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나타난 것을 보고 도현은 오히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처음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놀라서 손을 뻗었다. 그 손길이 또 다른 동의로 기록될까 봐 두려워하기도 했다. 지금은 적어도 저것이 자신이 한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보라고 적혔네요.”
베이른이 인장을 움켜쥐었다. “기록상 적격자가 발견된 것뿐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대신해 먹을 의사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명부는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자격을 확인할 뿐이지요.”
아일린이 옆으로 나섰다. “누군가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자격은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베이른의 미소가 잠깐 굳었다. “왕국의 위기는 개인의 선호보다 우선합니다.”
“그 말을 백 년 전부터 반복했군요.” 에스텔이 낮게 말했다.
도현은 명부 앞에 놓인 인장 받침을 돌아보았다. 가운데가 살짝 파인 나무판이었다. 원래는 음식 그릇을 받치던 도구였을지 몰랐다. 표면에는 수십 번 덧칠한 밀랍의 흔적이 남았다. 각 세대의 관리들이 저마다 ‘누군가 대신 받아야 한다’는 문장을 덧씌웠던 자리였다.
“현장의 위험부터 해결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저런 이름은 그다음에 다투죠.”
브론은 감리관들과 도현 사이에 섰다. 하나와 관리인들은 배수관 쪽으로 통행로를 만들었다. 금속판이 다시 움직이지 못하도록 오르델이 원래 연결 상태를 기록한 뒤, 증인 입회하에 자동 번역 장치의 전원을 분리했다. 진동을 받는 장치는 남겨 두었다.
명부에서 도현의 이름이 흐릿해졌다.
[대체명 지정 일시 중단. 수령 사실 미확인.]
“중단이라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브론이 투덜거렸다.
“그래서 원본과 사유를 남깁니다.” 오르델이 대답했다.
베이른은 분노한 얼굴로 기록 사본을 요구했다. 아일린은 현장에서 작성된 모든 사본을 한 부씩 제공하되, 원본은 온실 관리인들과 왕궁 보존고가 각각 보관하겠다고 말했다. 베이른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갈 때 남긴 말은 날카로웠다.
“저 통로에 누가 있든, 장부가 완결되지 않으면 왕국은 겨울을 견디지 못할 겁니다.”
“실제 겨울은 오고 있죠.” 하나가 말했다. “그러니 장부보다 밀을 심어야 합니다.”
베이른이 떠나자 사람들은 다시 숨을 쉬었다. 그때 도현은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왜 감리관은 통로 안쪽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 하지 않았을까. 저 장부를 고쳐야 한다는 명령만 내려온 것이라면, 누가 구조를 요청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리인이 떠난 뒤 하나는 과수원 노동자들을 모아 작은 회의를 열었다. 베이른이 고발장을 제출하면 일감이 중단될 수도 있었고, 배급을 기다리던 가족들은 더 어려워질 수 있었다. 누군가는 조사를 포기하자고 했다. 누군가는 왕실을 믿느니 밭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했다.
도현은 의견을 내지 않고 들었다. 그는 이곳 주민이 아니었고, 온실의 겨울을 끝까지 살아 낼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었다.
“주방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한 노동자가 물었다.
“제가 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왜 여기까지 왔습니까?”
“누가 안에서 위험하다고 했는데 그 말을 동의로 바꾼 걸 봤어요. 그게 틀렸다는 건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마을이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할지는 여러분이 결정하셔야죠.”
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하나가 손을 들었다. “우리는 제4화덕을 그냥 닫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보존고에서 주장하는 위험을 듣고, 작업하는 사람은 누구나 빠질 수 있게 하죠.”
오래된 기술자 하나가 말했다. “나는 무릎이 좋지 않아서 땅은 못 파겠소. 대신 물길을 기록해 두겠소.”
젊은 노동자는 밤 경비를 맡겠다고 했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사람은 음식 준비를 하기로 했다. 하나는 자기가 제일 용감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 할 일을 나누자 모두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보며 마음이 놓였다.
회의가 끝나자 도현은 작은 나무판을 세웠다. 그 위에 단 한 가지를 적었다.
[도움은 청할 수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식사 수령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브론이 판을 보며 웃었다. “이번엔 메뉴판이 아니군요.”
