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은 책에 손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저장실은 오래된 과일 향으로 가득했다. 선반에는 말린 배와 빈 병이 놓여 있었고 벽 한쪽에는 사람들이 남긴 높이 표시가 남아 있었다. 가장 높은 선은 성인 여성의 어깨 높이 정도였다. 그 바로 아래에 새로 그은 것 같은 짧은 선이 있었다.
“최근 누가 사용했다는 뜻일까요?” 브론이 물었다.
“가능성은 있어요. 그러나 온실에는 시간을 늦추는 마법이 있었으니 아직 확인이 필요합니다.” 오르델이 말했다.
에스텔은 표지에 적힌 이름을 가만히 읽었다. 이벨이 쓰던 필체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요리사들처럼 글씨가 급해지면 획이 비뚤어졌다는 점만 떠올랐다.
책은 오르델이 장갑을 낀 채 펼쳤다. 첫 장에는 온실의 오래된 온도와 식량 보관 방법이 적혀 있었다. 몇 장을 넘기자 날짜 대신 그날의 날씨와 음식이 적혔다. ‘서리가 내린 날, 남은 배로 잼을 만들었다.’ ‘쥐가 들어오지 않도록 밀가루를 높은 선반에 올렸다.’
“요리 일기네요.” 도현이 말했다.
“그래. 이벨다운 기록이야.” 에스텔이 대답했다.
마지막 쪽에 가까워질수록 글씨가 불안정해졌다. 왕실 조사관이 제공 완료 장부를 들고 와 실종된 요리사들의 이름으로 서명하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벨은 거부했고, 목소리와 손글씨를 대신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
[우리는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지워질 수 있다면, 누군가 빈 접시를 보관해야 한다.]
다음 장에는 책장이 뜯긴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아주 짧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일 밤 물길이 열리면 배를 돌려 보내겠다.]
‘내일 밤’이라는 말은 언제 적힌 것일까. 이곳의 시간이 제대로 흘렀다면 백 년이 넘은 일기였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배 껍질과 화덕의 최근 신호는 다른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다.
오르델은 책의 접힌 부분에서 종이 섬유를 조금 떼어 마법 검사에 맡겼다.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브론은 저장실의 그릇을 살폈다. 사용한 흔적이 있는 그릇이 둘이었다. 한쪽에는 아주 오래된 검은 얼룩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물에 씻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가 여기서 최근에 먹었다면?” 브론이 물었다.
도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최근 사용 흔적처럼 보이는 물건을 계속 보여 주는 장소에서는 무엇이든 반대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릇은 누군가의 생존 증거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유인하려는 장치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방 안의 식량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실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몫일 수 있었다. 물건마다 발견 위치를 적고, 저장실 문이 바깥쪽에서 잠길 수 없는 구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기에 적힌 가장 오래된 조리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배를 잘게 썰어 말린 뒤 불을 약하게 낮춰 부드럽게 익히는 것이었다. 이름은 ‘돌아오는 사람의 수프’. 옆에는 특이한 문장이 붙어 있었다.
[늦게 온 손님에게는 무슨 사정인지 캐묻지 말 것. 먼저 물을 드리고, 배가 고프다고 말한 뒤에만 수프를 끓일 것.]
도현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누군가를 살리려 한다는 마음만으로 상대의 허락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이벨은 그 당시부터 저주의 방식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조리법의 수치도 살폈다. 원래 기록에서는 배를 아주 낮은 온도로 익히며 물을 두 번 나누어 넣었다. 첫 번째는 과육이 타지 않게 하기 위한 물, 두 번째는 마지막에 남은 향을 살리기 위한 물이었다. 무조건 오래 끓일수록 좋다는 주술 조리법과는 달랐다.
“누가 이 요리를 해 주면 좋겠습니까?” 아일린이 물었다.
“먼저 먹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야겠죠.”
브론은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두 시간 전에 감자 수프를 세 그릇이나 먹었잖아요.”
“조리는 연구입니다.”
