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의 목소리는 판자 한 장 아래에서 들렸지만, 얼굴을 보기까지는 세 시간이 걸렸다.
백도현 일행이 숨어든 낡은 물레방앗간은 오래전에 사용을 멈춘 곳이었다. 물레바퀴에는 이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밀가루를 받던 나무통에는 빗물이 반쯤 차 있었다. 그런데 바닥 아래로 연결된 계단은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나타나지 않았다. 에스텔이 봉인용 실을 한 칸마다 매어 두지 않았다면 그들은 같은 계단을 몇 번이나 돌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일곱 번째 계단을 다시 밟았어요.” 브론이 말했다.
“아까도 일곱 번째였죠.” 도현이 벽의 금을 가리켰다.
루카스는 검집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텅 빈 소리가 났다. 그는 나무판 하나를 들어 올렸고, 그 아래에는 또 다른 계단 대신 낮은 금속문이 있었다. 문에는 밀 이삭 모양의 손잡이 두 개가 달려 있었다. 하나에는 ‘작업 시작’, 다른 하나에는 ‘작업 종료’라고 새겨져 있었다.
“종료를 누르면 저 여자가 일한 시간이 한꺼번에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시작을 누르면 다시 하루가 반복될 거예요.” 에스텔이 덧붙였다.
도현은 금속문을 만지지 않았다. 틈새에서 따뜻한 밀 냄새가 흘러나왔다. 바깥 밭의 검은 냄새와 달리, 빵집 새벽 준비실에서 느낄 법한 냄새였다.
“마르타 씨. 저희가 문 앞에 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보리빵 백 개를 굽고 있어요.”
“오늘 몇 개 구우셨는데요?”
“아흔아홉 개요.”
짧은 침묵 끝에 도현이 물었다.
“어제는요?”
“어제도 아흔아홉 개. 마지막 한 개를 구우면 하루가 끝날 줄 알았는데, 오븐이 꺼지기 전에 종이 울려요. 그러면 반죽이 다시 돌아오죠.”
그 순간 도현은 마리아가 갇혀 있던 제8창고를 떠올렸다. 다 만들어도 끝낼 수 없는 빵. 다른 사람의 생존을 핑계로 조리사의 시간을 붙잡아 둔 계약이었다. 다만 이곳은 훨씬 오래되고 정교했다.
에스텔이 조심스럽게 봉인 실을 문고리에 감자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조리사 마르타. 미지급 식사 1회.]
[연체 노동: 12,481일.]
[업무를 중단하는 자는 잔여 시간을 현실에서 즉시 이행할 것.]
브론이 울상을 지었다.
“그럼 문을 열면 갑자기 삼십 년 넘게 늙는 겁니까?”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아요. 시간이 몸에 돌아올 수도, 기억에 쌓일 수도 있죠.” 도현은 대답했다.
그는 저주의 일을 해결할 때마다 가장 먼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 석화 저주는 노인의 손을 풀어 준 대신 자신의 팔에 남았고, 기억 저주는 소녀에게 어머니의 이름을 돌려준 대신 미역국의 맛을 빼앗았다. ‘바로 지금’의 고통만 사라지면 해결됐다고 믿는 실수는 반복할 수 없었다.
“마르타 씨, 오븐에서 잠시 손을 떼실 수 있습니까?”
“열 번 정도는요. 그다음엔 화덕이 다시 뜨거워져요.”
“좋습니다. 그 열 번 안에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오늘 만든 빵을 누구에게 제공해야 합니까?”
“기근 때 먹은 사람들한테요.”
“구체적으로 누굽니까?”
“장부에는 이름이 없어요. 배고픈 사람이 오면 내라고만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 모두 이미 음식을 받았다면요?”
대답이 늦어졌다. 금속문 너머에서 그릇이 떨리는 소리가 났다.
“그걸… 확인할 수 없어요.”
“그러면 먼저 만든 음식을 기록해 두셔야겠네요. 제공 여부를 확인할 사람도 있어야 하고요.”
루카스가 도현을 돌아봤다. 싸움이 아니라 장부 이야기를 시작하자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도현은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곳 계약은 조리사가 빵을 계속 구울 의무만 적고 있지, 누군가 실제로 받았는지는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증명을 요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에스텔은 작은 종이판을 꺼냈다. 마법으로 만든 얇은 판은 문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그 위에 그려진 문장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조리 완료분 인수인계 요청.]
[실제 수령자와 납품 증빙을 제출할 것.]
문이 흔들렸다. 허공에서 딱딱한 타자기 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검토 중.]
도현은 숨을 참았다. 검은 밀밭의 저주가 망설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수령자 정보: 미등록.]
[납품 증빙: 기록 없음.]
[검토 기한: 다음 정산일까지.]
“다음 정산일은 언제입니까?”
마르타가 문 너머에서 말했다.
“오늘 저녁이에요. 매일 오늘 저녁이죠.”
도현은 머리를 짚었다. 아무리 좋은 질문을 해도 시간이 한 바퀴 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구조였다. 제대로 된 외부 기준점이 필요했다.
“루카스 기사님. 왕실의 날짜와 인장을 빌릴 수 있습니까?”
루카스는 통행증과 낡은 수첩을 펼쳤다. 날짜, 날씨, 도착 시간, 자신의 서명을 적었다. 도현은 수첩의 한 쪽을 뜯어 문틈에 밀어 넣었다.
