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마차의 바퀴에서 떨어진 빗물이 식당 문턱을 적셨다.
아일린 공주가 들어선 뒤로, '마지막 한 숟갈'의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늦은 저녁의 소란이 있었다. 하수도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 술에 취해 노래하는 마부, 골목 끝에서 종을 울리는 야경꾼. 그런데 작은 식당 안만은 왕궁의 알현실이라도 된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백도현은 공주의 손등에 새겨진 검은 왕관과 자신의 손목을 번갈아 보았다.
[저주를 품은 인원: 183,442명.]
[저주를 옮길 요리사의 현재 수용 한도: 2명.]
글자는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게 음식 한 접시를 만들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 음식을 드시면 십팔만 명의 저주가 제 몸으로 옮겨올 수도 있고요?”
아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도현은 조리대에 올려 둔 칼을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브론의 귀가 벌떡 섰다. 왕국의 공주에게 영업 종료를 선언하다니. 웬만한 식당이라면 사흘 내로 간판이 내려갈 일이었다.
“폐하의 혈족이십니다.” 에스텔이 낮게 속삭였다.
“그렇다고 예약도 없이 오셔서 요리사를 죽이실 수는 없죠.”
도현이 말했다.
공주의 호위기사 둘이 동시에 움직였다. 검집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일린이 손가락을 한 번 들어 올리자 둘은 멈췄다.
“죽이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럼 살려 놓고 부탁하셔야죠. 제 몸도 하나뿐이라서요.”
아일린은 처음으로 도현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베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생각보다 어렸다. 화려한 장신구에 비해 눈 밑에는 피곤한 그늘이 있었다.
“제게 시간이 없습니다.”
“저도 방금 저주 두 개를 받아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스텔이 앞에 나섰다.
“아일린. 그는 아직 초보야. 네게 필요한 건 요리사가 아니라 저주의 발원지야.”
“그걸 찾으려고 십 년을 썼어요.”
공주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장갑을 벗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검은 왕관의 가시가 손목까지 뻗어 있었다. 가시는 맥박에 맞춰 꿈틀거렸다. 마치 피부 아래 작은 나무가 뿌리를 뻗는 것 같았다.
“왕도 외곽에서 어제 여섯 명이 쓰러졌습니다. 오늘 새벽엔 스물세 명이요. 이달에만 이백 명이 넘습니다. 먼저 열이 오르고, 다음에는 음식의 맛을 잃습니다. 마지막에는 가족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요.”
도현의 속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손목에 있는 기억 저주와 석화 저주가 미세하게 욱신거렸다.
“그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서로 다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럼 같은 날 저주가 시작됐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주받은 사람이 정확히 십팔만 삼천사백사십이 명인 거죠?”
공주의 시선이 손등으로 떨어졌다.
“왕국이 기록한 숫자가 아닙니다. 제 손에 새겨진 숫자예요. 누군가 죽으면 줄고, 새로 태어나면 늘어납니다.”
그 말을 들은 브론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도현은 오히려 의자를 당겼다.
“앉으시죠. 이야기를 더 들어야겠습니다.”
“요리를 해 주시겠다는 건가요?”
“이야기를 듣겠다는 겁니다. 메뉴는 그다음이에요.”
아일린이 앉자 호위기사들은 문가에 섰다. 브론이 따뜻한 물을 가져왔지만, 그릇을 내려놓으려다 손을 떨었다. 호위기사의 갑옷 틈에서 짙은 약품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주방장님. 이 사람들한테서 피 냄새가 안 납니다.”
기사 한 명이 투구를 돌렸다.
“무례하다.”
“피 냄새가 없다는 게 무례할 일인가요?” 도현이 물었다.
“우리는 왕실 친위대다.”
“왕실 친위대는 피가 안 통합니까?”
브론이 웃음을 참다 사레에 걸렸다. 아일린은 테이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호위들은 살아 있습니다. 다만 감각의 일부를 대가로 맡겼습니다. 저와 가까이 있는 자는 그 정도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위험합니까?”
