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왕도에는 찬비가 내렸다. 골목의 물이 빠지지 않아 식당 ‘마지막 한 숟갈’의 계단에는 진흙이 올라왔다.
도현이 일어나 보니 에스텔은 이미 빈 주방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와, 아이가 만들었을 법한 서툰 나무 숟가락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화덕은 꺼져 있었지만 그녀의 옷에서는 타버린 양파 냄새가 났다.
“어제는 왜 바로 대답하지 않았어요?”
“내가 변명하게 될 것 같아서.”
도현은 의자에 앉았다. 움직이지 않는 왼팔 때문에 앉는 일조차 시간이 걸렸다. 에스텔은 도와주려다 손을 거두었다. 먼저 묻지 않으면 손대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세른은 원래 왕궁 사람이 아니었어.”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북문에서 아픈 사람에게 죽을 끓여 주던 평범한 요리사였지. 첫 겨울에는 곡식이 너무 없어서 누구도 자기 몫을 확신할 수 없었어. 그는 늘 가장 마지막에 먹었고, 결국 몇 번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세른은 주민 열두 가구의 곡식을 모아 공동 부엌을 열었다. 사람들은 자기 몫을 가져가면서도, 늦게 오는 사람을 위해 그릇 하나는 항상 비워 두었다. 그 빈 그릇을 누군가가 기꺼이 먹을 수 있다고 기록할 수는 없었다.
왕실이 그 모습을 보고 구호 제도를 만들었다. 화덕과 창고를 지원하고 다음 겨울까지 배급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가뭄이 길어지자 지키지 못한 약속이 늘어났고, 새 관리들은 미지급 몫을 부채가 아니라 '수령 완료 대기분'이라고 고쳐 적기 시작했다.
“내가 보관인이었으니까 원본을 맡고 있었지. 관리들이 찾아왔어. 왕실이 멈추면 사람들이 굶는다고 했어. 급한 배급을 이어 주는 대신, 나중에 원본을 다시 바로잡게 해 주겠다고.”
“그래서 입회인으로 서명했군요.”
“응. 대리 수령을 허락하는 종이에도.”
도현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는 에스텔이 사기꾼처럼 일부러 사람을 속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려웠다는 이유로 사람의 동의가 없는 계약에 이름을 적은 결과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한테도 똑같이 했죠.” 그가 말했다. “저주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고만 하고, 제 몸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빼먹었으니까.”
에스텔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나의 잘못이야. 네가 특별한 조리법을 찾으면 모든 게 바뀔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 믿음을 이유로 네 선택권부터 빼앗았지.”
도현은 긴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브론이 장작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시에도 사람을 먹여 살릴 일은 남아 있었다.
“사과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도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용서한다고 해서 사라진 사람들이 돌아오지도 않아요.”
“알아.”
“원본을 공개하세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지워졌는지 직접 말해 주세요. 그리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에게 사과를 받아 달라고 요구하지 마세요.”
에스텔은 나무 숟가락을 감싸 쥐었다. “그래야지.”
도현은 에스텔의 이야기를 들은 뒤 한동안 식당의 식칼을 바라봤다. 자신이 한국에서 익혔던 첫 번째 습관은 잘 드는 칼을 쓰기 전에 식재료와 손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위험한 도구를 위험하다고 말한다고 부끄러운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사실을 숨기면 사고를 막을 기회가 사라진다.
“처음에 제가 이 식당 문을 열었을 때, 당신이 제게 계약서부터 내밀었다면요?” 도현이 물었다.
“넌 아마 도망쳤을 거야.” 에스텔이 답했다.
“그렇겠죠. 그게 당신이 두려워한 답이었겠죠. 하지만 그 답을 제가 내릴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에스텔은 말없이 나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숟가락의 뒤에는 칼로 고친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세른도 첫날부터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주 부러뜨리고 다시 깎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실수까지 남겨 둔 사람이, 정작 자기 실수만은 숨겨 왔던 것이다.
