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빵을 굽지 못한 장소에서, 아직 구워지지 않은 반죽을 만났다.
백도현은 그 사실이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첫 화덕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사람 한 명이 몸을 돌리기 어려울 만큼 비좁았다. 벽은 매끈한 돌이 아니라 손바닥 자국이 남은 진흙 벽돌로 쌓여 있었다. 오랜 세월 누군가 불을 피우고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한 흔적이었다. 그런데 안쪽에는 따뜻함이 없었다. 화덕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겨울 새벽의 공기처럼 숨이 차가워졌다.
“대체 뭘 구워야 이렇게 차갑습니까?” 브론이 입을 털며 물었다.
“빵은 안 구웠으니까요.” 도현이 대답했다. “약속만 달궜겠죠.”
계단 끝에는 둥근 방이 있었다. 천장에는 검은 밀 이삭이 말라붙어 있었고, 중앙의 화덕 속에는 주먹만 한 반죽이 놓여 있었다. 진흙 접시에는 작은 손가락 자국이 세 개 남았다. 누군가 반죽을 떼어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려다 멈춘 것처럼 보였다. 벽에는 날짜 대신 겨울을 뜻하는 기호와 아침을 뜻하는 기호가 교대로 새겨져 있었다.
에스텔은 입구에 묶은 보랏빛 실을 다시 확인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는 검은 선이 희미하게 뛰었지만 도현은 당장 만지지 말라고 했다. 무엇이 계약의 일부인지 알기 전에는 사람을 구하려다 더 깊이 묶을 수 있었다.
“만지지도 않고 조사할 수 있어요?” 루카스가 물었다.
“요리사는 굽기 전에 반죽을 봅니다. 색과 탄성, 표면에 올라온 기포를 보면 재료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죠. 물론 맛보면 더 빠르지만, 여기선 그 방법이 제일 위험합니다.”
도현은 손전등 대신 에스텔이 띄운 작은 마법구를 이용해 접시를 살폈다. 반죽의 표면은 마르지 않았는데 밀가루는 부풀어 있지 않았다. 정상이라면 반죽 속 효모가 활동한 흔적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표면에는 주름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자국 역시 굳어지지 않은 채 완벽히 유지되어 있었다.
“발효가 멈춘 게 아니에요. 이곳은 반죽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갇혀 있습니다.”
브론이 입을 벌렸다.
“그럼 옛날 빵이 지금까지 신선한 겁니까? 엄청난 기술인데요!”
“가게에서 그거 개발하겠다고 하면 에스텔 씨가 우리 둘 다 쫓아낼 겁니다.”
“시간이 멈춘 크루아상이라니.”
에스텔이 인상을 썼다. “발상이 왜 그렇게 식욕 쪽으로만 흐르니?”
브론은 억울하다는 듯 꼬리를 내렸다. 도현은 웃음을 삼켰다. 이런 실없는 대화가 없었다면 이 방에서 오래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화덕 옆에는 작은 나무판이 걸려 있었다. 오래된 조리 순서를 적은 것처럼 보였지만 첫 줄부터 낯설었다.
[하나, 아직 먹지 않은 자의 이름을 적는다.]
[둘, 내일 먹을 한 끼를 오늘의 식탁에 올린다.]
[셋, 누가 대가를 내는지 증언으로 확인한다.]
[넷, 이름을 확인하지 못하면 굽지 않는다.]
“마지막 줄 때문에 빵이 안 구워졌을까요?” 루카스가 말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이 규칙대로라면 먹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빵은 만들면 안 되니까요.”
도현은 나무판의 뒷면을 보려다 멈췄다. 접시 밑에서 흐린 빛이 올라오더니 마법 글씨가 생겼다.
[미완성 반죽의 최초 수령 예정자: 이름 없음.]
[최초 대금 지급 약속자: 왕실.]
[대금 지급 여부: 기록 누락.]
“약속은 왕실이 했는데 수령자는 이름이 없군요.”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이상하죠. 지금까지는 마을 사람들 이름만 수없이 적었잖습니까.” 도현이 말했다. “정작 최초 계약을 체결한 쪽의 지급 내역은 비어 있습니다.”
에스텔이 접시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날 상인이 자기 자신을 공급자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 같아. ‘내일을 먼저 가져온 사람’이라고 했어.”
도현은 그 표현을 장부에 옮겨 적었다. 공급자가 실재하는 사람인지 마법 계약이 만든 존재인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름을 지어 부르는 순간 그 이름이 사실로 굳어질 위험도 있었다.
도현은 정상 반죽을 만질 때 사용한 작은 나무주걱을 닦아 말렸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브론은 답답하다는 듯 발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밀가루가 똑같다면 그냥 한 번 구워 보면 안 됩니까?”
“제가 저 반죽을 가져다가 빵으로 완성하면 누가 요리한 걸까요? 처음 재료를 준 사람입니까, 아니면 저입니까? 저주가 답을 정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식당에선 그런 걸로 싸우지 않는데요.”
“그래서 평범한 식당이 그립습니다.”
도현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소금통을 꺼냈다. 이 소금은 네린이 왕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반죽에 뿌리지는 않고 접시 바깥에 조금 털었다. 하얀 결정이 돌바닥에 닿았을 때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반면 구석의 옛 반죽은 마치 소금을 피하듯 아주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봤습니까?”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을 싫어하는 겁니까?”
“그렇게 단정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물과 밀가루가 반응하지 않던 반죽이 이 소금에는 반응했습니다.”
에스텔은 오래전 떠올리려던 기억을 더듬었다. “상인은 바다 소금을 식탁에 올리지 않았어. 대신 검은 시럽을 썼지. 짠맛이 필요하다는 말에 자기는 바다에서 왔으니 소금은 충분하다고 웃었어.”
