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창고의 물은 발목까지만 차올라 있었지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깊이가 달라졌다. 어떤 곳은 무릎까지 빠졌고, 어떤 곳은 바닥이 없는 것처럼 어두웠다. 백도현은 밧줄을 허리에 감고 나무 기둥을 한 손으로 짚었다. 루카스가 앞에서 경로를 확인했고, 뒤에는 브론과 에스텔이 따라왔다.
“이곳에서 시간 감각을 잃지 마.” 에스텔이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바깥의 한 시간이 안에서는 며칠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그럼 몇 년 갇혀 있었던 사람도 실제로는 오래되지 않았을 수 있겠군요.”
“가능해. 하지만 반대로 바깥이 오래 지나는 동안 이곳은 멈춰 있었을 수도 있지.”
도현은 등불을 높이 들었다. 천장에는 검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벽에는 기근 당시 사용하던 식량 자루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자루 하나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니 속의 곡식은 이미 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루의 밑바닥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브론이 코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아무 냄새도 안 납니다. 원래 이런 곳에 오면 아주 많은 이야기가 들리는데요.”
“냄새가 이야기였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네. 누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얼 먹었는지, 겁을 먹었는지까지요. 갑자기 세상이 절반쯤 없어진 것 같아요.”
도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미역국 맛을 잃었을 때 자신도 비슷한 상실감을 느꼈다. 누군가 대신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같은 것을 겪는 것은 아니었다.
“브론. 지금은 제가 보는 걸 말해 줄게요.”
늑대인간은 고개를 들었다.
“왼쪽에 부서진 계단. 앞에 오래된 화덕. 오른쪽에는 빈 그릇 세 개. 우리가 처음 왕궁에 들어갔을 때는 당신이 길을 알려 줬으니까, 이번엔 제가 할게요.”
브론의 귀가 조금 펴졌다.
창고 중앙에는 길게 놓인 쇠선반이 있었다. 유리병 수백 개가 먼지 속에 꽂혀 있었고, 병마다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도현이 등불을 비추자 몇 병 안에서 작고 희미한 빛이 움직였다. 어떤 병에서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어떤 병에서는 오래된 노래 한 소절이 들렸다.
“기억을 보관하는 병이에요.” 에스텔이 속삭였다.
“누구한테서 빼앗은 겁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은 이름표를 확인했다. 이름 뒤에는 ‘대가 납부 완료’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이 기억을 내놓은 사람들이 실제로 동의했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레온의 숟가락이 미세하게 울렸다.
[미확인 채권 보관소.]
[보관량: 환산 불가.]
도현은 식은땀을 닦았다. 나중에 이 기억들을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병을 함부로 깨뜨리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병 위치를 기록합시다. 이동시킬 때는 하나씩 확인해야 합니다.”
루카스는 등불 아래에서 간단한 지도를 그렸다. 그 사이 에스텔은 선반 아래의 작은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배급 일지가 있었다.
[제8창고 보호 대상: 구호 조리사 및 배식 인력.]
[마리아, 상태: 조리 지속.]
[퇴실 조건: 최종 만찬 종료.]
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마리아가 여기 있습니다.”
그때 안쪽에서 밀가루가 날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멀리 걸려 있는 기름등 아래에 작은 주방이 보였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흰 앞치마를 두르고 반죽을 하고 있었다. 손목은 말라 있었지만 움직임은 정확했다. 밀가루를 접고, 바닥에 가볍게 내리치고, 다시 두 손으로 밀었다.
작업대 주변에는 갓 구운 빵이 끝없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빵의 표면은 이상했다. 방금 오븐에서 꺼낸 것처럼 따뜻한 것도 있었지만, 바로 옆의 빵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 장소라는 에스텔의 말이 떠올랐다.
화덕 옆에는 한쪽만 깨진 사기잔이 있었고 벽에는 아이 키를 재던 흔적이 연필로 표시되어 있었다. 도현은 가장 아래쪽 자국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리아, 일곱 살.]
“여기서 딸과 함께 지냈던 건가요?”
에스텔이 벽을 살폈다.
“아마 처음에는 같이 있었던 모양이야. 계약이 깊어지자 아이만 밖으로 나간 거겠지. 기억을 빼앗긴 채로.”
도현은 자신이 리아에게 구워 줬던 꿀빵을 떠올렸다. 아이가 엄마의 이름을 되찾던 그날, 자신의 미역국 기억이 사라졌다. 한 사람의 기억이 돌아오는 동안 다른 사람이 무엇을 잃는지 숨긴 세계였다. 그래서 다시는 무턱대고 저주를 옮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작업대 앞에서 숨을 골랐다. 눈앞의 여자가 지금도 딸을 기다리고 있다면, 무턱대고 그녀의 손을 잡아 끌기보다 먼저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했다. 오래된 약속이 반복되어 온 장소에서는 '곧 끝난다'는 말조차 더 큰 거짓말이 될 수 있었다.
“마리아 씨?”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공포보다는 놀라움이 먼저 떠올랐다.
“누구죠? 오늘 배식을 받으러 온 사람인가요?”
“리아의 친구입니다. 따님을 아시죠?”
손이 멈췄다. 그녀가 쥐고 있던 반죽 한 덩이가 작업대 위에 떨어졌다.
“리아가… 살아 있나요?”
도현은 목이 메었다.
“살아 있습니다. 어머니를 찾고 있어요.”
마리아는 한 발짝 다가왔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에스텔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여자의 입술은 몇 번이나 움직였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떠난 뒤… 얼마나 지났죠?”
