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화덕 아래에 숨겨진 의자는 아이가 앉기에는 너무 컸다.
등받이에는 오래된 손톱자국이 있었고, 다리 하나는 짧아서 바닥에 쐐기가 끼워져 있었다. 백도현은 그 의자를 보자 오래전 누군가가 급히 끌어다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장한 왕실 재판용 의자가 아니라, 이웃집에서 빌린 낡은 의자였다. 그 옆에는 깨진 물그릇과 나무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걸 발견한 게 왜 중요한 걸까요?” 루카스가 물었다.
“수령을 거부한 사람의 증언이니까요. 장부가 식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당사자는 받지 않았다고 말한 겁니다.”
에스텔은 의자를 바라보다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 의자, 본 적 있어. 그날 문 앞에 있었어.”
“기억나시는 게 있습니까?”
“나는 약초를 나누느라 안에 들어가지 못했어. 그런데 어린애 하나가 빵을 안 먹겠다고 소리쳤지. 식량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누군가 아이를 꾸짖었고.”
브론이 의자의 냄새를 맡았다. 그의 후각은 아직 불안정했다. 어떤 순간에는 눈앞의 반죽 냄새도 못 맡다가, 어떤 순간에는 오래된 돌 틈에 남은 허브 냄새를 감지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의자에 소금 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 소금만은 아니에요. 눈물도 섞여 있습니다.”
“사람의 눈물 냄새까지 알 수 있습니까?”
“예전엔 그랬습니다. 지금은… 자신 없습니다.”
도현은 확신할 수 없는 관찰도 그대로 기록했다. 브론의 후각이 돌아온다고 해서 그의 말이 언제나 증거가 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의자의 다리 안쪽에 끼워진 종이 조각을 먼저 보았다. 나무패가 지시한 대로, 누군가 남긴 말이 적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종이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나는 내 빵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글씨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획마다 힘이 다르고 어떤 글자는 거꾸로 쓰여 있었다. 에스텔이 손을 대려 하자 도현이 멈췄다.
“이걸 읽으면 기록이 재생될 수 있습니다. 듣는 대가가 있는지부터 확인합시다.”
루카스는 복도에서 가져온 계약 안내문을 다시 펼쳤다. 현재 규약에는 원본을 읽는 행위 자체로 채무를 이전한다는 문구가 없었다. 다만 증언을 실제 식사로 등록하는 마법이 숨어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도현은 먼저 나무패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읽을 것이며, 어떤 식사도 제공받거나 제공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무패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때 오래된 의자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먹으면 엄마가 끌려간대.”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만 돌벽 사이에서 흘렀다. 누군가 불안한 아이를 달래듯 말하는 소리도 이어졌다.
“그런 건 없어. 그냥 한 입만 먹어.”
“거짓말. 어른들이 다 그러다가 없어졌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의자가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실제 의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과거에 남은 음성이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내 몫은 아무한테도 주지 마. 내가 싫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끊기자 의자 등받이에서 작은 기호 하나가 나타났다. 두 줄의 선과 그 가운데 원이었다. 도현은 기호를 복사해 테오에게 보낼 기록에 붙였다.
“아이가 실제로 저주를 거부한 증거가 되겠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직접 살아 있는 증언은 아닙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하지만 기록이 이 말을 일부러 남겼다면 바꿀 수 없는 원본이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식사표에는 아이의 이름이 없었다. 그런데 낡은 의자에 남은 음성은 특정한 사람의 것이었다. 이름을 지워야 후손에게 대가를 넘길 수 있는 구조라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신원을 없애 버렸을 것이다.
브론이 의자 밑을 긁었다. 그곳에는 밀가루와 진흙이 굳어 있었다. 손끝에 작은 금속 조각이 걸리자 브론은 으르렁거렸다.
“이건 제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납니다.”
“소리가 난다고요?”
“아뇨, 제 귀에는요. 쇠가 떨릴 때마다 벌레처럼 울어요.”
금속 조각은 크기가 작았다. 파도와 밀 이삭 문양 사이에 아주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원본 열람 보조 표식.]
루카스가 그것을 보았다. “베르크의 열쇠와 같은 부류입니다. 하지만 권한이 다른 것 같습니다.”
한동안 누구도 의자에 손을 대지 않았다. 오래된 목소리는 끝났지만 방에는 아직 아이의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브론은 접시 하나를 바라보다 뒤늦게 숨을 내쉬었다.
“어른들이 아이한테 했던 말이 제일 무섭네요. 먹으라고요. 그 한마디가 나쁜 말일 리는 없는데.”
“좋은 의도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죠.” 도현이 말했다.
루카스는 의자 옆 벽면의 균열을 따라 손전등 같은 마법구를 움직였다. 돌 안쪽에는 글씨가 아니라 움푹 패인 홈이 있었다. 누군가 뾰족한 물건으로 수차례 같은 자리를 긁은 흔적이었다. 에스텔이 그 위에 얇은 종이를 붙여 문질렀다. 검은 선이 세 번 겹치더니 '그릇을 돌려주었다'는 오래된 문장이 드러났다.