도현은 비로소 이 불완전한 음식이 특정 재료를 피하며 만들어졌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금 한 알로 저주가 해결되는 동화 같은 비밀이라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실험 재료와 반응을 기록했다.
그는 대신 화덕 벽에 난 좁은 구멍을 보았다. 구멍 너머에는 밖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있었다. 그런데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는 실내로 들어와 화덕 주위를 맴돌다가 다시 위로 올라갔다. 불도 없는데 연기가 생기는 이유였다.
“이건 연기가 아닙니다.”
브론이 조심스럽게 코를 들이밀었다. “맞아요. 타는 냄새보다 비 온 뒤 창고 냄새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줄 서 있을 때 나는 냄새가 섞였어요. 젖은 옷하고 빈 그릇 냄새요.”
도현은 연기 안에 흐릿한 윤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린아이 세 명이 작은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첫째는 주머니를 뒤졌고, 둘째는 빈 그릇을 보았으며, 셋째는 화덕을 향해 입을 벌렸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모습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려 할 때 에스텔이 손목을 잡았다.
“기억이야. 실제로 저 아이들이 지금 갇혀 있다는 뜻은 아니야.”
“그렇겠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왜 빵이 완성되지 않았는지는 보여 주는 것 같네요.”
그는 처음으로 비어 있는 접시 하나를 꺼냈다. 그러나 접시를 화덕에 놓지는 않았다. 옆의 작업대 위에 두고 자신의 가방에서 정상 밀가루와 물을 꺼냈다. 네린이 루덴에 가져온 곡물이었다. 그는 작은 반죽을 만들며 말했다.
“저 안의 반죽은 계약의 물건입니다. 우리가 새로 만드는 건 다른 물건이고요. 같은 재료, 다른 약속. 우선 둘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시다.”
밀가루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물을 조금 더 넣자 부드럽게 변했다. 도현은 손바닥 아래로 반죽이 늘어나는 감각을 느꼈다. 맛을 잃어 가는 것이 두려웠지만 손으로 익힌 기술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반죽을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반죽에서 작은 기포가 올라왔다. 그런데 구석의 미완성 반죽에서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두 반죽 사이에 얇은 검은 선이 나타나려다가 끊어졌다.
[신규 반죽 감지.]
[원본 채무 이전 대상인가?]
도현은 즉시 대답했다.
“아니요. 새 반죽에는 별도 재료와 별도 노동이 들어갔고, 저쪽 계약의 음식을 대신 만들겠다고 동의한 적 없습니다.”
검은 선은 바닥에 가라앉았다.
[채무 이전: 성립하지 않음.]
브론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주방장님, 반죽한테도 계약서를 읽어 주셔야 합니까?”
“세상 모든 반죽이 이런 건 아니길 바랍니다.”
도현은 새 반죽을 오븐에 넣지 않았다. 이 장소에서는 어떤 행위가 식사 제공으로 해석될지 모른다. 대신 종이에 실험 내용을 정리하고, 두 반죽의 색과 변화를 그렸다. 정상적인 반죽은 시간이 흐르고 미완성 반죽은 누군가 이름을 대신 넣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실이 내겠다고 했던 값을 후손에게 떠넘기면서 미완성 빵을 완성된 식사로 취급한 거 아닐까요?” 도현이 말했다.
루카스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렇다면 원본에서 최초 지급자의 책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현재 왕실이 후손에게 대가를 승계하도록 만든 근거가 흔들릴 수 있어요.”
그때 계단 위쪽에서 가느다란 종소리가 들렸다. 마르타의 이름표가 도현의 주머니에서 떨렸다. 화덕 벽면에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하나 더해졌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였다. 그녀는 불이 없는 화덕 앞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구워도 되나요? 오늘은 정말 구워도 되나요?”
“마르타 씨?”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말을 걸지 않은 채 기록했다. 바로 앞에 있어도 이것이 그녀의 의식인지 오래된 작업의 재생인지 모른다. 그 차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방의 모든 문구가 뒤집혔다. ‘굽지 않는다’는 문장이 검게 지워지고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현재 적용 규약: 수령자 미기재 시 후손 전체를 수령자로 간주.]
[규약 수정자: 승인 번호 0.]
“번호가 영이라고요?” 루카스가 놀랐다.
“처음부터 권한이 없는 수정자가 고쳤거나, 자신의 흔적을 지운 사람이겠죠.” 도현이 대답했다.
에스텔은 나무판을 짚었다. “그날 왕실 구호위원은 번호가 적힌 인장을 차고 있었어. 번호가 없는 인장을 본 기억은 없어.”
벽의 균열에서 아주 작은 금속 조각이 떨어졌다. 안쪽에는 밀 이삭과 파도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도현은 천으로 조각을 감싸고 임의로 만지지 않도록 표시했다. 그는 먼저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굴뚝 반대편으로 좁은 통로가 뻗었고, 통로 끝에는 오래된 서고 문이 보였다.
문 위에는 붉은 글씨가 있었다.
[변경 전 원본은 첫 번째 손님이 마지막까지 기다린 곳에 보관한다.]
“첫 손님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야겠군요.” 도현이 말했다.
“그 아이들 중 하나일까요?” 브론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먼저 기억부터 확인합시다. 그릇을 들고 있는 사람이 모두 식사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이 계단을 올라올 때 도현의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부스럭거렸다. 방금 전까지 없던 식사표였다. 가운데에는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첫째 아이: 음식 수령 없음.]
[둘째 아이: 음식 수령 없음.]
[셋째 아이: 수령 거부.]
도현은 마지막 줄을 한참 바라봤다. 굶주린 아이가 음식을 거부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최초 계약의 문을 열 열쇠일지도 몰랐다.
제3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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