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은 나팔을 내려놓았다.
“이벨이야.”
그 이름을 듣고 오르델이 곧바로 문서 목록을 펼쳤다. 제2저장고에 남은 미확인 요리사 열여섯 명 가운데, 세 번째 줄에 이벨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다만 이름 옆의 상태란은 ‘생존’도 ‘사망’도 아닌 ‘제공 권리 양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벨이 누구죠?” 도현이 물었다.
“첫 겨울이 끝난 뒤 이 식당에서 일한 요리사야. 오랫동안 빵 반죽을 맡았지. 비가 오는 날이면 항상 그 노래를 불렀어.”
“그분이 실종자 중 한 명이라고요?”
“그래. 하지만 방금 목소리가 정말 그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어.”
에스텔은 입술을 꽉 물었다.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경계를 말했다. 도현은 그녀가 한 번 더 거짓 희망에 속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었다.
새벽이 되자 그들은 안쪽 통로의 안전 점검을 시작했다. 하나가 온실의 수위판을 확인하고, 장인들이 보강한 돌기둥에 번호를 매겼다. 브론은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크기로 관을 넓히는 것보다 새로 발견한 옛 배수 문을 열어 수로를 비우는 편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두 시간은 걸립니다.”
“두 시간이면 가죠.” 도현이 말했다. “누가 안에 있다면 더 이상 무너지게 만들면 안 됩니다.”
아일린은 왕궁에 구조 인력을 요청했지만, 베이른의 감리 기록 때문에 공식 파견이 보류됐다. 불과 어제 왕국의 오래된 기관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그 권한으로 구조 요청까지 멈추고 있었다.
하나는 분개했다. “그럼 저희가 직접 물을 빼겠습니다.”
“혼자 하지 맙시다.” 도현이 말했다. “온실의 물길을 가장 잘 아는 분들이 방향을 결정하세요.”
마을 사람들은 동쪽 수로를 막는 대신 아래쪽 저장 연못으로 물을 돌리는 계획을 만들었다. 한쪽을 살리려고 다른 쪽 밭을 잠기게 하면 의미가 없었다. 장인들은 마을 회관에 설계도를 붙이고 작은 돌로 물의 흐름을 보여 주었다. 의견이 갈리자 하나는 손을 든 사람들을 차례로 불렀다.
에스텔은 말없이 지켜봤다. 그녀가 알고 있던 첫 겨울의 부엌도 이런 곳이었다. 왕이 내려 준 구호 명령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작업을 나누던 자리였다. 그 기억이 돌아올수록, 자신이 몇 세대 동안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것이 무거워졌다.
마을 회의가 끝나자 에스텔은 도현을 따로 불렀다.
“내가 알고 있는 이벨 이야기를 할게.”
에스텔이 기억하는 이벨은 빵 반죽을 잘했지만 수프를 끓이는 데는 서툴렀다. 어느 날 손님이 가져온 검은 밀을 거절했고, 그 뒤로 왕실 조사관에게 끌려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먹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남겨 달라’였다.
“그때 난 식당 문을 잠갔어.” 에스텔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다른 직원들까지 잡혀갈까 봐. 그러고는 이벨이 어디로 갔는지 찾지도 못했지.”
“그 일을 바로잡는 데 지금 시간이 걸리는 거군요.”
“미안해.”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이벨 씨가 정말 살아 있다면 그분께 직접 할 말이 있겠죠.”
도현은 에스텔이 기억을 말할 때 얼마나 자주 손가락을 꽉 쥐는지 보았다. 그녀는 한때 이벨과 함께 빵을 구웠던 장면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 겨울비가 쏟아지던 날, 손님 하나가 밀가루 대신 얼음처럼 차가운 돌가루를 가져왔다. 이벨은 돌가루로는 빵을 구울 수 없다고 했다. 손님은 금화를 두 배로 내겠다고 제안했다.
“넌 어떻게 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손님이 저주받은 돌이라고 해서 먹을 수 있게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지. 이벨은 더 단호했어. ‘손님이 배고프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 사람에게 돌을 먹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그날 그들은 돌가루를 돌려보내고 남아 있던 보리로 작은 빵 세 개를 만들었다. 두 개는 손님에게 팔고 하나는 직원끼리 나눴다. 아무도 저주를 얻지 않았고 특별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에스텔은 그날의 냄새를 아직 기억한다고 했다.
“그 애는 밀가루가 부족할수록 손을 더 오래 씻었어. 반죽 한 줌도 버리지 않으려고.”
“꼼꼼한 분이셨네요.”
“고집도 셌지. 내게도 틀렸다고 말했으니까.”
에스텔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후 왕실 조사관이 찾아와 식당 문을 두드렸을 때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랐다. 겁이 나서 뒷문으로 도망쳤다. 돌아왔을 때는 이벨이 사라져 있었다. 식당 벽에는 검은 밀 가루가 손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일을 이벨이 스스로 떠난 걸로 생각하려고 했어.”
“그렇게 생각하면 견디기 쉬웠겠죠.”
“그렇지.”
도현은 그녀를 쉽게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 마을 회의에 참석했던 이벨의 친구들이 남긴 증언을 떠올렸다. 숨겨진 일은 마녀 한 사람의 마음속에만 남아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언젠가 에스텔은 이벨 앞에서 직접 선택해야 할 것이다.
“살아 계신다면 그분은 당신이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알아.” 에스텔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찾고 싶어. 이번에는 문을 잠그고 숨지 않으려고.”
바깥에서 브론이 그들을 불렀다. 물길이 바뀌었다는 소식이었다. 에스텔은 눈가를 닦고 일어섰다. 사과할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문이 다시 닫히지 않게 지키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 물길이 바뀌면서 제4화덕 아래의 수로 수위가 내려갔다. 원래 벽 뒤에 숨어 있던 작은 돌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에 새겨진 표식은 제2저장고에서 보았던 열여섯 개의 증언 번호 중 세 번째와 일치했다.
오르델은 날짜를 대조했다. 이 문은 이벨이 실종된 뒤 몇 해가 지나서야 만들어졌다. 누군가 그녀가 사라진 다음 그녀의 번호를 붙였다는 뜻이었다.
“번호가 같다고 이벨이 안에 있다고 단정하면 안 되겠죠.” 브론이 말했다.
“맞습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 번호가 언제 새겨졌는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 주변의 굳은 진흙층을 살폈다. 다른 곳에 덧댄 돌과 달리 이 부분만 수십 년 전 동부 온실을 보수하던 시기의 흙을 썼다. 사람이 안에 갇혔을 가능성도, 오래된 기억을 문에 봉인했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았다.
도현은 문 앞에서 다시 말을 걸었다. “안에 계신 분, 저희는 밖의 물을 뺐습니다. 곧 문을 열 예정입니다. 열면 위험할까요?”
이번에는 세 번이 아니라 한 번의 짧은 두드림이 들렸다. 하나가 미리 정한 신호대로라면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만으로 안전을 확정하지 않았다. 돌문과 연도를 살피고, 내부 압력이 없는지도 확인했다.
브론이 마지막 잠금 장치를 잡으려는 순간, 문 안쪽에서 금속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스스로 열리는 자물쇠가 아니라 누군가 손으로 빗장을 미는 소리였다.
도현의 가슴이 빨리 뛰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며 드러난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빈 철제 선반, 오래된 그릇, 그리고 모서리에 주름진 책 한 권이었다.
책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읽어 주세요. — 이벨]
그 아래에 방금 묻은 것처럼 선명한 물자국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제1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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