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은 잠깐 말을 잃었다.
과수원이라 적혀 있던 땅에는 가지가 휘어진 배나무가 아니라 철망과 빈 밭만 있었다. 서리가 내린 흙 사이로 부러진 말뚝 몇 개가 솟아 있었다. 한때 나무가 자랐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오래전에 베어 냈는지 그루터기조차 찾기 어려웠다.
하나는 멀찍이 서서 빈 땅을 바라보았다. “제가 어릴 때는 여기서 배를 땄어요. 수확 뒤 남은 걸 말려서 겨울에 나눠 먹었죠. 그런데 어느 날 왕실 보존고에서 사람들이 와서 이 땅은 원래 없던 과수원이라고 했어요.”
“땅이 없었다니요?”
“그 말을 듣고 나무를 베었어요. 지도를 고친 다음에요.”
브론은 땅을 밟아 보다가 풋내 대신 철 냄새가 난다고 했다. 무너진 지하 배수관 속에 오래된 부품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일린은 이곳이 왕실 사유지로 편입된 적이 있는지 조사하겠다고 했다. 하나는 멈칫했다.
“그럼 저희가 불법 침입한 건 아닐까요?”
“현장을 조사하기 전에 토지 소유와 출입 허가를 확인할게요.” 아일린이 대답했다. “제 신분이 공주라고 해서 아무 곳이나 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오르델이 관리도를 펼쳤다. 옛 도면에 있던 수로의 시작점은 현재 도면에서 창고 벽 안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땅속의 물길을 옮긴 기록은 없었다. 문서에서만 길을 바꾼 것이다.
도현은 흙을 파기 전에 온실 사람들이 여전히 쓰는 물길을 조사했다. 섣불리 배수관을 막으면 겨울 준비를 하던 밭이 잠길 수 있었다. 수로가 연결된 곳을 확인한 뒤에야 하나가 허락한 작은 구역부터 흙을 걷어 냈다.
도현은 직접 삽을 잡지 않았다. 왼손 손가락은 여전히 차갑고 딱딱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브론이 그를 옆으로 밀었다.
“주방장님은 사람들한테 어디 파면 안 되는지 알려 주세요. 힘쓰는 건 저희가 합니다.”
“저도 가끔은 힘이 셉니다.”
“그건 냄비 앞에서만 인정하겠습니다.”
흙을 몇 삽 걷어 내자 납작한 돌판이 나타났다. 표면에는 배꽃 문양과 작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전날 제4화덕의 기록과 같은 일련번호 계열이었다. 오르델은 자신의 장갑과 구리 도구로 돌판을 들어 올렸다.
아래에는 사람이 기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이 있었다. 그 안쪽에서 썩지 않은 배 껍질 한 조각이 발견됐다. 만져 보면 부드러웠고, 아주 미약한 온기가 있었다.
“어제 벗긴 것 같아요.”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어제 누군가 있었다고 단정하진 맙시다.” 오르델은 잔여 마법과 보존 환경을 확인하기 위해 껍질을 봉인했다. “이 온실은 시간을 붙잡아 두던 장소였습니다.”
말하자면 껍질의 신선함조차 믿을 수 없는 증거였다. 도현은 그것이 오히려 이 사건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척하면서 오래된 기록을 움직이는 장치가 이곳에도 있을지 몰랐다.
그때 수로 안쪽에서 작은 바람이 불었다. 브론이 귀를 세웠다.
“냄새가 또 바뀝니다. 배 껍질 말고... 따뜻한 보리죽 냄새도 납니다.”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보리죽은 그들이 중앙 명부실에서 직접 조리했던 음식이기도 했다. 누군가 그 요리의 냄새를 모방해 자신들을 유인하고 있는 걸까.
“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브론이 말했다.
“잠깐.” 도현이 그를 붙잡았다. “여기에는 공기 흐름도 불확실하고 무너질 위험도 있어요.”
온실 관리인들은 연기가 잘 빠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긴 관을 가져왔다. 작은 등불을 가까이 대어 기류를 살폈지만, 불꽃은 안쪽을 향해 기울다가 이내 흔들렸다. 오르델이 안에 있는 공기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정했다.
그들은 먼저 관 밖으로 짧은 두드림을 보냈다. 두 번, 한 번. 잠시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두 번째에는 하나가 어릴 때 과수원에서 부르던 짧은 노래의 박자를 두드렸다. 네 번 빠르게, 한 번 길게. 그러자 멀리서 같은 박자가 돌아왔다.
하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저건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면 몰라요.”