“시식이라고 다 연구는 아니죠.”
브론은 시무룩해졌지만 이내 일기 속 수프가 정말 맛있을지 궁금해졌다며 웃었다. 도현은 그에게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주기로 했다. 다만 아직 저장실에 남아 있는 배는 누군가의 몫일 수 있으니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마을에서 정당하게 구입한 작은 배 세 개를 가져왔다. 브론은 서툰 손으로 껍질을 벗겼고 하나는 남은 배를 깎아 접시에 놓았다. 도현은 조리법이 이벨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이 만든 요리처럼 팔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익힌 배에서는 풀처럼 풋풋한 향이 먼저 올라왔다가 이내 꿀과 비슷한 단내가 번졌다. 완성된 수프는 의외로 묽었다. 브론은 입술을 오므리고 한 숟갈을 떠먹었다.
“달아요. 그런데 설탕 맛은 아닙니다.”
“배 자체의 단맛이죠.”
“이벨 씨가 왜 이 요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에스텔은 그릇을 받지 않았다. 아직 맛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도현은 그 선택도 존중했다. 돌아오는 사람을 위한 음식은, 정작 그 사람이 오기도 전에 그를 기다리는 이들 마음을 서둘러 달래는 데 쓰여서는 안 됐다.
저녁 무렵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일기의 본문 대부분은 매우 오래된 것이 맞았다. 다만 마지막 장의 잉크에는 최근의 수분이 남아 있었다. 새로 쓴 글인지, 오래된 글이 다시 젖은 것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에스텔이 물었다. “마법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언제 쓴 글인지 알 수 있을까?”
“여기서 그런 마법을 쓰면 증거와 실제 사람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릅니다.” 도현이 말했다.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방 안에 남은 작은 화덕을 바라보다가 더는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그날 밤 누군가 마을 회관 문을 두드렸다. 하얀 외투를 입은 관리인이었다. 그는 베이른의 명령서를 읽으며 이번 조사의 모든 기록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종이 아래에는 도현을 포함한 여섯 명의 이름이 이미 적혀 있었다.
“우리가 현장에 있던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브론이 물었다.
관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서류의 하단에는 수신 확인이 자동으로 붙고 있었다.
[수신 완료 예정: 6명.]
“예정이라는 말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르델이 말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 한 명도 수령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일린은 서류를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내용을 읽었다. 공주가 문서 열람을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수령 확인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록하게 했다. 관리인이 돌아간 뒤 마을 회관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저 사람들이 더 빨리 움직이는 건, 우리가 정답에 가까워졌기 때문일까요?” 하나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추측이에요.” 도현이 말했다. “다만 증거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일기 사본을 세 부 만들었다. 하나는 마을에, 하나는 왕궁에, 하나는 아직 정하지 않은 제3의 보관소에 두기로 했다. 이벨의 개인정보와 생존 여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누군가 일기의 주인인 척 나타나 목소리를 가져갈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직전, 브론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꼬리털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주방장님. 저장실에 다녀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건 아니고 밖에서 냄새만 확인했어요.”
“무슨 냄새죠?”
“어제는 배 껍질 냄새만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브론은 잠깐 말을 멈췄다.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납니다. 식은땀하고... 약간 탄 밀가루 냄새도요.”
도현은 일어났다. “그 냄새가 밖으로 나왔습니까?”
“예. 저장실 밖까지 걸어 나온 흔적이 있어요.”
그들은 횃불을 들고 달려갔다. 제4화덕 뒤쪽 눈 쌓인 흙에는 밤새 생긴 발자국이 있었다. 작은 신발 한 켤레가 남긴 자국이었다. 바깥을 향한 발자국은 있었지만, 안쪽으로 들어간 자국은 없었다.
그리고 발자국 끝에서, 누군가가 직접 칼로 벗긴 배 껍질 한 줄이 발견되었다.
껍질 안쪽에는 작고 떨리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목소리를 쫓지 마. 나를 쫓아와.]
제17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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