“말을 고르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 에스텔이 중얼거렸다.
“고르는 동안 남들이 다치면 안 되죠.”
“그래. 그래서 오늘 공개하러 갈 거야. 내가 대신 용서받겠다는 표정은 짓지 않을게.”
도현은 그제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그 사람을 다시 믿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는 아직 에스텔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직접 책임을 말할 기회를 빼앗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낮 왕궁 공개 청문회에는 평소와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 귀족보다 시장 상인과 창고 노동자가 많았고, 북부에서 온 마르타는 맨 앞줄에 앉았다. 이벨은 에스텔의 얼굴을 보기 싫다며 복도에 남았다. 누구도 그녀를 안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았다.
에스텔은 기억을 미화하지 않았다. 자신이 계약 변경에 서명했다는 사실, 당시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도 관리들의 말을 믿었다는 사실, 후대에 식당의 요리사들을 고용하면서 저주의 대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청문회장이 술렁였다.
“그럼 그 요리사들이 사라진 건 당신 때문이오?” 한 귀족이 외쳤다.
“제가 한 선택이 그들의 위험을 키웠습니다.” 에스텔이 대답했다. “다만 누구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아직 조사해야 합니다. 제가 모든 죽음을 알고 있었다고도, 아무것도 몰랐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마르타가 일어났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사과는 들었어. 난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 그리고 그 기록을 보겠어.”
“보여 줄게.”
“네가 보여 주는 만큼만 말고. 우리가 직접 선택해 볼 수 있게.”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원본은 독립 보관소와 피해자 열람실로 나누어 보존하기로 했다. 개인 증언 중 공개 여부를 정하지 않은 내용은 함부로 낭독하지 않았다.
한편 오르델은 에스텔의 옛 장부와 왕실 명부를 대조하다 이상한 항목을 찾았다. 첫 겨울의 부채는 돈이나 곡식의 형태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 납품 실패 시 '조리 노동으로 상환'한다는 조항이 추가돼 있었다.
“이런 조항에 서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에스텔은 원본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없어. 적어도 내가 맡은 명부에는.”
오르델은 두루마리를 끝까지 펼쳤다. 열일곱 칸 가운데 세 칸은 이미 실제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의 기록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머지 열네 칸 옆에는 '제공 대체 노동'이라는 붉은 표시가 있었다. 이것이 실종을 조사할 수 있는 최초의 구체적인 배치 기록이었다.
마르타는 종이 끝을 붙들었다. “우리 이름을 곡식값 대신 붙여 놓았군.”
마지막 페이지에는 수송 목적지가 적혀 있었다. 왕궁의 벽 속 방만이 아니었다. 옛 구호 시설 네 곳과 폐쇄된 제빵 저장실 두 곳. 지금은 폐쇄했다고 기록된 장소들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전부입니다.” 오르델은 말했다. “문서가 있다고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일린은 출입 허가를 내렸다. 동시에 기록이 가리키는 장소를 조사할 때, 거기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정부의 증거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람으로 대우하라는 지시를 붙였다.
저녁이 되자 에스텔은 식당으로 돌아왔다. 도현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맛을 잃어 가는 혀로도 오늘의 국이 너무 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이 식당을 닫을 생각입니까?” 에스텔이 물었다.
“그건 아직 모르죠.” 도현이 말했다. “다만 다음 요리사에게는 계약서를 제대로 보여 주겠습니다.”
에스텔은 답하지 못했다. 주방 벽에 세른의 숟가락을 걸었다. 그 아래에는 자신이 선택한 문구를 적었다.
[이곳의 음식은 누군가의 저주를 옮길 수 있습니다. 동의 없이 치료하지 않습니다.]
문구를 붙이자 문밖의 마차가 급히 멈춰 섰다. 오르델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첫 번째 폐쇄 저장실 문이 안쪽에서 열렸습니다.”
에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누가 나왔는데?”
“아직 몰라요. 하지만 문 안쪽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나가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19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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