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른이 들고 온 봉쇄 명령서의 윗부분에는 아일린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공주는 서류를 받자마자 잉크부터 확인했다. 왕실에서 쓰는 푸른 먹이 아니라 의전국에서 쓰는 검은 먹이었다. 복제한 도장 위에 다른 문장을 덧씌운 흔적이었다.
“제가 승인한 건 원본 보존 명령입니다. 출입 봉쇄가 아니에요.”
“국가 비상 절차에 따른 긴급 집행입니다.” 베이른이 말했다.
“그 절차를 누가 승인했습니까?”
베이른은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오르델이 원본 보관실로 통하는 문을 막아 섰다. 그는 칼을 들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소리치지도 않았다. 다만 보존 규정에 따라 강제 봉쇄할 경우 먼저 현장에 있는 기록물의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 목록이 어디 있습니까?”
“현장 상황상—”
“없다면 이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침에 빵을 받기 위해 시장에 줄을 서던 사람들이었다. 일이 끝난 뒤에는 자기 가족이 먹을 저녁을 걱정해야 했다. 베이른은 그들을 향해 명령했지만, 아무도 먼저 막대를 내리치지 않았다.
도현은 틈을 타 봉투 속 명부를 오르델에게 넘겼다. 첫 장에는 열두 가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북문의 목공소, 염색공, 마차 수리공, 화덕 청소부. 왕실 문서에 흔히 적히는 귀족의 이름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직접 곡식을 냈다고요?” 브론이 물었다.
“기증한 양이 다르네요.” 오르델이 종이를 살폈다. “어떤 집은 밀 한 줌, 어떤 집은 곡식 두 자루입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냈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서명이 나머지를 대신할 수는 없겠죠.”
명부 맨 아래에는 낯익은 글씨가 있었다. 에스텔의 서명이었다. 다만 처음 봤던 입회인 표시와 조금 달랐다. '보관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스텔이 명부를 손에 받았다. “세른이 죽기 전에 나한테 맡긴 거야. 누군가 나중에 왕이 모든 것을 베풀었다고 말하면, 실제로 누가 빵을 구웠는지 잊지 말라고.”
“그런데 왜 숨겼어요?” 도현이 물었다.
그 질문은 작았지만 주방에서 칼을 떨어뜨린 소리보다 더 선명했다.
에스텔은 대답 대신 명부 마지막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왕실 창고의 지급 기록이 있었다. 열두 가구의 곡식을 받아 배급한 뒤, 왕실은 다음 겨울에 같은 양의 식량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로 지급한 양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왕궁이 기근을 넘기려고 빚을 진 거군요.” 아일린이 말했다.
“그 빚을 갚기 어렵게 되자 누군가 사람들의 허기로 바꾼 거야.” 에스텔이 말했다.
베이른이 말을 끊었다. “왕실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구호가 거짓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 창고 덕분에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어요.”
“맞아요.” 도현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니 진짜로 내놓은 것까지 부정하면 안 되겠죠. 그 부분도 조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놓지 않은 것까지 내놓았다고 적는 건 다른 문제예요.”
왕궁 위로 정오의 종이 울렸다. 벽면의 날짜가 바뀌었다.
[최종 정산까지 남은 시간: 여섯 날.]
아일린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원본실 출입을 막으려는 사람이라도 무기부터 빼앗지 말고, 직속 지휘관과 현장 명령의 내용을 따로 기록하라고 했다. 그들의 생계를 협박하는 방식으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서고 바깥으로 나오자 왕도의 하늘은 낮게 흐렸다. 북문 쪽에서 곡식 마차가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자발적인 공동 주방들이 물량을 공유하기 시작했지만, 비가 오면 운송로가 끊길 위험이 있었다. 마차를 모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서둘렀는지 도현은 이해했다.
점심에 열린 임시 식사 회의에서 한 노파가 손을 들었다. 그녀는 북문의 목공소에서 살던 열두 가구 가운데 한 집의 후손이라고 했다. 오르델이 족보를 대조하려 하자 노파가 말했다.
“내가 어느 집 핏줄인지는 나중에 확인하시오. 오늘은 여기 사람들에게 빵이 있는지가 먼저요.”
