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왕도 북문에는 밀가루를 실은 마차 열두 대가 멈춰 있었다.
화물 주인은 왕실 식량안정위원회가 새로운 검사 서류를 요구했다고 불평했다. 서류의 이름은 ‘최종 정산 전 공급 연속성 확인서’였다. 그 안에는 낯익은 조항이 있었다. 수령 기관의 대표가 마차 한 대의 내용을 확인하면, 같은 번호로 묶인 다른 모든 마차도 수령한 것으로 본다는 내용이었다.
“열두 대 중 하나를 봤다고 열두 대를 다 받았다고 써야 한다니.” 브론이 말했다. “그럼 저는 빵 한 입 먹고 한 판을 먹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왕실은 좋아하겠죠. 요즘 장부에는 그런 손님이 제일 많으니까요.” 도현이 대꾸했다.
아일린은 세관장과 협상해 문제의 조항을 삭제한 임시 통행서를 발급받았다. 왕실 명의가 아니라 도시의 실제 창고 관리 책임자가 마차별로 수량을 확인하게 했다.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식량을 기다리던 주방들이 하나씩 불을 피웠다.
이벨은 그 과정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는 온실에서 가져온 일기를 들고 지하 기록을 읽어 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손의 열다섯 표식은 밤새 위치를 바꿨다. 첫 번째 표식은 서쪽을 가리키다가 아침에는 바늘처럼 아래로 향했다.
“저 표식이 사람의 위치를 알려 주는 건가요?” 하나가 통신편으로 물었다.
“아직 몰라요.” 도현이 답신을 남겼다. “증언이 보관된 곳일 수도 있고, 그저 장치가 전달하려는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오르델은 작은 나무판에 열다섯 개의 번호만 적었다. 이름은 쓰지 않았다. 이벨의 표식을 그대로 옮기지도 않았다. 오늘 필요한 것은 흔들리는 방향을 비교할 공간이었지, 사람 몸을 다시 공개 장부로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일행은 제2비교실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천칭이 없었다. 대신 길고 좁은 서랍이 열다섯 개 있었다. 맨 앞에는 주방용 뚜껑 같은 둥근 구리판이 매달려 있었다. 이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방을 기억해. 한 명의 목소리를 열다섯 명의 것으로 보냈던 곳이야.”
아일린이 물었다. “서랍을 열면 그분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나요?”
“찾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서랍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기 전에 ‘예’라고 대답하면 그 사람이 정말 여기에 동의했다고 기록될 거야.”
브론이 잠시 생각했다. “그럼 아무 말도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첫 번째 서랍이 저절로 열렸다.
“저를 찾으러 왔습니까?”
흐린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오랫동안 울다 지친 듯한 소리였다. 브론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도현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말이 실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랍에서는 오래된 밀가루 영수증과 조리용 끈이 나왔다. 아일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끈의 매듭은 첫 겨울의 부엌에서 본 세른의 세 갈래 매듭과 달랐다. 두 번 묶고 한 번 풀어 둔 형태였다.
“이건 저희가 모은 증언 문서에서 봤어요.” 오르델이 말했다. “북부의 마르타가 다른 사람과 기록을 구분하려고 만들었던 매듭입니다.”
“마르타는 돌아왔잖아요.”
“그러니 서랍에 남은 것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과거 증언의 복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도현은 긴 숨을 내쉬었다. 하나의 서랍이 열렸다고 또 한 사람을 구했다고 선언할 뻔했다. 이 부엌은 계속 같은 함정을 펼쳐 놓았다. 기록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없애 버리는 함정.
세 번째와 네 번째 서랍의 표지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오래된 빵가루가 굳어 글자를 덮었다. 오르델은 그것을 함부로 긁어 내지 않았다. 대신 옆에 남은 부속 기록과 대조하기로 했다.
“이름이 지워진 사람의 흔적을 찾으려다 글자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브론이 작은 등불을 비추었다. 빵가루 위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생기며 희미한 숫자가 드러났다. 둘 중 하나는 북부 첫 겨울의 부엌과 연결됐고 다른 하나는 벨로스 항구의 제0접안지를 가리켰다.