“저주가 심해지면 주변 사람의 감각을 빼앗을 때가 있습니다.”
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공주가 호위기사와 식당까지 오는 동안 무엇을 두려워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배고프십니까?” 도현이 물었다.
아일린이 고개를 들었다.
“제 저주를 풀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저주를 푸는 음식은 못 만듭니다. 그냥 저녁은 드릴 수 있어요.”
“음식을 먹으면 저주가 옮겨간다면서요?”
“저주를 건드리는 요리가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 두 번 겪어 보니 감이 옵니다. 손님이 잃어버린 것을 정확히 되돌려 주는 음식이요. 저는 그걸 아직 구분할 수 없지만, 최소한 시험해 보지는 않을 겁니다.”
에스텔이 그의 말을 듣고 표정을 바꿨다.
“확실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식당에서 지켜보시죠. 도망칠 길은 열어 두고요.”
주방으로 돌아온 도현은 먼저 식재료를 전부 확인했다. 에스텔의 식당에는 평범한 채소 옆에 이름을 읽을 수 없는 마법 병들이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었다. 은빛 가루가 든 병의 마개에는 '희망', 보라색 약초에는 '첫사랑', 작고 검은 항아리에는 '먹은 사람을 잠시 잊게 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걸 음식에 넣어도 되는 겁니까?”
“제대로 쓰면 치료가 되지.” 에스텔이 말했다.
“제대로 안 쓰면요?”
“저주가 되기도 하고.”
“그럼 오늘은 주방 밖으로 치웁시다.”
에스텔이 못마땅하게 팔짱을 꼈다.
“지금까지 약초로 수천 명을 치료한 마녀 앞에서 마법 재료를 빼겠다고?”
“손님을 조사하기 전에 손님의 몸에 들어갈 걸 먼저 조사하는 겁니다. 의사가 약을 지을 때도 성분을 보잖아요.”
도현은 병들을 하나씩 선반 아래에 내려놓았다. 장갑에 묻은 낯선 가루도 깨끗이 씻었다. 브론에게는 새 도마를 가져오라고 했다. 늑대인간은 식당에서 도마가 두 개나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현은 마법 재료를 다룬 도마와 평범한 식재료를 다룰 도마를 섞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저주받은 손님도 위생 관리를 받는군요.” 브론이 중얼거렸다.
“오히려 더 철저해야죠.”
공주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치료하기 전에 도마와 칼을 씻는다는 사실이 의외인 듯했다.
“왕궁에서는 제게 독이 없는 음식만을 내놓습니다.”
“그럼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는 묻지 않습니까?”
“요즘은 아무도 묻지 않아요. 제가 맛을 잘 못 느끼니까요.”
도현은 잠깐 멈췄다. 수많은 요리사가 있었을 왕궁에서 공주의 취향 하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안타까웠다.
“맵거나 시큼한 것은 어떻습니까?”
“매운 건 싫어요. 목이 아파서요. 시큼한 건… 어릴 때 먹었던 자두를 좋아했어요.”
“그럼 오늘은 맵지 않게, 산미도 약하게 가겠습니다.”
공주가 의아해했다.
“왜 제 취향을 물으시죠? 저주만 풀면 되지 않나요?”
“저주가 아니라 식사하시는 분을 위해 만드는 거니까요.”
그 순간 도현은 한국에서 처음 일하던 작은 주방을 떠올렸다. 선배 요리사는 늘 주문표부터 읽지 말고 손님이 왜 그 음식을 주문했는지 생각하라고 했다. 생일을 맞은 사람과 병문안을 온 사람이 같은 수프를 먹어도 기대하는 것은 다르다고. 도현은 그 말을 기술의 문제로 이해했었다. 이세계에서야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건드리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공주의 손등에 검은 가시가 잠깐 솟았다. 도현은 그녀에게 찬물 대신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식사 전부터 몸을 떨고 있는 손님에게 갑자기 뜨거운 그릇을 쥐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무리해서 다 드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요리사는 처음이에요.”
“왕궁에선 접시를 다 비워야 합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남기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왕실이 백성 앞에서 음식을 남기면 모범이 되지 않는다고.”
