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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저주받은 식당의 요리사가 되었다 · 31화
PAYLUA ORIGINAL · 제31화

31화. 입회인의 이름

저주받은 식당의 요리사가 되었다 · 5,059자

오프라인 책장
“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아직 말씀하지 않은 겁니까?” 백도현의 질문이 끝났을 때, 언덕에는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루덴 마을 북쪽의 첫 화덕은 어른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설 수 있을 만큼 좁은 돌집 안에 있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흘렀지만 타는 장작 냄새는 나지 않았다. 검은 밀밭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쳤고, 젖은 돌바닥에는 전날 제분소 화재의 그을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에스텔은 도현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분명했다. 낡은 잉크가 아니라 방금 쓴 것처럼 검은 글씨였다. “서명한 적은 있어.” 에스텔의 말에 브론이 귀를 세웠다. 루카스는 칼집을 쥐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언제요?” 도현이 물었다. “첫 기근 때. 아직 이곳이 루덴이라는 이름도 얻기 전이었어. 나는 왕국의 마녀가 아니었고, 약초를 달여 먹이던 견습생이었지.” “그럼 계약 내용을 읽으셨습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내가 읽은 건 사람들에게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음식을 제공한다는 약속뿐이었어. 후손의 식사 시간이 담보라는 말은 없었어.”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에스텔은 돌집 밖으로 나갔다. 아침 햇살이 마을을 비췄지만, 멀리 제분소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는 여전히 검었다. 그녀는 언덕 가장자리의 낮은 돌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돌 위에는 거의 닳아 버린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도현은 읽기 어려운 문자를 따라 손끝을 움직였다. “누구 묘입니까?” “죽지 않은 사람의 묘.” 브론이 곁에서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에스텔은 돌 위에 놓인 마른 꽃줄기를 정리했다. “기근 때 약초를 주던 소년이 있었어. 저기 새겨진 이름은 그 아이의 것이지. 그런데 이후 장부에는 그 아이가 구호 식사를 세 번 받았다고 나와. 실은 마을 밖에서 약초를 캐다가 행방불명된 날이 마지막이었는데.” “죽었다는 증거도 없으면서 무덤을 만들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으면 정말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잊지 않으려고 했어.” 도현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눈을 감았다. 이름을 기억하려는 사람과 기록에서 지우려는 사람이 같은 마을에 살았다. 그 모순을 알면서도 이제야 말하는 에스텔을 무조건 이해할 수는 없었다. 루카스는 묘비 주변의 발자국을 살폈다. 낡은 신발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주민들이 계속 돌을 찾아온 흔적이었다. 그는 수첩에 ‘마을 기억과 공식 지급 기록 불일치 가능성’이라고 적었다.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단정하지 않겠다는 표시도 남겼다. 에스텔은 마른 꽃줄기를 반듯하게 놓았다. “여기가 처음부터 저주받은 땅이었던 건 아니야. 사람들끼리 밥을 나눠 먹고, 겨울이면 서로 문을 두드리던 곳이었지. 그날부터 종소리가 나기 시작했어. 식사 시간이 되면 모두 문밖으로 나와야 했고, 식사를 거절하면 집집마다 검은 표시가 그려졌어.” “그 장면은 직접 보셨습니까?” “네. 그때까지는 내 기억이 선명해.” 도현은 그 대답을 별도로 적었다. 세상에 대한 에스텔의 후회는 사실을 확인하는 출발점일 뿐, 사실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함께 걸어 돌집 안으로 돌아왔다. 돌집 문턱에서 루카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왕궁에서 배운 역사에는 북부 기근을 구원한 왕의 이름만 있었지, 문서를 읽어 준 견습 마녀나 사라진 약초꾼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앞으로 조사 보고서의 첫 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했다. 사건을 해결한 영웅의 이름보다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이름이 먼저여야 한다고, 처음으로 느꼈다. 화덕 아래의 문은 방금 전보다 넓게 보였다. 도현은 두 가지 가능성을 함께 적었다. 최초에 계약이 달랐거나, 에스텔에게 다른 문서를 보여 주었거나. 어느 쪽이든 지금 그녀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종이를 루카스에게 건넸다. “왕실 문서에 입회인이라는 표현은 무슨 뜻입니까?” “계약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계약의 모든 조항에 동의했다는 증명과는 다릅니다. 다만 원본이 위조되면 입회인의 서명이 악용될 수도 있습니다.” 에스텔이 낮게 웃었다. “그걸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네. 내가 여기 남은 이유도.” “잊으셨다고요?” “잊으려 했다는 게 정확할 거야.” 도현은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이세계로 불러왔고, 요리하면 저주가 옮겨온다는 사실을 끝까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살렸다는 이유로 그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말씀해 주셨어야 합니다.” “알아.” “제가 여기 온 뒤에도 말을 못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에스텔은 손바닥을 펼쳤다. 왼손 중지 아래에 가느다란 흰 선이 있었다. 오래된 화상 흉터처럼 보였지만 선은 움직이고 있었다. “서명을 기억하려 할 때마다 이게 조여 왔어. 과거의 장면들이 조각나서, 그날 손을 잡았던 사람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았지.