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벨의 손바닥에 남은 열다섯 개의 화상은 작은 밀 이삭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각 표식의 모양은 조금씩 달랐다. 하나는 소금 결정 같았고, 다른 하나는 유리꽃처럼 갈라져 있었다. 브론은 그것을 보고 제2저장고에서 가져온 표식 목록을 떠올렸다. 똑같은 열다섯 개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먼저 이벨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림으로 옮겨도 될까요?”
이벨은 손을 움켜쥐었다. “저 문신을 본 사람들은 다 내 몸을 장부로 만들려고 했어.”
“그럼 안 하겠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브론도 물러났다. 오르델은 그 일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기 전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벨은 자신이 거절한 것이 정말 거절로 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듯 모두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예전에는 열여섯 명이었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왕실이 제공했다고 주장하는 식사를 검증하라고 보내졌지. 비어 있는 냄비, 없어진 밀가루, 일하지도 않은 사람 이름으로 적힌 수령표를 봤어. 우리가 거절하자 기록관들이 말했다. 서명이 없어도 너희가 보고 들은 건 국가의 자산이라고.”
“그래서 목소리를 가져간 겁니까?” 오르델이 물었다.
“내가 다 본 건 아니야. 사람마다 다른 곳으로 끌려갔고, 나는 그중 두 곳밖에 몰라.”
그녀는 숨을 고른 뒤 손목의 화상을 바라보았다. “이 표식은 다른 사람의 목숨이 내 안에 있다는 뜻이 아니야. 그들의 증언이 모두 나를 거쳐 가도록 만든 흔적이야.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의 거절을 내 목소리로 대신 읽도록 강요받았어.”
도현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중앙 명부실과 제2저장고에서 들은 목소리는 일부가 원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강제로 다시 읽게 한 문장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동일한 말투와 날짜가 반복된 이유도 설명됐다.
“그래서 기록을 지워 버리면...”
“증언의 길까지 사라질 거야. 하지만 내 이름을 기록에서 풀면 열다섯 개의 도착지가 다시 나타날 수 있어.”
아일린은 조용히 물었다. “풀기 위한 방법은요?”
이벨의 시선이 공주의 검은 왕관을 스쳤다. “왕실의 이름으로 누군가 대신 책임진다고 선언하지 마. 그것이 우리를 여기 묶어 둔 첫 문장이니까.”
도현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그녀를 발견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제 한 사람을 구했다’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아직 이벨은 마을 밖으로 안전하게 나가지도 못했다. 신분 확인은 절차가 필요했고, 손의 표식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 오늘 목표는 단순합니다.” 그는 말했다. “이벨 씨가 원하시면 여기서 나와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것. 그분이 원치 않으시면 먼저 머물 곳을 만드는 것.”
이벨이 그를 바라봤다. “다른 열다섯 명은?”
“찾겠습니다. 다만 당신을 다시 부엌에 집어넣으면서 찾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는 온실 마을에서 보호할 방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벨은 오래된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며 마을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 에스텔은 자신의 식당에서 쉬어도 된다고 제안했다. 이벨은 즉시 거절했다.
“그 집은 네가 문을 잠갔던 곳이야.”
에스텔의 입술이 떨렸지만 고개를 숙였다. “그래. 다른 곳을 찾아보자.”
브론이 주변을 둘러보다 말했다. “루덴의 마르타 씨는 어떨까요? 그분도 돌아와서 어느 집에서 잘지 직접 정했잖아요.”
도현은 마르타에게 먼저 부탁할지 말지 이벨에게 물었다. 이벨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는 말에 한참 생각하다가 동의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과 몸의 표식을 아직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오르델은 그 약속을 기록으로 남겼다. 마르타에게는 안전한 숙소와 경험을 나눌 의사가 있는지만 묻고, 자세한 사정은 본인이 직접 결정할 때 전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베이른의 관리인이 다시 찾아왔다. 이벨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미확인 기록 한 건이 제4화덕에서 분리되었다며 회수 명령을 내렸다.
“회수라니요? 물건이 아닙니다.” 아일린이 말했다.
