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 종탑이 여섯 번 울린 뒤에도 일곱 번째 종은 울리지 않았다.
천칭 부엌 끝의 문은 열린 채였다. 안쪽에서 새어 나온 빛은 황금빛이 아니라 오래된 밀가루처럼 희뿌옇다. 아일린이 먼저 문턱에 다가가자 바닥의 글자가 바뀌었다.
[원계약 정정 권한: 최초 제공자에게 있음.]
[왕위 계승권자는 최초 제공자에 해당하지 않음.]
“왕이 아니라고요?” 브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궁에서 만든 계약인데도요?”
“계약은 왕궁에서 보관했겠죠.” 도현이 대답했다. “음식을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을 수도 있고요.”
도현은 굳은 왼손을 가슴에 붙이고, 오른손으로 문 가장자리를 살폈다. 나뭇결 사이에 작은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수없이 뜨거운 그릇을 들었던 사람이 열을 식히려고 문을 긁은 흔적처럼 보였다.
안쪽은 왕실의 서고가 아니었다. 길이 좁은 작업대 셋, 벽돌 화덕 하나, 휘어진 국자 두 개가 놓인 작은 부엌이었다. 천장에서는 마른 약초 다발이 매달려 있었고, 벽에는 연기에 그을린 그림이 있었다. 한 남자가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 주고, 그 뒤로 왕관을 쓴 사람이 빈 손으로 서 있었다.
에스텔이 그림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
“기억나?” 도현이 물었다.
“그림이 아니라 이 냄새가.” 그녀는 화덕을 바라봤다. “먼저 타버린 양파 냄새. 세른이 첫날 죽을 망쳤을 때도 이 냄새가 났어.”
“세른이 최초 제공자였습니까?”
에스텔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오르델이 벽면의 세 갈래 매듭을 확대경으로 살폈다. 매듭 아래 작은 돌판은 한 장이 아니라 세 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겨울의 조리자: 세른.] [곡식 기증자: 북문 주민 열두 가구.] [장부 인수 책임: 왕실 창고.]
아일린이 천천히 읽었다. 왕실이 자신의 창고를 열기 전에 시민들이 먼저 가마솥을 걸었다는 뜻이었다.
“그럼 왕의 선언은?”
“그다음에 한 약속이었어.” 에스텔이 말했다. “왕이 빵을 만들었다고 한 적은 없어. 굶주린 사람이 먼저 먹을 수 있도록 왕실 창고가 책임지겠다고 했지. 처음에는.”
오르델은 세 돌판의 마모 상태를 비교했다. 기증자 명단의 글씨가 가장 오래되었고, 왕실 보증 문구는 나중에 다른 기구로 새겨 넣은 흔적이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진 검은 문장은 훨씬 최근 것이었다.
[최초 제공자를 확인할 수 없을 때 왕위가 대리한다. 왕위가 부재하면 제7자리 조리자가 대리한다.]
“이건 원문이 아니군요.” 오르델이 말했다. “돌의 깊이가 다릅니다.”
아일린은 검은 문장을 손끝으로 짚으려다 멈췄다. 함부로 만지면 자기 손등의 왕관 저주가 작동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문장을 적은 사람의 이름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왜 사람들의 공동 부엌을 왕궁 지하에 옮겼을까요?”
“증거를 보관하려고 했다면 잘한 일이었겠죠.” 도현은 작업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 와서 직접 확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도현은 벽에 걸린 주방 장갑을 집으려다 멈칫했다. 안쪽이 찢어진 낡은 장갑에는 작은 글씨로 '빵을 만들었으나 먹었다고 확인할 수 없음'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 실수로 붙인 표가 아니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비슷한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반죽을 담았지만 비워진 통, 불을 피웠지만 음식을 내지 못한 솥, 만들기로 약속했지만 만들지 못한 빵. 그릇마다 서로 다른 실패가 기록돼 있었다.
“이상해요.” 브론이 코를 킁킁거렸다. “부엌에 들어왔는데 썩은 빵 냄새가 안 납니다. 오래됐는데도요.”
에스텔은 먼지 묻은 손가락으로 화덕을 두드렸다. “세른은 다 타버린 빵도 버렸다고 적었어. 잘못 만든 걸 성공이라고 적으면 다음 사람은 그 빵을 믿고 기다리게 되니까.”