“이건 오늘 바깥에서 작성된 기록입니다. 여기서 매일 오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날짜가 아닙니다. 정산기한을 계산할 때 외부 날짜를 참고하십시오.”
금속문이 세게 울렸다. 에스텔이 손끝에 파란 불꽃을 붙여 그 틈의 온기를 막았다. 쇠문 표면에 작은 글자가 쏟아졌다.
[외부 시간 증빙 접수.]
[상충하는 정산 기한 발견.]
[반복 노동: 임시 정지.]
문이 안쪽으로 아주 조금 열렸다.
따뜻한 밀 냄새가 밀려 나왔다. 방은 크지 않았다. 낡은 화덕 하나와 작업대, 쌓아 둔 보리빵이 전부였다. 구석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회갈색 머리카락은 밀가루로 하얗게 변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깊게 박혀 있었다. 나이는 마흔쯤 되어 보였지만, 눈빛은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의 것이었다.
“저를 꺼내 줄 수 있나요?”
도현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의 발치에 검은 원이 그려져 있었고 그 원 밖으로 왼발을 내딛자 방 안의 빵들이 썩기 시작했다. 그녀는 급히 물러났다.
“안 되죠? 역시 안 되죠?”
“지금은 안 됩니다.” 도현이 말했다. “하지만 밖과 시간을 맞추는 건 성공했어요. 그걸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생겼습니다.”
마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을 주는 말보다 정확한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도현은 부엌에서 가져온 따뜻한 물과 평범한 소금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주를 옮기는 음식이 아니라, 새 재료로 만든 안전한 간식이었다.
“이것도 먹으면 빚이 되나요?” 마르타가 물었다.
“제가 값을 냈고,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원하시면 드시고 싫으면 두세요. 어떤 노동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빵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입술이 떨렸다.
“오래간만이에요. 다른 사람이 구운 빵을 먹는 게.”
그 말에 도현은 눈을 돌렸다.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내주는 일과, 요리사가 자신의 식사 시간을 가질 권리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마르타가 숨을 고르는 동안 방 안을 살폈다. 오븐 옆에는 아주 낡은 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차례 꿰맨 무릎 덮개가 놓여 있었다. 부엌에 갇힌 사람에게도 쉬려고 만들어 놓은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쉬고 싶을 때마다 그 자리를 바라봤을 테지만 실제로 앉을 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 도현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마르타는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이었다.
“빵을 다 구우면 다음 빵을 굽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어디서 살았는지, 지금도 가족이 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억지로 떠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하나는 생각나요. 제 아버지가 만든 의자예요. 다리가 한쪽 짧아서 접은 천을 끼워야 했는데, 고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자기가 거기 앉을 때마다 어느 쪽이 기울어지는지 알고 싶다고.”
도현은 의자의 다리를 보았다. 한쪽 아래에 닳아 빠진 천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지금 그 의자일 수도 있겠네요.”
마르타는 천천히 의자에 손을 올렸다. 늘 반죽만 만지던 손이 나무 결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눈에 작은 빛이 돌았다.
“맞아요. 그 사람이 만든 거예요. 나는 이 의자를 어디서 가져왔는지조차 잊어버렸는데.”
도현은 뭔가를 깨달았다. 반복된 하루를 만드는 저주는 시간을 지워도 물건의 흔적까지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그녀가 사용한 칼과 도마, 의자와 작업대에는 어쩌면 처음 이곳에 들어온 날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허락을 받은 뒤 의자의 짧은 다리 아래에 끼워 둔 천을 꺼내 작은 종이에 감쌌다. 이름표 외에 사람의 과거를 증명할 물건 하나가 생겼다. 왕궁에서 베네딕트에게 배웠던 ‘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라는 질문을 이제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장부의 숫자로만 설명할 수 없었다.
마르타는 작업대 아래에서 낡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작은 금속 이름표들이 들어 있었다. 열일곱 개 중 열여섯 개는 검게 녹슬어 있었고, 한 개만 희미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건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으려고 만든 거예요. 누가 바깥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의 이름도 전해 달라고.”
도현은 이름표를 받지 않고 물었다.
“이름을 제가 가져가도 괜찮습니까?”
마르타가 대답했다.
“그래요. 꼭 가지고 나가 주세요.”
그제야 그는 주머니를 받았다. 검은 밀밭 안에선 동의 없이 빼앗는 물건 하나도 누군가에게 빚이 될 수 있었다.
일행이 밖으로 나오자 계단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름표를 가슴 주머니에 넣는 순간 레온의 쇠숟가락이 날카롭게 울렸다.
[요리사 마르타: 시간 정산 유예.]
[외부 증언 대리인 등록.]
[대리인: 백도현.]
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생겼다.
[주의: 증언 대리인은 미수금의 소유자가 아님.]
[단, 채권자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이의 신청자는 새로운 청구 대상이 될 수 있음.]
도현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사람을 구하려는 행동이 다시 자신에게 저주를 넘기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됐다.
“제가 저 사람의 빚을 갚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레온의 숟가락에는 답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마르타의 이름표 하나에서 흐린 빛이 일었다. 문 뒤편에서 누군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걸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진작 나갔겠지.”
도현이 뒤돌아보자 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바닥에는 작은 밀알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낟알에는 검은 글자로 두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열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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