“밖에서는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마리아는 벽시계를 바라봤다. 바늘은 같은 지점에서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는 하루도 끝나지 않았어요. 마지막 빵을 구워야 나갈 수 있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반죽을 끝내면 또 밀가루가 생겼어요.”
도현은 작업대 아래를 살폈다. 반죽이 담긴 그릇 아래에는 검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계약 이행 전 퇴실 불가.]
[최종 식사 제공 의무.]
“누가 이 의무를 주었습니까?”
“구호위원회 사람이요. 빵을 구우면 딸이 안전하다고 했어요.”
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보호를 조건으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방식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식탁 계약과 같았다.
그때 창고 입구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루카스가 검을 뽑았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 셋이 물길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투구 안쪽에는 아무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물러나십시오.” 루카스가 말했다.
병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명이 선반을 걷어차자 유리병이 흔들렸다. 도현은 순간적으로 마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반죽을 멈춰도 괜찮습니다. 딸의 안전을 이 빵에 맡길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그럼 같이 나가서 직접 확인합시다.”
도현은 그릇을 내려다봤다. 마리아가 밤낮 없이 반죽을 하도록 만든 것은 '최종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음식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언제까지나 붙잡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음식의 주인도 먹을 사람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작업대에서 남은 반죽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잘못된 재료가 섞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불이 살아 있는 작은 화덕의 온도를 낮췄다. 빵을 굽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리를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했다.
“마리아 씨. 이제 마지막 빵을 구울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만들었어요.”
그는 반죽을 네 조각으로 나눠 작은 빵을 만들었다. 마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하나를 집어 오븐에 넣었다. 빵이 부풀자 창고의 벽에서 오래된 체인이 달그락거렸다.
[최종 식사 제공 대상 미지정.]
[계약 이행 상태: 판정 불가.]
도현은 빵을 꺼내 한 조각을 마리아에게 내밀었다.
“누가 먹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으면, 먼저 만든 사람이 맛을 보고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마리아는 조심스럽게 한입을 베어 물었다. 뜨거운 김이 입가에 닿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렇게 먹어도… 괜찮은 거였어요?”
작업대 아래의 문양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문밖에서는 루카스가 병사들의 길을 막고 있었다. 브론은 후각을 잃은 대신 선반 사이를 뛰어다니며 밧줄과 널빤지를 모았다. 그는 무너진 선반을 밀어 병사들이 한꺼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을 좁혔다.
“주방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도현은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일어나세요. 밖으로 갑시다.”
마리아의 발목에는 아주 가는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도현이 일어서자 그 실이 화덕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에스텔은 실을 손끝으로 만지려다가 멈췄다.
“힘으로 끊으면 안 돼. 이건 계약의 문장 그 자체야. 끊는 순간 다른 사람이 대신 묶일 수 있어.”
도현은 식어 가는 작은 빵을 다시 보았다. 마리아는 자기 몫을 스스로 먹었고, 식탁은 더 이상 누구에게 음식을 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 불확실함이 실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는 빵의 나머지 조각을 천 위에 올려놓고 조리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 그릇은 지금 비어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식사를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요리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조리 종료 선언 감지.]
[기존 계약과 충돌.]
[강제 조리 유지: 일시 중지.]
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신 화덕으로 이어져 있던 선이 짧아져 마리아의 발목에만 남았다.
“저주가 끝난 건 아니군요.” 도현이 말했다.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아.”
도현은 마리아를 다시 붙잡았다. 문 쪽에서 루카스가 검을 휘둘러 병사의 접근을 막는 동안, 브론은 도현이 가져온 마른 빵 봉지를 문턱 앞에 던졌다. 병사들이 빵 냄새를 좇는 것처럼 움직였고, 그 틈에 루카스가 빈 나무 수레를 밀어 통로를 막았다. 적을 쓰러뜨린 것은 아니지만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다.
도현은 빵을 바라봤다. 저주받은 병사들이 반응한 것은 마법이 아니라 구호 식량의 익숙한 냄새일지도 몰랐다. 아직 확실한 원리는 몰랐다. 그는 나중에 확인할 수 있도록 일지에 간단하게 기록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창고의 등불이 차례로 꺼졌다. 물이 갑자기 발목 위로 밀려 올라왔다. 에스텔이 파란 불꽃으로 작은 길을 만들었다. 루카스는 사람들을 먼저 내보낸 뒤 마지막으로 따라왔다.
수문 아래의 좁은 통로를 통과하는 동안 마리아는 여러 번 뒤를 돌아봤다. 오랫동안 떠날 수 없었던 장소를 놓아 두는 일이 두렵고 낯선 듯했다. 그러나 브론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밖에는 따님이 기다립니다. 빵은 가게에 가서 구우셔도 돼요.”
마리아는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지상으로 나왔을 때 빗소리는 멎어 있었다. 구름 사이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에스텔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굳었다. 창고 안에서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바깥에서는 밤이 거의 끝나 있었다.
도현은 마리아가 가져온 낡은 배급 일지를 펼쳤다. 서명란에는 왕실 구호위원회 재정 대리인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잉크는 희미했지만 반복되는 일곱 개의 획은 선명했다.
[재정 대리인: 카르도.]
아래에는 최초 만찬의 왕실 결재란이 있었다.
[왕실 수혜자: 면제.]
[비왕실 수혜자: 후손에게 대가 승계.]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왕실은 굶주린 백성에게만 대가를 떠넘긴 것이었다.
그들이 구했다던 사람들에게 왕실 자신이 받아야 할 청구서까지 건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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