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이 처음으로 사람을 살린 날은 마법을 배운 지 삼 년째 되는 겨울이었다.
그녀는 그때의 자신을 오래도록 영웅이라고 믿고 싶었다. 스승에게 배운 약초를 달이고, 아픈 아이의 이마를 짚고, 얼어붙은 손을 녹이는 일이 기근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루덴의 첫 화덕 앞에서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구호의 따뜻함만이 아니었다.
화덕 입구에는 밤사이 얼어붙은 물이 남아 있었다. 에스텔은 거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마녀가 된 이후 모습이 바뀌지 않았어도, 그녀의 눈에는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사라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불로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면 더 오래 숨어 있었을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고개를 저었다. 답을 대신 말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날 도망친 뒤에도 돌아보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내가 한 말 중 가장 큰 거짓말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이야.”
도현은 그녀를 바로 바라봤다. 브론은 가만히 서 있었고 루카스는 조용히 기록지를 펼쳤다.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에스텔을 대신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계약을 맺을 때 후손의 시간을 담보로 한다는 조건은 없었어.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다음 날 문서가 바뀌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침묵했지.”
“왜요?”
“두려웠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손바닥의 검은 선이 가늘게 뻗었다.
당시의 첫 식사는 초라했다. 낡은 솥 두 개, 깨진 접시 열일곱 개, 빵을 기다리던 아이들. 기근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보관하던 씨앗까지 삶아 먹고 있었다. 에스텔은 설익은 죽을 조금이라도 먹기 좋게 만들려고 쓴 풀을 뿌렸는데, 그날만큼은 아이들이 그 맛에 웃었다. 그녀는 그 웃음이 평생 이어질 거라고 믿었다.
왕실 구호위원은 그때 늦은 오후에 나타났다. 깃털이 꽂힌 모자와 붉은 인장을 지닌 중년 남자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다. “왕실이 곡물값을 대신 지급할 것이오. 이 겨울이 끝나기 전 누구도 굶지 않게 하겠소.” 환호가 터졌다. 아이를 안고 있던 어머니들은 울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텔은 문서의 글씨를 한 번 더 읽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녀는 크게 소리 냈다. ‘대금 지급자: 왕실 구호위원회.’ 마을 사람들은 그 말에 안도했다. 원래는 마을이 돈을 갚아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름 모를 상인이 에스텔에게 작은 숟가락을 건넸다.
“증언은 시간이 흘러도 남아야 합니다. 다음 식탁에서 이 숟가락을 들고 같은 말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때 에스텔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도 사실을 말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숟가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온에게 넘어갔고, 마침내 백도현의 손에 들어갔다. 작은 쇠붙이가 수백 년 동안 남아 있는 이유가 그제야 떠올랐다.
당시 마을 아이들 가운데는 음식을 받지 않겠다고 버티던 아이도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를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상인은 오히려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아이가 식탁 아래로 그릇을 밀어 넣자 상인의 미소가 처음으로 굳었다. 에스텔은 그 표정을 보았고, 나중에야 그것이 중요한 장면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두 가지 있었어.”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 하나가 거부했고, 상인은 그 아이에게 다른 음식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대신 이름을 묻더군. 아이가 말하지 않으니 왕실 구호위원이 끼어들었고. 그 뒤의 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도현은 그 장면도 증언으로 남겼다. 에스텔의 기억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최초 수령 거부 기록과 연결되는 실마리였다. 누군가의 이름을 확인하지 못하면 빵을 굽지 않는다는 원래 규칙은 그날에도 작동했던 것이다.
그날 밤 상인은 사라졌고, 마을에는 이상한 풍요가 찾아왔다. 비어 있던 그릇에 음식을 담을 수 있었고, 아이들은 사흘 만에 울음을 그쳤다. 왕실 구호위원은 마을 한가운데서 공식 문서를 낭독했다. 계절이 끝나면 왕실이 대금을 치른다는 문장은 사라지고, 수혜자의 다음 세대가 식사를 갚는다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에스텔이 항의하자 남자는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기근 구호 지속 조건: 입회인의 증언 철회.]
“서명을 취소하면 구호를 중단하겠다는 거였어. 그때 나는 아이들이 다시 굶는 게 두려워서 입을 다물었어. 내가 침묵하면 잠시라도 식사를 계속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 결과가 지금의 장부군요.”
“그래. 그때부터 사람들은 음식을 받을 때 자기 이름을 내야 했어. 처음에는 겨울 한철이라고 했지만 봄이 와도 끝나지 않았지. 레온은 그 이상함을 깨닫고 원본을 찾으러 갔어. 나는 그를 도왔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다시 겁을 냈어.”
도현은 그 말을 듣고 예전 제7조리실에서 만난 레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시간이 멈춘 부엌 안에 남아 있었다. 사람을 대신해 끝없이 요리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지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시작에 에스텔의 침묵이 연결되어 있었다.