“음식을 거부한 뒤 그릇도 돌려줬다는 뜻이네요.” 루카스가 말했다.
“반납 기록이 따로 있다면 수령 사실과 구분되겠죠. 이 흔적이 그 기록인지 확인은 더 필요합니다.”
그들은 의자의 아래쪽을 살폈다. 바닥에 남은 작은 손자국은 의자의 손톱자국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었다. 그 주변에는 한때 붉은 천이 묶였던 흔적이 있었다. 에스텔은 그것이 구호받는 아이에게 주던 신호 천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전 풍습은 지역마다 달랐고, 지금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도현은 손자국을 보고 한국에서 어린 조카에게 식사를 해주던 때를 떠올리려 했다. 그 기억 역시 바람에 젖은 종이처럼 흐릿했다. 손목의 검은 선이 조금 더 올라왔다. 그는 즉시 브론을 불렀다.
“제가 방금 무슨 얘기 했는지 따라 할 수 있습니까?”
“먹지 않은 빵이 빚이 되면 안 된다고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묻는 건 조금 전 제 말입니다.”
브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말을 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런 혼동이 커지면 언젠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는지조차 잊을지 모른다. 그는 불안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장면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기록을 동료에게 공유하고 증상이 악화되면 화덕 앞에서 쉬겠다는 구체적인 규칙이 필요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도 용기가 들었다.
그런 작은 혼동은 타인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는 수첩에 현재 시간과 증상을 적었다. 위기를 해결해 가는 동안 자기 안의 위험도 잊어서는 안 됐다.
브론은 발걸음을 옮기려는 도현의 곁에 섰다. “주방장님, 가끔 제 냄새가 돌아오지 않아 화가 납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음이 좀 낫네요. 주방장님도 잊으신 건 같이 기억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도현은 그 말에 대답 대신 브론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때 천장에서 마르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표식을 쓰면 안 돼요.”
도현은 올려다봤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분명했다. 반복 노동이 멈춘 뒤 마르타는 가끔씩 외부와의 시간차를 맞춘 듯 대답했다.
“마르타 씨, 지금 어떤 상태십니까?”
“화덕 앞이 아니에요. 오늘은 이상하게 방 안이 넓어요. 사람들이 저를 찾는 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이 거기서 직접 말하고 있는 겁니까, 기록입니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 질문을 알아들을 수 있어요.”
도현은 그녀에게 의자를 설명했다. 마르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첫 빵을 거절한 아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전해졌어요. 요리사들이 작은 부엌마다 돌아가면서 노래처럼 외웠죠. ‘먹지 않은 사람에게 빚을 매기지 말라.’ 그런데 그 말을 할 때마다 화덕이 꺼졌어요.”
“계약이 그 문장을 싫어한 겁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노래를 다른 말로 바꿨어요. 마지막 한 숟갈은 기다리는 사람의 것이라고.”
도현은 에스텔을 보았다. 리아가 불렀고 마리아가 기억하던 노래와 이어졌다. 사라진 요리사들이 오랫동안 서로에게 남긴 신호였던 것이다.
마르타는 갑자기 낮게 말했다.
“당신들이 원본을 바꾸려고 온 거라면 말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제 이름으로 빚을 대신 갚아 주지는 마세요. 전 나가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이 갇히는 건 싫습니다.”
“알겠습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대신 당신이 받을 돈부터 찾아보겠습니다.”
“받을 돈이요?”
“열두 해도 넘게 일하셨는데 임금 내역이 없잖아요. 시간은 돌려드릴 수 없더라도 정당한 대가를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마르타는 웃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 웃음은 곧 천장에 흩어졌지만 도현은 그 소리를 잊지 않으려고 장부에 작은 별표를 했다.
루카스는 증언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마르타의 목소리가 현재 응답으로 들린 시각도 함께 기입했다. 똑같은 말이라도 언제 들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었다. 도현은 브론에게 기록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놓친 부분은 없었는지 동료에게 확인받는 일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의자의 나무패가 완전히 열렸다. 안쪽에는 아주 오래된 목록의 첫 줄이 있었다.
[첫 번째 거부자는 원본 계약의 수령자가 아니므로, 그의 후손에게 대가를 청구할 수 없음.]
두 번째 줄에는 지워진 이름 대신 ‘증언자’라는 글씨가 남아 있었다. 도현은 글씨가 사라지기 전에 베껴 적었다.
루카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 한 문장이면 모든 후손의 채무를 무효로 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닙니다. 이건 한 사람의 거부를 증명하는 문장입니다. 모든 사람의 사정은 다르죠.”
“그래도 원본이 후손에게 무조건 청구할 수 있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네요.”
“맞습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그들이 방에서 나가려는데 에스텔의 손바닥에 있던 흰 상처가 다시 검게 변했다. 이번에는 글씨가 또렷하게 나타났다.
[입회인 에스텔. 최초 약속을 기억했으므로 미청산 증언 1건 활성화.]
그리고 아래쪽에 더 작은 문장이 따라붙었다.
[입회인이 증언을 완료하면 변경 승인자의 이름을 열람할 수 있다.]
에스텔은 무서워하는 대신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말할 거야.”
제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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