에는 엘마가 쓰던 빵 틀과 가장자리만 남은 헝겊이 있었다. 그녀는 틀은 자신이 보관하고 헝겊의 무늬만 떠 가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도현은 천 조각의 두 번 접힌 모서리를 그림으로 옮겼다. 누군가 엘마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내밀더라도 그 이름과 물건을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를 꼭 데려오라고 하는 말은 안 할게요. 대신 거기서 누가 사라진 사람이라고 말하면 왜 그렇게 말하는지 물어봐 주세요.”
도현은 그 부탁이 무거워서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반드시 물어보겠습니다. 대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묻지 않은 것처럼 돌아오진 않겠습니다.”
점심 무렵 루카스가 말을 타고 돌아왔다. 북부 제분소에서 보존한 허위 장부의 사본을 왕도에 보내고 온 길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장화를 벗고 부엌에 들어섰다. 신발 밑창에는 검은 진흙이 두껍게 붙어 있었다.
“왕실 공식 조사 인장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일린 전하께서 서쪽 항구 접근을 위한 공문을 보내셨습니다. 다만 왕실 산하 항만청의 협조는 보장하지 못합니다.”
“공주님은 왕도에 남습니까?”
“왕국의 식탁 저주가 진행 중입니다. 왕실 식탁을 떠나는 일에도 위험이 있습니다. 전하께선 베네딕트 주방장과 왕도 납품 기록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루카스는 공주의 편지를 내놓았다. 안에는 간결한 문장이 있었다. 증빙 없는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 그 문장은 공주 자신의 저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떠날 사람을 정하는 회의에서 한 번 언성이 높아졌다. 테오는 루카스까지 데려가면 루덴의 허위 장부를 누가 보호하느냐고 물었다. 루카스는 왕실 공문을 다루는 데 자신의 신분이 필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느 말도 틀리지 않았다.
마르타는 서로 말을 끊는 두 사람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남는다고 여러분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 혼자 방에 갇혀 있을 때와는 다르잖아요. 네린도 있고 노라도 있어요. 결정은 제가 했어요.”
그 말이 나오자 테오가 먼저 사과했다. 그는 검은 밀밭의 화덕을 생각하면 누군가를 또 홀로 두는 일이 두려웠다고 했다. 마르타는 그 두려움을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 때문에 자신의 결정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도현은 마르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명확하게 적었다. 식당의 주인이 누구인지 시험받으면서도 그는 아직 이런 문장을 배우고 있었다. 돌아온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환대는 그를 다시 감시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었다.
저녁 무렵 출발 인원을 정했다. 도현과 에스텔, 브론, 루카스는 항구로 향한다. 마르타는 루덴에 남기로 했다. 아직 시간의 흐름에 적응할 일이 많았고, 그녀가 직접 선택한 결정이었다. 네린과 테오, 노라가 증언 자료를 보존하기로 했다. 핀은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낡은 밀가루 자루 조각을 도현에게 건넸다.
“만나면 아버지한테 이걸 보여 주세요.”
“만난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
“알아요.” 핀이 말했다. “그래도 누가 찾고 있다는 건 알아야 하잖아요.”
도현은 천 조각을 받아 수첩에 끼웠다. 엘마와 오도, 핀의 아버지는 아직 확인된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 이름들을 무사하다는 희망으로 바꾸는 일만큼은 삼가기로 했다.
마차가 떠나기 직전, 마르타가 도현을 불렀다. 그녀는 손 안에서 식어 가던 작은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눴다.
“길에서 드세요. 제가 오늘 처음으로 스스로 굽는 시간을 정한 빵이에요.”
“감사합니다. 얼마 드리면 됩니까?”
마르타가 한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선물인데 계산부터 해요?”
“요즘은 공짜라는 말에 좀 민감해서요.”
“그럼 선물로 받겠다는 대답만 주세요.”
“기꺼이 받겠습니다.”
마차는 진흙길을 돌아 서쪽으로 향했다. 루덴의 굴뚝에서 희미한 연기가 솟았고, 공동 부엌 앞 의자에는 마르타가 앉아 있었다. 도현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뒤를 돌아봤다.
밤이 되자 그는 가방 속에서 레온의 쇠숟가락을 꺼냈다. 일곱 홈 가운데 두 개가 옅게 빛났다. 그 위로 낯선 글씨가 떠올랐다.
[서부 항로 조사 접수.]
[미정산 통지의 수신 위치: 하얀 식탁.]
[주의: 항구에서는 사람보다 물품이 먼저 도착한 것으로 기록될 수 있음.]
“그건 북부에서도 해 봤잖아요.” 도현이 중얼거렸다.
숟가락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잡이 끝에서 작은 소금 알갱이 하나가 굴러 나왔다. 소금은 마차 바닥에 떨어지자 그대로 검은 글씨가 되었다.
[첫 수령자 확인 전까지 포대를 열지 말 것.]
도현은 그 문장을 수첩에 베꼈다. 바다에서 먼 북부의 마차 안에 소금이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더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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