“레온은 당신을 원망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모르겠어.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약속을 썼다면 그걸 증명하라는 거였어. 그런데 난 증명하지 못했지. 그 대신 가게를 지키는 것만으로 뭔가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였어.”
도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모든 사정을 들었다고 에스텔의 잘못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왜 이 식당에 그녀가 남아 있었는지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같이 일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에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알아.”
“다만 지금 필요한 건 당신이 실제로 본 것과, 나중에 숨긴 것을 나눠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럴게.”
도현은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천천히 하나씩 질문했다. 문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직접 본 시각, 왕실 위원회의 문장을 읽은 사람, 최초 대금 지급 약속의 증인, 레온이 문서 변경을 의심한 시기. 에스텔이 확실하지 않은 부분에는 ‘기억 불명’이라고 적었고, 앞뒤가 맞지 않으면 질문을 다시 했다.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한참 뒤, 돌벽에 문장이 떠올랐다.
[입회인 진술 완성도: 7/8.]
[남은 질문: 변경된 계약을 누가 보관했는가?]
에스텔은 숨을 들이켰다.
“왕실 구호위원이 가져갔어. 이름은… 카르도.”
그 이름이 나온 순간 화덕의 벽이 흔들렸다. 돌 사이에서 검은 먼지가 쏟아졌고, 손바닥의 흰 상처가 번쩍였다. 도현은 에스텔에게 다가갔지만 그녀가 먼저 손을 들었다.
“괜찮아. 마지막으로 한 말까지 기억해야 해.”
에스텔은 오래전 카르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계약의 원본을 왕실 금고에 보관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물을 건너는 길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죽의 첫 조각을 하얀 접시 위에 올려놓으며 웃었다.
“그는 ‘이 빵은 아직 구워지지 않았으니 아무도 값을 계산할 수 없다’고 했어.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그 빵값을 내기 시작했지.”
“원본을 어디에 보관했습니까?”
“카르도가 들고 간 건 변경된 계약이었어. 진짜 처음 문서는 상인의 손에 남았지. 그 상인은 서쪽 바다에서 왔어.”
도현은 베라가 말한 항구의 하얀 식탁 그림을 떠올렸다. 첫 화덕에서 본 파도 문양과 하나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상인의 정체는 여전히 몰랐다.
돌벽에서 새로운 글씨가 생겼다.
[입회인 증언 완료.]
[변경 승인자: 카르도.]
[변경 승인 권한: 대리 수령권.]
[참고: 원본 제공자의 최종 승인 없음.]
루카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최종 승인이 없다면 이 변경 자체가 무효일 수 있습니다.”
“가능성이 생긴 거죠.” 도현이 말했다. “그걸 확인할 법적 절차와 자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는 에스텔을 바라봤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왜 저를 불러왔는지요.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오래된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한국에서 보았던 골동품 주방 문과 같은 모양이었다.
“레온이 남긴 열쇠야. 이 세계의 조리법을 모르는 요리사가 와야 저주를 다르게 풀 수 있을 거라고 했어. 난 그 말을 믿고 너를 불렀지.”
“그리고 저주를 옮겨 받게 되는 조건은 숨겼군요.”
“네가 도망칠까 봐.”
그 짧은 말은 어떤 변명보다 아팠다. 도현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자기 선택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에스텔의 열쇠를 받지 않았다.
“앞으로는 누구든 여기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끌어들이지 마세요. 저도 포함해서요.”
“약속할게.”
“약속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직접 선택할 수 있게 문을 열어 둬야죠.”
에스텔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몇 백 년 동안 식당에 남아 타인의 저주를 보며 살아왔다. 그러나 누군가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그 사람의 선택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똑바로 마주했다.
브론은 부엌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마녀님, 주방장님. 싸움은 식사하고 하시면 안 됩니까? 저는 화해 메뉴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뭘 만들 건데요?” 도현이 물었다.
“감자에 감자를 곁들이고, 감자를 뿌린 감자 요리요.”
“세상에서 가장 성의 없는 화해군요.”
에스텔은 웃지 못했지만 입가가 조금 풀렸다.
그때 돌벽에 마지막 문구가 나타났다.
[변경 승인자는 현재 북부 채권 압류의 책임 주체로 등록됨.]
[대리 수령권 이전 이력: 카르도 → 북부 특별감사관 베르크.]
도현은 에스텔의 말이 기록과 맞물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쉽게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밝혀질수록 오히려 허락받지 못한 삶을 살게 된 화가 다시 올라왔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서 화를 쏟아내는 것보다 나중에 두 사람이 지킬 규칙을 만드는 편이 필요했다. 도현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을 찾는 일을 앞으로의 조사에서 빼지 않겠다고 조용히 적었다.
그들이 찾던 연결고리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구호위원회의 책임을 밝히는 것과 갇힌 요리사들을 구출하는 일은 아직 별개였다. 도현은 마지막 줄을 장부에 옮겼다. 바로 그때 언덕 아래 마을 쪽에서 종이 세 번 울렸다.
북부의 정산 종이었다.
해 질 무렵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제3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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