“그게 조리 기록을 남긴 이유군요.” 도현은 장갑의 글씨를 읽었다. 한국의 주방에서는 불량 재료를 폐기한 수량을 따로 기록하곤 했다. 혼나는 게 싫어서 기록을 없애 버리면 그날 저녁 어떤 식재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음식은 없어졌는데 숫자만 남기면 결국 누군가 배고파진다.
오르델이 등불을 들어 장갑 옆 작은 종이를 비췄다. 그 종이에는 하루분 배식표 대신, '내일 꼭 다시 가져올 것'이라는 세른의 손글씨가 있었다. 부엌은 부족함을 감추기 위한 기계가 아니라 부족함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였던 것이다.
가장 작은 작업대에는 빈 접시가 놓여 있었다. 접시 바닥에 손가락으로 적은 듯한 글자가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손님의 몫. 그 사람이 올 때까지 비워 둔다.]
브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7의자네요.”
“그래. 원래는 누군가를 대신 앉히라는 자리가 아니었어.” 에스텔이 눈을 감았다. “그걸 나는 알고 있었지.”
도현은 그녀를 바라봤다. 추궁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접시 뒤편에 놓인 기름종이 봉투가 사람의 숨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봉투를 쥐려 하면 손가락 모양의 검은 얼룩이 떠올랐다.
[정정 요청자는 처음 제공한 음식의 양과, 현재 제공할 수 있는 음식의 양을 구분하시오.]
도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주방에 왔더니 또 재고 조사라니.”
“왕궁의 비밀도 결국 주방 사정이네요.” 브론이 맞장구쳤다.
도현은 봉투를 열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처음 만든 음식의 양을 적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 세른의 첫 죽을 제가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정정 권한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만 남아 있는 건가요?” 아일린이 물었다.
에스텔이 입을 열었다. “세른은 마지막에 매듭을 세 가닥으로 묶었어.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받았는지, 누가 확인했는지. 한 사람이 세 가지를 모두 대신 쓰지 말라고.”
도현은 세 돌판을 다시 보았다. 첫 번째에는 죽을 만든 사람이, 두 번째에는 나눠 받은 사람의 수가, 세 번째에는 왕실이 아직 주지 못한 곡식의 양이 적혀 있었다. 숫자가 같지 않았다. 그래서 세른은 일부러 나누어 둔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그 원칙을 다시 시험했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한 사람의 실제 식사만큼 검은 돌이 떨어졌죠. 하지만 한 사람에게 모든 원본의 정정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오르델이 조용히 덧붙였다. “원래 조리자의 기록을 보존하고, 지금 실제 공급하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몫만 확인하면 됩니다. 원본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잘못 덧씌운 대리 기록을 분리하는 겁니다.”
봉투가 잠깐 진동했다. 마치 그 설명을 듣고 있는 듯했다. 곧 벽의 그림자에서 가는 글씨가 새어 나왔다.
[최초 제공자의 조리 기록은 보존된다.] [후대의 실제 제공은 독립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대리 수령의 변경 이력 열람 가능.]
세 번째 돌판 아래로 서랍 하나가 열렸다. 그 안에는 서명 없는 종이 한 장과, 붉은 밀랍으로 봉인한 작은 명부가 있었다.
오르델이 말했다. “이게 변경 이력이라면 대체 누가 거짓 계약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겠군요.”
그러나 명부를 꺼내기도 전에 복도에서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이른의 목소리였다.
“정정 이력 열람을 즉시 중단하십시오. 국가 공급 보증을 흔들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와 함께 들어온 병사들은 칼보다 긴 쇠막대를 들고 있었다. 문을 봉쇄하는 데 쓰는 도구였다.
아일린이 길을 막았다. “국가가 약속한 것은 공급이지 침묵이 아닙니다.”
도현은 서랍 안의 명부를 집지 않았다. 원본을 두고 싸우는 동안 문이 다시 닫히면 끝이었다. 그는 브론에게 낮게 말했다.
“식당에 연락하세요. 오늘도 저녁을 끓여야 합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나든.”
“주방장님은요?”
“누가 첫 번째 빵을 먹었는지 확인해야죠.”
베이른이 다가왔을 때, 세른의 빈 접시 밑에서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첫 제공을 시작한 사람은 한 명이 아니다.]
제19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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