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밀밭은 낮에 보면 병든 농지처럼 보였다.
루덴 북쪽의 완만한 구릉에는 수확하지 못한 밀들이 어른의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이삭은 먹물로 물들인 것처럼 검었고, 줄기는 바람에 휘어질 때마다 은색 가루를 떨궜다. 발밑의 흙은 놀랍도록 비옥했다. 손가락으로 파내면 젖은 흙 냄새가 올라왔고, 누런 뿌리들이 실처럼 얽혀 있었다. 밤이면 그 밭의 풍경이 달라진다고 했다. 노라는 낮의 밭을 가리키면서도 끝내 안쪽으로 한 발 내딛지 않았다.
“일몰 뒤에는 여기서 일한 사람들이 모두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들이요?” 백도현이 물었다.
“돌아오긴 해요. 다만 집에는 오지 않죠.”
멀리 중앙 제분소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캐한 냄새는 바람을 거슬러도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루카스는 걸어온 길을 지도에 표시했다. 마을에서 제분소까지는 한 시간, 그 뒤편의 언덕에 채권 보관소가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보관소로 표시된 건물은 지도를 펼칠 때마다 다른 자리에 있었다.
“어제 그린 지도엔 밀밭 옆에 창고가 있었는데, 오늘은 개울 건너에 있습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에스텔이 지도의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지도가 거짓말하는 건 아닐 거야. 계약에 포함된 장소가 이동하고 있는 거지.”
“건물이 움직인다고요?”
“사람의 기억과 시간을 옮기는 식탁이야. 장소를 옮기는 정도는 쉬울 수도 있어.”
도현은 말없이 밀 이삭 하나를 살폈다. 허락받지 않은 곡물을 함부로 따지는 않았다. 그는 밭 가장자리에서 떨어진 낟알을 주워 얇은 천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껍질 아래는 평범한 노란색이었다. 손가락으로 눌러 보자 낟알이 쉽게 으스러졌다.
“알맹이는 상하지 않았습니다.”
브론이 코를 킁킁거렸다.
“바깥에 비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속에는 거의 없어요.”
도현은 작은 물병에 낟알을 넣어 흔들었다. 검은 물이 번졌지만 맑아지지는 않았다. 몇 번 더 씻자 오히려 그의 손등에 있던 검은 실금이 약하게 달아올랐다.
“조금만 더 해 볼까요?” 에스텔이 물었다.
“아뇨. 실험은 여기까지요.”
그는 물병을 봉인하고 날짜와 위치를 적었다. 이 낟알을 먹어도 안전하다고 판단하기에는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검은 껍질이 식량 부족을 가리기 위한 표시인지, 조리 과정에서 활성화되는 저주의 재료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밭 한가운데에는 낮은 허수아비들이 서 있었다. 대부분 낡은 앞치마를 걸쳤고, 머리 대신 빈 냄비가 얹혀 있었다. 평범한 농촌에서 봤다면 우스꽝스러운 장식이었겠지만, 이곳에서는 앞치마마다 바늘로 꿰맨 이름이 보였다.
마르타. 셀비. 오도.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엘마.
도현은 열일곱 개를 세었다. 어젯밤 노라가 보여 준 식권에 적힌 이름과 같은 것들이었다.
“전부 요리사 이름입니다.”
루카스는 허수아비 옆의 흙을 살폈다. 발자국은 없었지만 밀 이삭이 눌린 자국은 있었다. 누군가 최근까지 그곳을 드나들었다는 뜻이었다.
“왜 허수아비에 이름을 달았을까요?” 브론이 물었다.
“새를 쫓으라고 달아 놓은 건 아니겠죠.” 도현이 대답했다.
에스텔은 앞치마 하나를 건드리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이름을 분리해 보관하는 방식이야. 사람의 몸과 이름을 멀리 떼어 놓으면 계약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지 못해. 대신 장부를 가진 자가 이름을 다시 붙일 때까지 사람은 자기 몫을 주장할 수도 없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존재를 기록과 분리해 버린다면 살아 있어도 임금을 받을 수 없고, 죽어도 장례를 치를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밭 저편에서 작은 종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무 사이로 검은 앞치마를 입은 인부 셋이 나타났다. 얼굴에는 밀가루 자루를 뒤집어쓴 듯한 마대가 씌워져 있었다. 한 명은 낫을 들었고, 다른 두 명은 빈 수레를 끌었다. 그들의 발이 지나간 자리마다 땅에 떨어진 낟알들이 스스로 수레에 올라갔다.
“여기는 허가받은 수확 인원 외 출입 금지다.” 맨 앞의 인부가 말했다.
루카스가 나섰다.
“왕실 식품 안전 조사단입니다. 이 곡물의 출처와 사용처를 확인하려 합니다.”
“허가받은 수확 인원 외 출입 금지다.”
같은 말이 반복됐다. 목소리의 높낮이도 같았다.
도현이 물었다.
“저 허수아비에 적힌 이름을 아십니까?”
“미지급 인력의 담보 식별표다.”
“담보라면 무슨 돈을 빌렸다는 겁니까?”
인부가 낫을 고쳐 쥐었다.
“배급 당시 받은 식사.”
“이미 일해서 갚았다면요?”
“장부의 정산 승인이 끝나지 않았다.”
도현은 속이 서늘해졌다.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정산을 끝내지 않아 영원히 일하게 만드는 구조였다.
“미지급 내역을 보여 주세요. 저는 식당 임시 관리인입니다.”
인부의 머리가 기묘하게 꺾였다. 마대에 그려진 검은 눈 모양이 도현의 왼손목으로 향했다.
“임시 관리인은 권리자가 아니다.”
“그럼 권리자는 누구죠?”
“배고픈 자.”