“옛 기록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현이 조용히 말했다.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물이 고였다. 백 년 동안 반복된 봄 속에서도 그 노래는 사람들이 실제로 일하며 불렀던 것이었다. 누군가 그것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배수관에서 나온 배 껍질을 두고 마을 안에서 작은 다툼도 생겼다. 어떤 사람은 부엌에서 살아 돌아온 누군가가 마을에 도착한 증거라며 종을 울리자고 했다. 다른 사람은 왕실의 함정이니 지하 공간을 흙으로 다시 메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두 사람을 나란히 세우고 물었다.
“우리가 지금 확실히 아는 건 뭘까요?”
“껍질이 있었다는 것.”
“그것 말고요?”
“누가 일부러 배를 가져다 놓았다는 건... 아직 모르죠.”
“맞아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정인지 구조 신호인지 확인해 봐야죠. 섣불리 종을 울리지도, 문을 묻지도 말고요.”
주민들이 조금씩 물러서자 도현은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처음 온실에 왔을 때 하나는 첫 수확을 거절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을에서 외톨이처럼 지냈다. 이제는 여러 사람이 각자 의견을 말할 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이 달라지는 속도는 장부가 고쳐지는 속도와 달랐다. 오래 걸리지만 한 번 생긴 신뢰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반면 도현 자신은 가벼운 계단을 오르는 데에도 숨이 찼다. 보호대에 든 왼손이 돌처럼 무거워 목덜미까지 통증이 올라왔다. 브론은 그런 도현을 보자마자 곁으로 와 도구 상자를 빼앗았다.
“그 상자는 제가 듭니다.”
“이 정도는 괜찮은데요.”
“그 말을 하루에 열 번 이상 하시면 제 월급에서 벌금을 매기겠습니다.”
“직원이 사장한테 벌금을 매긴다고요?”
“사장님은 에스텔 씨잖아요. 주방장님은 제 상사일 뿐입니다.”
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진짜로 상자를 내려놓자 어깨가 가벼워졌다. 누군가에게 일을 나눠 주는 것이 지는 싸움이 아니라는 걸 배우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가 그들에게 작은 장갑을 내밀었다. 과수원에서 수확하던 아이들이 쓰던 것이었다. 지금은 너무 작아 쓸 사람이 없지만 배수관에서 나온 흙을 다룰 때 유리 조각에 다치지 않도록 손을 보호할 수 있었다. 브론은 장갑 손가락이 자기 발톱에 맞지 않자 끙끙댔다.
“제가 이렇게 작은 장갑에 들어갈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안 들어갔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짧게 웃음이 터졌다. 두려운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조금 덜 외롭게 했다.
오후가 되자 온실 마을의 장인 둘이 수로 벽을 확인했다. 낡은 돌을 지지하는 쇠대가 부식되어 있었다. 통로를 따라가지 않고 위에서 점검할 수 있는 작은 덮개가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덮개에는 오래된 납 도장이 찍혀 있었다.
[식량안정위원회 제4이송지.] [본 관은 음성 인계용이 아님.]
“‘음성 인계용이 아님’이라고 굳이 적어 둔 이유는 뭐죠?” 브론이 물었다.
오르델이 납 도장 아래 미세한 홈을 살폈다. 뒤늦게 새긴 문장이었다. 원래는 ‘음식 보온용’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위에 다른 글귀를 얇게 덮은 흔적이 남았다.
도현은 에스텔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말한 첫 겨울의 통풍관이 맞나 보군요.”
에스텔은 도장을 손끝으로 쓰다듬지 않았다. 대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가만히 읽었다.
“세른이 처음 만들었던 부엌은 목소리로 사람을 세지 않았어. 온기가 닿는 곳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지. 누군가 그 통로에 이름을 붙였어.”
하나는 바람이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안에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도현은 즉시 문을 열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통로가 무너지면 안쪽에 있는 누군가를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었다.
“길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상대에게 선택할 방법부터 줘야죠.”
그들은 관 안쪽으로 공기가 통하는 짧은 응답용 나팔을 연결했다. 멀리서 누군가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대답할 수 있을 만큼만.
도현이 말했다.
“우리는 동부 온실에 있습니다. 누구든 듣고 있다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위험하면 세 번, 안전하면 한 번 두드려 주세요.”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관 안쪽에서 세 번의 소리가 터졌다.
쾅. 쾅. 쾅.
그 뒤에는 처음 보는 문장이 화덕 옆 명부에 떠올랐다.
[응답은 수령 동의로 처리됩니다.]
하나가 외쳤다. “안 돼요! 위험하다고 말한 건데 왜 동의가 되는 거죠?”
도현은 그 문장을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누군가를 구하려고 만든 신호조차 왕실 장치에 포획되고 있었다.
제17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