아일린이 물었다. “그럼 그분들이 북부와 벨로스에 있나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이벨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지나간 장소, 물건이 저장된 장소일 수 있어. 처음 우리가 끌려갔을 땐 다들 각자 다른 방으로 가게 됐거든.”
도현은 가슴이 답답했다.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길이었다. 그는 식당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손님은 배가 고프다고 했고, 그는 요리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문장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산맥과 항구를 돌아야 했다.
그때 다섯 번째 서랍에서 구리 숟가락 하나가 굴러 나왔다. 손잡이에는 '아직'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오르델이 종이에 그대로 적었다.
“아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브론이 물었다.
“아직 못 받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직 기다린다는 뜻일 수도 있죠. 혹은 누군가 자기 이름 대신 남긴 단어일 수도 있고요.”
아일린은 숟가락을 원래 자리에 두었다. 이유를 모르는 물건을 함부로 챙겨 가는 것은 증언을 훔치는 또 다른 형태일 수 있었다.
그들은 작은 문틈에 남아 있던 천 조각을 확인했다. 직물이 낡았지만 염료의 색은 선명했다. 어두운 녹색 바탕에 흰 실이 세 번 꿰매져 있었다. 이벨은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저건 타린이 쓰던 천은 아니야. 나는 저 무늬를 본 적이 없어.”
그 말은 실망스럽지만 중요한 증거였다. 모두가 이벨이 모든 사람을 기억하길 바랐지만, 그 기대는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일이었다.
도현은 출입구의 시계를 확인했다. 한 방에서 오래 머무른 사이 시장의 수프는 식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남은 서랍의 겉면만 기록한 뒤 다음 조사 일정을 따로 잡았다. 세상 모든 서랍을 오늘 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두 번째 서랍에서는 산소가 거의 없는 듯 눅눅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낡은 제빵 장갑과 두툼한 반죽 저울의 추가 있었다. 이벨의 어깨가 떨렸다.
“타린의 물건이야. 저울을 들고 다니면서 빵을 직접 세던 애.”
서랍 안쪽에는 비밀 칸이 있었다. 그러나 자물쇠 옆에 적힌 문장은 짧고 잔인했다.
[원검수인이 직접 열 것. 다른 사람이 열면 본인이 동의한 것으로 대신 기록됨.]
“열지 맙시다.” 도현이 말했다.
에스텔이 낮게 물었다. “그 애가 죽었다면 영원히 못 열 수도 있어.”
“그럴 수 있죠. 그래도 죽었다고 가정해서 대신 열 수는 없잖아요.”
이벨은 도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던 일기를 꺼냈다. 오늘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뜻으로 한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타린과 나눈 대화가 적혀 있었다.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세 번째 구리추를 먼저 찾아. 사람을 찾지 못해도 거짓말을 찾을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는 보여 줘도 돼.” 이벨이 말했다. “다른 쪽은 아직 안 돼.”
“이걸로 충분합니다.”
그들은 열다섯 서랍 모두의 표지를 외부 기록으로 옮겼다. 하지만 몇 개가 실제 생존자와 연결됐는지, 어디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열다섯 개의 방향을 그린 지도는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서쪽으로 간 선이 다시 왕도로 돌아왔고, 왕도에 있던 선은 북부 첫 겨울의 부엌 아래로 이어졌다.
해 질 무렵 마지막 서랍에서 금속성 소리가 났다. 안에서 누군가 두 번 두드리고 한 번 쉬었다. 모두 숨을 죽였다. 이것은 제4화덕에서 이벨이 남겼던 신호와 달랐다.
오르델은 종이에 적었다. [새 신호. 발신지 미확인. 사람의 구조 요청인지 미확인.]
그때 문밖에서 경비병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전하! 서쪽 항구로 향하는 빵 운송이 전면 중단됐습니다!”
아일린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주를 붙잡은 장치가 사람의 밥을 인질로 삼기 시작했다. 이제 기록만 읽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제18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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