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구한다는 사람은 자주 중요한 사실을 잊는다.
그 사람이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말이다.
루덴의 밤에는 다시 서리가 내렸다. 막 지붕을 수리한 공동 부엌의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와 사람들이 옷깃을 여몄다. 왕도에서 보낸 정상 곡물은 며칠분밖에 남지 않았고, 불탄 제분소의 옛 창고에는 빗물이 차 있었다. 노라는 젖지 않은 콩을 골라 작은 항아리에 담았고, 네린은 마을 농가에서 가져온 감자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감자에는 흙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브론은 감자 한 알을 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저주가 걸린 채소 같습니다.”
“왜요?” 도현이 물었다.
“너무 못생겼어요.”
“거울을 볼 때도 그러십니까?”
브론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감자를 씻으러 갔다.
식량이 부족한 밤에 도현이 선택한 요리는 감자 수프였다. 크림도 버터도 충분하지 않았으니, 감자를 얇게 썰어 볶은 뒤 양파와 마른 허브를 넣어 오래 끓이기로 했다. 그는 네린에게 남은 재료를 확인하도록 했고, 노라에게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그릇 수를 물었다.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수프의 농도를 조절해야 했다.
“맛이 좀 밋밋하지 않을까요?” 네린이 걱정했다.
“처음부터 소금 많이 넣지 마세요. 감자 전분이 풀어지면 혀에 닿는 느낌이 달라집니다.”
“주방장님은 정말 맛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시는군요.”
“그게 원래 제 일이었거든요. 요즘은 요리보다 장부를 더 많이 들여다보지만.”
그는 나무주걱으로 냄비를 저었다. 따뜻한 김이 얼굴을 스쳤다. 손목의 석화 자국이 순간 시큰해졌지만, 무리해서 저주를 옮길 요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안심되었다. 어릴 적 어머니와 부엌에서 서 있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를 듯하다가 사라졌다. 도현은 잠시 주걱을 멈췄다.
“주방장님?”
“괜찮습니다.”
그는 곧바로 에스텔에게 말했다. “방금 기억이 하나 더 흐려졌습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어요. 저녁에 기록을 같이 봐 주세요.”
에스텔은 얼굴을 굳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수프를 젓는 일을 도왔다. 그 조용한 동작이 사과처럼 느껴졌다.
마을 회관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핀은 아이들과 함께 접시를 옮기고 있었고, 제분소 화재 때 다친 젊은 농부는 한쪽 팔을 붕대로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도현은 그 농부에게 일을 돕지 않아도 먹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농부는 자신이 맡은 그릇을 세겠다고 고집했다.
“그럼 원하시는 만큼만 하세요. 대신 아프면 바로 쉬십시오.”
“쉬면 내일 배급표에서 빠지는 건 아니겠죠?”
그 말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두려움이었다. 도현은 대답 대신 오늘 공동 부엌의 운영 방침을 가리켰다. 식사를 조건으로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문제는 불이었다. 젖은 장작이 충분히 마르지 않아 한쪽 화덕이 꺼졌고, 다른 화덕은 불길이 너무 세서 냄비 바닥이 눌어붙기 시작했다. 브론이 황급히 냄비를 들어 옮기다가 몸을 비틀었다.
“뜨거워요!”
“당연하죠. 냄비인데!”
도현은 헝겊을 두 겹으로 접어 손잡이를 감쌌다. 눌어붙기 시작한 수프를 억지로 긁어내면 탄맛이 전체에 퍼진다. 그는 윗부분만 조심스럽게 다른 냄비로 옮기고 바닥에 남은 부분은 따로 식혔다.
“버리는 거예요?” 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먹을 수 없는 건 억지로 먹게 할 수 없어. 대신 다음번엔 불 조절을 잘해서 이런 일이 안 생기게 해야지.”
“아깝잖아요.”
“맞아. 그래서 기록하는 거야. 버린 양을 숨기면 내일 또 같은 실수를 하거든.”
핀은 자기가 적어 놓은 재료표 한쪽에 ‘수프 냄비 한 바닥 손실’이라고 썼다. 글씨는 삐뚤었지만 그는 진지했다. 테오가 슬쩍 다가와 문장을 고쳐 주려 했으나 도현이 손짓해 말렸다. 틀린 맞춤법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 실제로 일어난 일을 남기는 것이었다.
도현은 화덕 앞에 서서 잠깐 숨을 돌렸다. 한국에서 주방 일을 할 때는 손님이 남긴 음식도 사진으로 기록해 원인을 분석하곤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실수한 부분을 숨기면 사람의 미래가 청구되었다. 그 차이가 터무니없을 만큼 컸다. 요리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무엇을 만들고 얼마나 나누었는지 함께 책임질 수 있어야 했다.
그때 늙은 농부가 화덕 뒤쪽에 쌓인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젖은 가지는 건조한 방에서 하룻밤 두고, 저기 작은 잔가지는 먼저 태우시오. 예전에는 우리가 직접 이렇게 불을 지폈다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배우겠습니다.”
그는 농부에게 불 조절을 부탁할지 물었고, 농부가 원한다고 하자 그가 쓸 의자와 도구를 마련했다. 도현 혼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늘은 이 마을 사람들이 더 잘 아는 기술이 부엌을 살렸다.
수프가 완성되자 네린이 먼저 맛을 봤다. “생각보다 달아요.”
“감자를 충분히 볶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다들 따뜻할 때 드세요.”