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어. 내가 알고 있는 일부라도 말할 수 있었으니까.” 브론은 묻고 싶은 말을 삼키고 대신 식당에서 가져온 작은 물병을 내밀었다. 에스텔이 물을 마시려던 순간 돌문이 두 번 울렸다. [원본 입회인 확인 필요.] [입회 증언은 사실과 추정을 구분하여 기록할 것.] “문도 증언을 원하네요.” 브론이 말했다. “그런데 왜 제 배에서 소리가 나죠?” “그건 문과 무관합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아침을 두 그릇 드셨잖아요.” “북부에서는 추위가 칼로리를 가져갑니다.” “왕국에서 가장 당당한 도둑이군요.” 잠깐의 웃음이 긴장을 느슨하게 했다. 도현은 평소의 장부를 펴고 두 칸을 그렸다. 왼쪽에는 ‘직접 본 것’, 오른쪽에는 ‘뒤에 알게 된 것’이라고 적었다. 에스텔은 화덕 옆의 낮은 돌에 앉았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마을 아이들이 먹을 게 없었어. 그날 이상한 상인이 찾아와 밀가루 한 포대를 내놓았지. 밀가루는 한 포대였는데 반죽이 끝없이 나왔어. 주민들이 기뻐했지만 상인은 계속 물었어. ‘이 음식의 값을 누가 갚겠느냐’고.” “누가 대답했습니까?” “왕실에서 내려온 구호위원이. 금빛 인장을 가진 남자였어. 그는 겨울 동안의 곡물 대금을 왕실이 내겠다고 했어.” 도현이 펜을 멈췄다. “왕실이요? 지금 장부에는 왕실 수혜자에게 면제라고 나옵니다.”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 적어도 내 눈으로 본 문서에는.” 문 틈에서 아주 약한 빵 냄새가 흘렀다. 도현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향이었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호밀과 비슷하면서도 소금에 젖은 나무판 같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에스텔은 이어 말했다. “나는 글을 조금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서명 전에 뜻을 물었어. 왕실이 값을 낸다는 대목을 읽어 주었지. 그 대목에만 입회인 표시를 했어. 다음 날 다시 찾아갔을 때는 문서가 이미 봉인되어 있었고, 마을은 굶지 않았어.” “그리고 누군가 사라졌겠죠.” “첫 번째로 빵을 구운 남자가 사라졌어. 레온은 그 남자를 찾으러 갔다가 요리사가 되었고.” 브론은 화덕 속을 들여다봤다. 검은 돌로 쌓은 안쪽에는 재 한 줌도 없었다. 대신 식지 않는 검은빛이 먼지를 비추고 있었다. 도현은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원래 보이지 않던 작은 칸이 있었다. [입회인이 확인한 약속: 겨울 구호 대금은 왕실 부담.] [현재 등록된 약속: 수혜자 후손에게 식사 시간 승계.] [변경 승인 기록: 비공개.] 루카스가 종이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이건 변경 이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최초 계약과 지금 적용 중인 계약이 같지 않아요.” 에스텔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 책임도 없는 건 아니야. 서명을 한 뒤에도 문서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 책임을 어디까지 질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도현이 말했다. “다만 책임을 진다는 게 또 다른 요리사에게 값을 떠넘기는 방식이어서는 안 되고요.” 그는 손목을 문질렀다. 석화의 자국이 손등으로 번질 듯 말 듯 움직였다. 어제부터 오래된 기억이 떠오를 때면 소녀의 저주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한국의 어머니가 끓여 주던 미역국 맛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동안 자기 기억도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적어 두었다. 미워하는 사람까지 모두 용서하겠다는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언제 위험해지는지 동료들이 알게 하는 일이었다. “기록에 하나 더 쓰겠습니다. 제가 기억을 잃기 시작하면 브론 씨가 먼저 확인해 주세요. 요리법을 잊은 건지, 사람 이름을 잊은 건지.” “왜 하필 접니까?” “가게 장부를 제일 많이 틀리게 쓰는 사람이니까요. 다른 사람이 틀리면 못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주방장님, 저를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도현이 웃으며 노트의 빈 곳에 브론의 이름을 크게 적었다. 그때 에스텔의 손바닥에 있던 흰 선이 검게 변했다. 돌문 속에서 종소리 대신 누군가 반죽을 치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내가 직접 본 건 이것뿐이야. 상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 다만 밀가루 자루에 바다의 소금 자국이 있었어.” [증언 부분 접수.] [기록 열람 범위: 최초 약속과 변경 전후의 차이.] [주의: 증언자의 누락 기억은 원본 사실로 대체하지 않음.] 돌문 가운데가 손바닥 너비만큼 벌어졌다. 틈새는 안이 아니라 아래쪽으로 이어졌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접시와, 굽지 않은 반죽 한 덩이가 놓여 있었다. “들어가면 채무가 생기는 건 아니겠죠?” 브론이 물었다. “확인해 봐야죠.” 도현이 대답했다. 그는 문에 쓰인 글씨를 끝까지 읽었다. ‘열람은 무료. 취식 또는 반죽의 소유권 이전 시 별도 청구.’ 그 문장을 모두에게 소리 내어 들려준 뒤, 일행이 동의하는지 물었다. 누구도 망설여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현은 반죽에 손을 대지 않고 접시 가장자리에 묻은 가루를 살폈다. 아주 미세한 검은 입자가 흰 가루 사이에 박혀 있었다. 그는 냄새를 맡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밀가루 냄새가 아닙니다.” “뭐가 다른데요?” 루카스가 물었다. “사람이 오래 기다린 방의 냄새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접시 밑바닥에 새 글씨가 떠올랐다. [첫 번째 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 빵이 구워지는 날, 최초 청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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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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