도현은 그 말에 순간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음식을 절대로 남기지 말라는 왕실의 규율. 마지막 한 숟갈을 남기라는 식당의 이름. 서로 반대되는 두 규칙이 같은 저주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도현은 남은 보리와 닭 육수, 양파를 꺼냈다. 공주를 위해 화려한 코스 요리를 차릴 생각은 없었다. 식당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화덕에 냄비를 올리고, 양파를 천천히 볶았다. 버터가 녹으며 가장자리에 잔거품이 일었다. 얇게 썬 양파가 투명해지고, 그 끝에 갈색이 돌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오래 볶으세요?” 브론이 물었다.
“단맛을 끌어내는 거예요. 설탕을 넣지 않아도 됩니다.”
“공주님께 설탕이 없어서 못 넣는다고 하면 큰일 납니다.”
“그럼 네 월급으로 사 와요.”
“양파가 참 훌륭한 재료군요.”
도현은 웃음을 삼켰다. 익숙한 주방의 냄새가 긴장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육수를 붓고 보리를 넣자 걸쭉한 수프가 천천히 끓었다. 마법 약초도, 왕실에서 가져온 기묘한 가루도 쓰지 않았다. 소금과 허브만 조금 넣었다.
그릇이 공주 앞에 놓였다.
아일린은 수프를 한참 바라봤다.
“이런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있어요.”
“왕궁에도 보리 수프가 있나요?”
“왕궁에는 없었어요. 아주 어릴 때, 누군가 나눠 줬죠.”
그녀가 첫술을 떴다. 도현은 무심코 손목을 움켜쥐었다. 석화의 찬 기운이 퍼지는지, 기억이 하나 더 사라지는지 확인해야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숟갈, 세 번째 숟갈. 공주의 눈가가 젖었지만 손등의 왕관은 그대로였다. 도현의 손목에도 새로운 반점은 생기지 않았다.
“맛있네요.”
아일린이 말했다.
“오랜만에 음식 맛이 납니다.”
도현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저주는 그대로인데 맛이 난다고요?”
“네. 평소에는 금속을 씹는 것 같거든요.”
에스텔이 급히 공주의 손을 붙잡았다. 왕관의 가장 아래쪽 가시가 아까보다 옅었다. 하지만 금세 다시 짙어졌다.
“치료는 아니야.” 에스텔이 중얼거렸다. “잠깐 조용해진 거지.”
도현은 작은 장부를 끌어다 적었다.
[첫 번째 관찰: 저주를 없애지 않고 증상을 누그러뜨리는 음식이 가능하다.]
[두 번째 관찰: 같은 음식을 먹어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반응이 일어난다.]
마지막 줄을 쓰는데 아일린이 물었다.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왕궁에 가서 십팔만 명분의 저주를 삼키는 일이라면 거절합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저주가 어디서 왔는지 조사하는 일은 해 볼 수 있습니다.”
“왕국에서 최고의 마법사들도 찾지 못했는데요?”
“마법사들이 무엇을 조사했죠?”
“왕실 혈통, 고대 주문, 묘지, 마법진….”
“그럼 아무도 식단을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아일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이 말했다.
“공주님. 저주의 이름이 '왕국의 식탁'이라면, 첫 번째로 확인할 건 누가 어떤 밥을 먹었느냐 아닙니까.”
그날 밤 공주는 왕실 문장이 찍힌 출입증 하나를 남기고 돌아갔다. 출입증에는 사흘 후 왕궁 기록보관소에서 열리는 오래된 연회 문서 열람 허가가 적혀 있었다.
마차가 멀어진 뒤 도현은 고개를 숙여 손목을 살폈다. 회색 반점과 검은 실금 사이에 미세한 글씨가 떠올랐다.
[왕국의 식탁: 최초 제공 기록 감지.]
[등록된 장소: 왕궁이 아님.]
[기록명: 굶주린 자들을 위한 첫 만찬.]
그 아래에는 자신이 쓴 적 없는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주의: 그날 음식을 만든 요리사는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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