그릇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확인하며 김이 오르는 수프를 건넸다. 빈방 같던 회관 안에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생겼다. 도현은 누가 가장 먼저 그릇을 비우는지 살폈다. 배가 고픈 사람은 예의를 갖출 틈이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식사 규칙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나이 든 행상 여자가 눈보라 속에서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열두 살쯤 된 소년이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의 외투는 해진 데다 소년의 신발은 짝이 맞지 않았다.
“잠시 불을 쬐어도 될까요?” 여자가 물었다.
“앉으세요. 식사도 남았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아이가 낯을 가린다고 했지만 도현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이의 시선이 냄비가 아니라 회관 한쪽에 걸린 배급표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의자를 조금 옮겨 그 표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 두 사람을 안내했다.
“싫으면 먹지 않아도 됩니다. 따뜻한 물부터 드릴까요?”
소년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이름은 베라였다. 남편과 함께 여러 마을을 돌며 소금과 천을 팔았다고 했다. 그러나 두 달 전부터 소년이 무슨 음식이든 거부했다. 식탁에 놓는 순간 누군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값을 청구하러 올 거라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빵 하나만 먹여도 울기 시작해요. 우리가 어렸을 때 겪은 일 때문인지…”
“어머니가 곁에 있잖아요.” 네린이 위로하듯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베라가 울먹였다.
“아이가 말하는 어머니는 제 어머니예요. 그러니까 이 아이의 할머니죠. 그분이 예전에 왕실 구호식을 받았다가 이름을 빼앗겼거든요.”
회관 안이 조용해졌다. 도현은 소년 앞에 수프를 밀어 놓지 않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 보여도 두려움을 강제로 꺾어서는 안 됐다. 대신 베라에게 물었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모릅니다. 살아 계신지도. 마지막으로 받은 쪽지에는 ‘값을 대신 내러 간다’고 써 있었어요.”
소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먹으면 또 누군가 사라지잖아요.”
도현은 그 말을 듣고 첫 화덕에서 본 기록을 떠올렸다. 셋째 아이가 음식을 거부한 이유와 똑같았다. 그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 수프를 먹는다고 누군가의 시간을 청구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하지만 네가 무섭다면 먹지 않아도 돼. 대신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보여 줄게.”
그는 주방으로 가서 남은 감자, 소금, 말린 허브를 작은 그릇에 담았다. 베라가 가져온 정상 소금의 출처도 확인했다. 사람들 앞에 놓인 장부에는 각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적혀 있었다.
“이건 왕실이 빌려준 미래의 식사가 아니야.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누기로 결정한 음식이지. 그래도 네가 결정해.”
소년은 감자를 한 번 만져 봤다.
베라는 아이 곁에서 손수건을 꺼냈다가 다시 접었다. 누군가 대신 숟가락을 쥐어 주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오래 걸릴 줄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도현에게 눈짓으로 고마움을 전했지만 아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려 주는 일 역시 어른이 할 수 있는 돌봄이었다.
그러더니 그릇 앞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첫 한 숟갈을 먹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엄마한테 빚이 안 생겨요?”
“안 생긴다고 약속한 쪽은 우리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우리가 빚을 요구한다면 우리에게 따져야죠.”
베라는 울다 웃었다. 소년은 수프를 다 먹지 못했지만, 남긴 그릇을 밀어내지 않았다. 도현은 남은 양을 적고 싶어 하던 테오에게 고개를 저었다. 음식이 부족해 남은 양을 기록하는 것과, 아이의 용기를 수치로 평가하는 일은 다르다. 그는 냄비에 남은 수프만 계산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베라가 작은 보자기를 풀었다. 안에는 물에 젖어 가장자리가 뭉툭해진 낡은 손수건이 있었다. 바다의 소금 냄새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손수건 한쪽에는 물결과 밀 이삭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할머니가 사라지기 전 남겼던 겁니다. 이런 표시를 아세요?”
도현은 첫 화덕에서 주운 금속 조각을 꺼냈다. 무늬가 일치했다.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서쪽 항구에서요. 그곳에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온 곡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리고 곡물을 나누어 준 상인은 항상 대금을 나중에 받겠다고 했죠.”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상인의 이름은 몰라요. 하지만 거래 장소는 알아요. 항구의 낡은 소금 창고. 문 위에 하얀 식탁 그림이 있었거든요.”
도현의 장부에 오래된 기록 세 개가 연결되었다. 첫 화덕의 파도 문양, 베르크의 은색 열쇠, 베라가 말한 서쪽 항구의 소금 창고. 모두 같은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위치를 묻기 전에 베라가 손수건을 접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상인이 어머니에게 그랬답니다. ‘곡물이 떨어지면 북부로 가라. 거기엔 아직 굽지 않은 첫 빵이 있다’고요.”
그는 베라의 손수건 무늬를 수첩에 옮기고 원본은 돌려주었다. 소년은 그 사이 그릇을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 도현은 아이에게 어디까지 먹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방앗간의 창틀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따뜻한 수프 냄새가 다시 피어올랐다. 한 번 시작된 식사는 누구의 허락이 아니라 아이의 배고픔만큼 이어지고 있었다.
도현은 따뜻한 수프 냄비를 바라봤다. 오래전 누군가가 굶주린 아이에게 남긴 협박이 지금 또 다른 아이의 밥상을 막고 있었다. 그 말을 끝내려면 빵 하나보다 많은 것이 필요했다.
제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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