이곳에서도 같은 대답이었다. 배고프다고 고백하는 순간 채무를 받아들이고, 배부르다고 하면 자격이 없어지는 함정.
도현은 마차에서 가져온 작은 도시락 상자를 열었다. 노라가 빌려준 정상 밀가루로 구운 납작한 빵과 소금에 절인 채소가 들어 있었다. 그는 빵 한 조각을 먹고 충분히 씹은 뒤 말했다.
“저는 지금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기 적힌 사람들에게 무엇을 청구했는지 확인할 권리는 있습니다. 그분들이 남긴 식당의 임시 관리인으로서요.”
인부는 대답하지 못했다. 낫끝이 허공에서 짧게 떨렸다. 낡은 규칙에는 배고프지 않은 사람이 남의 권리를 요구하는 경우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인부 셋이 동시에 움직였다. 낫이 햇빛을 가르며 날아왔다. 루카스가 검집으로 첫 공격을 막았고, 브론은 도현을 밭 밖으로 끌어당겼다. 몸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도현은 허수아비의 앞치마 한 장이 저절로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마르타.]
이름 뒤의 실밥이 풀리더니 아래에 작은 숫자가 드러났다.
[근무일: 1일. 반복 횟수: 12,481회.]
“같은 하루를 만 번 넘게 반복한다고?”
에스텔이 손을 뻗자 보랏빛 실이 인부들의 발목을 잠깐 묶었다. 루카스는 그 틈에 일행을 개울 쪽으로 후퇴시켰다. 도현은 끝까지 허수아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복되는 하루라면 제8창고에 갇힌 마리아와 같은 방식일 수 있었다.
“제분소의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를 알겠어요.”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시간을 한 바퀴씩 돌리는 겁니다.”
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어머니도 그런 곳에 있나요?”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보장은 못 하지만 이름만 보고 포기할 수는 없죠.”
개울로 물러난 일행은 멀리서 허수아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았다. 마대 얼굴을 한 인부들은 뒤쫓지 않았다. 대신 도현이 서 있던 자리의 흙을 파서 작은 항아리에 담았다. 그들은 항아리의 입구를 붉은 실로 묶고 창고 쪽으로 옮겼다.
“저희 발자국을 수거하는 것 같습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발자국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브론이 물었다.
에스텔은 눈을 감고 흙냄새 대신 마법의 흐름을 느꼈다.
“이곳에서 한 말을 계약에 남기기 위해서야. 말한 사람의 흔적과 말 자체를 연결하려는 거지.”
“그럼 제가 배고프지 않다고 말한 것도 기록됐겠네요.” 도현이 말했다.
“그럴 수 있어. 다만 그게 반드시 불리하진 않아. 그쪽 규칙은 배고픈 사람을 기준으로 돌아가니까.”
일행은 한동안 서로 말을 아꼈다. 종소리가 다시 들릴까 봐서가 아니라, 무심코 던진 문장이 누군가의 계약서가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도현은 이 침묵이 주민들 사이에 퍼져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빵을 받으면서도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하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구호위원회를 무서워해서만은 아닐 수 있었다.
노라는 작은 돌멩이를 강물에 던졌다. 물보라가 햇빛을 받아 흩어졌다.
“우리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부터 아무 말도 안 하게 되었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노래 한 곡도 빚이 될 수 있는 마을이라면 누구나 입을 닫겠죠.” 도현이 대답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노라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예전에 만든 음식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크고 둥근 호밀빵이요. 반죽을 접을 때마다 꼭 세 번 두드렸어요. 뜨거운 걸 아이들에게 바로 주지 않으려고 손등으로 온도를 확인하셨고요.”
“리아 어머니와 비슷한 습관이군요.”
“두 분이 같은 곳에서 일했을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고, 요리사들이 서로 배운 걸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둘 다 가능성입니다.”
노라는 작은 목소리로 웃었다. 도현이 확신하지 않는 것이 답답할 법했지만, 그녀는 그 태도에서 오히려 안도하는 듯했다. 여기서는 누군가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그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개울 건너편에는 낡은 나무 다리가 있었다. 다리 기둥에는 스무 개 넘는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모두 같은 높이였다. 루카스는 그것이 수레가 지나간 흔적이 아니라 누군가 반복해서 기둥을 세 번 두드린 자국이라고 설명했다. 도현은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밭에 갇힌 사람들이 아직 바깥과 연락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던 흔적일지 몰랐다.
그들은 개울을 건너 낡은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바깥의 종소리가 멀어졌다. 그런데 바닥 밑에서도 같은 박자가 울렸다. 무언가 무거운 것으로 나무를 세 번 두드리는 소리였다.
톡. 톡. 톡.
도현은 숨을 멈췄다. 리아가 어머니에게 배웠다던 오븐 문 노크와 같았다. 그는 바닥 판자에 귀를 대었다. 밑에서는 밀가루를 반죽하는 소리, 쇠솥을 옮기는 소리, 그리고 아주 낮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탁을 치워 주세요.”
한 여자가 속삭였다.
“우리는 이미 모두에게 밥을 먹였습니다.”
도현은 바닥을 두드렸다.
“들리십니까? 우리는 위에 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짧은 침묵 뒤, 판자 아래에서 또렷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르타.”
브론이 노라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직 어머니 엘마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에 누군가 살아서 대답하고 있었다.
그때 레온의 숟가락이 도현의 주머니에서 스스로 움직였다.
[미귀환 요리사 17명 중 생존 신호 1건 확인.]
[경고: 생존자의 조리 종료를 선언하면 미지급 시간 전체가 청구됩니다.]
바닥 아래에서 마르타가 급하게 속삭였다.
“문을 열지 마세요. 밖으로 나온 순간 우리가 일한 날들이 한꺼번에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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