“증언 보관물의 귀속 권한은 위원회에 있습니다.”
“증언의 원본과 사람을 같은 물건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오르델이 반박했다.
관리인은 법령을 읽어 내려갔다. 도현은 그 문장 끝에 도달하기 전에 물었다.
“실제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장부에 나온 기록을 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관리인이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벨의 신원도, 현재 위치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기록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도현은 그의 선언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적었다.
[위원회, 생존 여부 미확인 대상을 물품으로 취급하여 회수 명령.]
관리인은 화를 냈지만 오르델은 문장 하나도 고치지 않았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밤은 평온하지 않았다. 누군가 과수원 근처에 경고용 횃불을 세웠고, 저장실 입구에서는 왕실 관리인이 남긴 봉인 흔적이 발견됐다. 브론이 냄새를 맡아 보니 베이른과 함께 온 관리인 중 한 명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당장 쫓아가야 합니까?” 브론이 물었다.
“경비를 늘리고, 어떤 사람인지 확인합시다.” 아일린이 말했다. “상대의 의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 괜히 충돌을 키우면 이벨 씨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그들은 마을 주민들과 밤 경비를 두 조로 나눴다. 이벨에게도 사정을 설명하고 떠날 시각을 미룰지 물었다. 그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나가겠어. 내가 여기서 더 오래 있으면 그 사람들이 다시 ‘동의하지 않고 머문 시간’을 빚으로 적을 거야.”
도현은 그 말에 화가 났지만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다. 이벨이 원한다면 정말 떠날 수 있게 해야 했다. 하나는 길을 따라 마을마다 안전한 쉴 곳을 미리 확인했다. 오르델은 왕실 인장을 쓰는 대신 동행인들의 실명과 맡은 역할만 적어 공동 보관했다. 누구도 이벨에게 이유를 적어 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출발 직전 브론은 작은 빵 봉지를 내밀었다. “제가 만든 겁니다. 모양은 별로지만 맛있습니다.”
이벨은 봉지를 받지 않고 물었다. “값은?”
“제가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안 받으셔도 됩니다.”
“그럼 하나만 받아도 돼?”
“물론이죠.”
이벨은 빵 하나를 꺼냈다. 잘 익지 않은 모서리를 떼고 한입 베어 물었다. 브론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잠깐 후 이벨이 말했다.
“밀가루가 너무 많아.”
“맛없습니까?”
“나쁘진 않아. 다만 다음엔 물을 조금 더 넣어.”
브론은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것보다 솔직한 조언을 받는 일이 더 기뻐 보였다.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이벨은 오랜 시간 남을 위한 식사를 제공한 것으로 기록됐지만, 지금은 드디어 자기가 먹을 빵의 맛을 판단하고 있었다.
마차 앞에서 에스텔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네가 돌아오면 함께 만들고 싶은 빵이 있어.”
이벨은 한참 그녀를 보았다. “그때 가서 결정할게.”
“그래.”
그 말로 충분했다.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에스텔은 이번에는 문을 닫고 달아나지 않았다.
다음 날 이벨은 온실 밖으로 나왔다. 하나와 브론이 동행했고, 에스텔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아일린은 공식 병력이 아니라 시민 보호 인력을 배치했다. 누구도 이벨이 문턱을 넘는 순간 완치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이벨은 오래된 과수원 앞에서 멈췄다. 나무가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은 땅이었다.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씨앗을 꺼냈다.
“나갈 때마다 하나씩 심었어.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
하나는 무릎을 꿇고 흙을 만져 봤다. “봄이 오면 다시 심을 수 있어요. 이번에는 나무가 자라면 지우지 않을 거예요.”
이벨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펴 도현에게 보여 주었다.
열다섯 표식 중 가장 끝에 있던 하나가 검은빛을 내기 시작했다.
[기록 소유자 이동 감지.] [잔여 증언 15건의 원위치 복귀 절차 시작.]
“잠깐.” 이벨이 말했다. “내가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 이 기록이 움직인다고?”
도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바라던 자유가 또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흔들고 있었다.
제17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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