“메뉴판보다 중요한 안내문도 있더라고요.”
“그럼 이 안내문 값은 얼마입니까?”
“당신 월급에서 공제합니다.”
“아니, 왜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그들은 판 아래에 각자의 서명을 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몫을 대신 받겠다는 서명이 아니라 자기 의사를 기록해 두겠다는 약속이었다. 처음으로 서명을 무서워하지 않고 이름을 적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오후 그들은 외부를 더 파지 않았다. 대신 안쪽과 대화할 수 있는 별도 통로를 만들기로 했다. 서리로 약해진 지반을 버티게 할 목재를 설치하고, 수로를 일시 우회시켰다. 원래 과수원 주인들의 후손이 동의한 구간부터 작업했다. 도현은 작업자들을 위해 식사 준비를 돕겠다고 했지만, 에스텔이 그를 멈춰 세웠다.
“네 손은 아직 칼을 잡을 수 없어.”
“말로는 메뉴를 짤 수 있죠.”
그는 니아에게 받은 건조 재료 목록을 펼쳤다. 감자와 배, 말린 콩, 남은 보리가 전부였다. 오르델이 식량 지급 내역을 살펴보니 과수원 노동자들에게 들어갈 몫까지 베이른의 사무소에서 ‘조사 중’이라며 묶어 둔 상태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녁을 못 먹는다고요?” 브론이 물었다.
“행정 절차상 잠시 보류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는 보류라는 말을 씹어 먹어 본 적이 없는데요.”
하나가 웃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들은 지금 가진 재료로 먹을 수 있는 분량부터 계산했다. 식사 인원과 주문 의사를 확인하니 모두 열두 명이었다. 배가 아픈 관리인은 기름진 음식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고, 따뜻한 수프만 먹겠다는 이도 있었다.
도현은 감자를 얇게 썰어 콩과 함께 끓이고, 배를 졸여 소량의 산미를 더하자고 제안했다. 손질은 하나와 브론이 맡았다. 각자 하는 일은 달랐지만 완성된 냄비는 하나였다. 에스텔은 불 온도를 조절하면서 도현의 왼손을 눈여겨보았다.
“계속 참으면 더 굳을 거야.”
“압니다.”
“알면서 자꾸 괜찮다고 하잖아.”
도현은 한참 뒤에 대답했다. “손이 아프다고 할 때마다 누군가 제가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봐요. 그런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에스텔은 대답 대신 도현 앞에 의자를 놓았다. “그럼 의자에 앉아서 아프다고 말해도 되는 사람부터 되자.”
도현은 웃으며 앉았다. 그가 요리를 직접 하지 않는 동안에도 냄비에서는 따뜻한 향이 났다. 작업자들은 각자 그릇을 받고 자신이 먹은 양만큼 적었다. 먹지 못한 사람의 빈칸은 남겨 두었다.
한 청년이 숟가락을 멈추고 물었다. “저 안에 있는 사람 몫도 남겨야 할까요?”
“남길 수는 있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다만 그 사람이 먹었다고 적지 마세요.”
그들은 남은 수프를 온기가 보존되는 작은 솥에 따로 담았다. 만약 누군가 실제로 있다면 구조 뒤에 먹을 수 있도록. 그렇지 않다면 다음 날 다른 작업자에게 내놓을 수 있었다. 누구의 빚도 아니었다.
밤이 깊자 수로 입구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두드림이 아니라, 바람에 실린 아주 낮은 노랫소리였다. 하나는 놀라 입을 가렸다. 어린 시절 과수원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오르델은 소리가 새로 녹음되는지 확인하려고 빈 종이를 관 옆에 붙였다. 잉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새 명부로 연결되는 구리판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나팔을 들고 말했다. “듣고 계신가요? 저희는 말을 적어 빚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소리 내셔도 됩니다.”
대답은 오지 않았다. 다만 관 깊숙한 곳에서 작은 금속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안쪽에서 문을 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에스텔이 조용히 말했다.
“저 노래 마지막 구절, 원래는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아일린이 물었다.
“첫 겨울에 부르던 가사는 ‘내 몫은 내게 남겨라’였어. 그런데 지금 들리는 말은...”
다시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
“돌아갈 이름을 남겨 줘.”
에스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저 목소리를... 나는 알아.”
제17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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