노파는 마른 나무함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밀 분쇄기 손잡이가 들어 있었다. 선조가 첫 겨울에 쓰던 물건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녀는 분쇄기를 다시 돌릴 수 있는 대장장이와 곡식이 있으면 북문에서도 작은 부엌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명부가 자신들의 권리를 증명하는 데 쓰이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것만 바라보며 굶을 수는 없다고 했다.
도현은 손잡이의 닳은 부분을 살폈다. “새 부품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다만 오늘 안에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믿음직하네.” 노파는 웃었다. “우리 집안이 옛날부터 기다린 건 기적이 아니라 내일 쓸 밀가루였거든.”
이 말은 회의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한 상인이 보유한 곡물 자루를 알렸고, 항구의 운송인이 낮은 운임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구간을 제시했다. 아일린은 그것을 왕실의 관대한 기부로 발표하지 않았다. 각각의 소유자와 조건을 제대로 기록하고 동의한 범위에서만 이용하게 했다. 사람들은 왕실의 허락을 기다리는 대신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시장 창고에서 사고가 났다. 왕실 식량안정위원회가 특별 보관 명령을 내리자, 관리자들이 창고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소문은 더 빠르게 퍼졌다. 공주가 국가 공급을 없애려 한다는 말, 외국에서 온 요리사가 식량을 태운다는 말, 저주받은 식당이 새 왕궁이 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브론이 장을 보러 갔다가 얼굴을 붉히며 돌아왔다. “제가 정말 참으려고 했는데요. 누가 저더러 왕실 창고를 훔쳐 먹는 늑대라고 해서—”
“물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아뇨. 값 계산을 대신했습니다.”
“그게 더 무섭네요.”
브론이 소리 내어 웃었다. 곧 그는 침착해져 시장 상황을 보고했다. 보리값은 두 배 가까이 올랐고, 노인들에게 배급될 수프 재료도 부족했다. 지금 창고 문을 강제로 열면 병사들과 시민들이 충돌할 수 있었다.
아일린은 왕실 보관 물량과 주민 공동 비축분을 구별할 임시 조사단을 꾸렸다. 궁정 관리, 시장 상인, 독립 기록원, 창고 노동자 한 명씩이 함께 들어갔다. 도현은 현장에 가면서 가장 큰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장부에서 곡식 백 자루를 찾는다고 실제로 백 자루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럼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아일린이 물었다.
“없다고 적어야죠. 그리고 어디서 가져올지 정해야 합니다.”
창고의 냉기가 얼굴을 때렸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길게 늘어졌고, 쌀을 담은 자루 사이로 쥐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기록에 있는 자루는 사백이었지만 쓸 수 있는 곡식은 이백여 자루뿐이었다. 물에 젖거나 상한 것은 사람에게 먹일 수 없었다.
베이른도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썩은 곡식을 보고 처음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제 장부에 없었습니다.”
“장부에는 냄새가 안 나니까요.” 도현이 말했다.
한 창고 일꾼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우리도 몇 차례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수량을 줄이면 왕실 공급 보증이 깨진다고 해서 수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르델이 그 보고서의 접수번호를 적었다. 베이른은 수량을 다시 세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원본을 외부로 내보내지 말라고 했다. 아일린은 곧바로 항의했다. 기록의 출처가 확인된 사본은 외부 증인도 보관해야 한다는 원칙을 이미 세워 두었다.
해가 질 무렵 조사단은 쓸 수 있는 식량을 따로 모았다. 브론과 상인들이 직접 자루를 옮겼다. 도현은 바닥에 떨어진 밀을 손으로 쥐었다가 놓았다. 왼손은 굳어 손가락 사이로 가루가 스며들지도 않았다.
“열두 가구가 처음 이 식량을 내놓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일린이 물었다.
“누가 줬는지 자랑하려고 했다면 굳이 이름을 작게 적진 않았겠죠.” 도현은 대답했다. “앞에 굶주린 사람이 있었으니까 줬을 겁니다.”
그날 밤 북문 주민의 오래된 기록을 확인하던 오르델이 새 편지를 받았다. 서명이 없는 왕실 문서였다.
[열두 가구의 지급 원장 보존인에게 통보.] [원문 정정 기록을 공개하면 첫 겨울의 부채를 전액 회수한다.]
편지에는 도장이 없었다. 대신 도현이 한때 손목에서 보았던 검은 왕관 문양이 찍혀 있었다. 왕관이 아일린에게서 떨어져 나와 종이 위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움직였다.
제19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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