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이 처음 ‘마지막 한 숟갈’에 들어온 것은 왕도에 밀가루보다 재가 더 흔했던 해였다.
그날 그녀는 마녀가 아니었다. 열일곱 살의 견습 약제사였고, 아픈 사람에게 먹일 약초를 찾으러 다니던 학생이었다. 길모퉁이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시의 오래된 빵집은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에스텔은 한 사람에게 약을 나눠 주는 동안 세 사람이 쓰러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때 내가 제일 싫어했던 건 굶주림이었어.”
에스텔은 부엌의 빈 의자에 앉아 말했다. 아침빛이 창문으로 기울어져 들어오고 있었다. 브론은 평소와 달리 장난을 치지 않았고, 백도현은 기록할 종이를 앞에 놓았다. 그녀가 부탁한 것은 단 하나였다. 말을 마칠 때까지 끼어들지 말아 달라는 것.
“레온은 그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던 요리사였어. 그 사람의 수프는 다른 식당의 것보다 특별하지 않았지. 보리와 감자에 소금 조금 넣은 게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 집 앞에서 줄을 섰어. 레온은 자기 몫까지 나눠 줬거든.”
“왕실 구호위원회가 찾아왔겠군요.” 도현이 조용히 말했다.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새벽, 왕실 사람들이 그에게 기적의 곡물을 가져왔어. 아주 작은 양으로도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다고 했지. 레온은 먼저 재료를 확인하려고 했어. 하지만 위원회는 시간을 주지 않았어. 밖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쳤다. 오래된 화상 자국이 손금 사이로 뻗어 있었다.
“나는 그 재료를 검사했어. 독은 없었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어. 물건인지 살아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거든. 그래도 당시엔 배고픈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어.”
도현은 조리대 위의 검은 시럽병을 떠올렸다. 독이 아니라 계약을 품은 재료. 단순한 약제사라면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에스텔은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병 안에는 오래된 보릿가루 한 줌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병을 식탁 위에 놓고 손가락 끝으로 뚜껑을 두드렸다.
“그때 첫 수프를 만들기 전, 우리는 정말 이것밖에 없었어. 창고에 보리 몇 됫박이 남아 있었지. 시장에선 한 됫박을 사려면 집을 팔아야 했고, 거리의 아이들은 썩은 채소를 주워 먹었어.”
브론은 병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레온은 왜 가게를 닫지 않았어요?”
“닫으면 밖의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어. 그 사람은 자기가 먹을 보리도 남겨 두지 않았어. 사람들이 밥을 먹고 가면 부엌 뒤에서 물만 마셨지.”
에스텔은 한 번 웃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는 내가 레온에게 화를 냈어. 조리하는 사람이 쓰러지면 내일은 누가 밥을 만들 거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라. '네가 도와주면 되잖아.'”
“그래서 배우셨어요?” 도현이 물었다.
“양파를 써는 것부터 배웠어. 처음엔 손에 물집이 잡혔지. 레온은 내가 잘못 자른 채소도 버리지 않고 다져 넣었어. 그 식당은 완벽한 요리를 만드는 곳이 아니었거든. 누구든 오늘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면 됐어.”
도현은 말없이 병의 보릿가루를 살폈다. 자신이 매일 쓰는 값싼 재료였다. 한때 누군가에게는 집 한 채만큼 값진 것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기술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첫날 왕실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에스텔이 말을 이었다. “우린 둘 다 기뻤어. 드디어 재료가 생긴다고 생각했거든. 레온은 납품 장부를 자세히 보려 했지만, 왕실 사람들은 시간을 재고 있었어. 식량이 오지 않으면 바깥의 아이들이 죽는다고.”
“구호가 필요한 사람을 인질로 삼았군요.”
“그때는 그 말이 잔인해서 입 밖에 내지 못했어. 이제는 알아.”
그녀는 병을 도로 집어넣었다. 도현은 에스텔이 보릿가루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조금 이해했다. 과거의 선택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선택 이전에 자신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최초 구호 수프가 완성되고 사람들은 살아났어. 며칠 사이 병상이 비었고 거리의 울음도 줄었지. 왕실은 레온을 영웅이라고 불렀어. 나도 그 옆에 서 있었고.”
“그 뒤에요?”
“첫 번째 종이 울렸어.”
에스텔은 잠깐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어떤 사람은 아내의 이름을 잊었고, 어떤 사람은 걸을 수 없게 되었고, 어린아이는 어머니 얼굴을 잃었어. 모두가 그날 수프를 먹었거나 먹은 사람의 가족이었지. 우린 왕실에 알렸지만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
브론이 주먹을 쥐었다.
“알면서도 먹였다고요?”
“대가가 있다는 걸 숨긴 거야. 왕실은 저주를 없애려면 누군가 마지막 그릇을 먹어야 한다고 했어. 레온은 당연히 자기가 먹겠다고 나섰지.”
도현은 숨을 삼켰다.
“그게 제7조리실의 대표 조리사였군요.”
“처음부터 대표 조리사는 아니었어. 그는 자기 몫을 먹으려 한 거야. 그런데 계약은 자기가 구한 사람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까지 청구했지. 한 사람의 몸에 담을 수 없는 양이었어.”
레온은 마지막 순간 그릇을 엎었다고 했다. 수프의 일부가 돌바닥에 쏟아졌고, 남은 마지막 숟갈은 아무도 먹지 못했다. 그 덕분에 완전한 정산은 미뤄졌지만 식당과 제7조리실이 서로 묶였다. 레온은 불을 끄지 못하는 조리실에 갇혔다.
“나는 그를 구하려고 식당의 문을 붙잡았어.” 에스텔이 말했다. “그때 식탁이 나한테 물었지. ‘문을 지킬 자가 필요하다. 남을 수 있겠느냐?’ 나는 남겠다고 했어.”
“그래서 지금까지 운영자로 남아 있는 거군요.”
“그래. 그런데 그 계약에 또 다른 문장이 있는 줄 몰랐어. 문지기는 새 요리사가 들어오면 비밀을 보존해야 한다는 문장.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만들었지.”
도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말을 할 수 없었다고요? 지금은 하고 계신데요.”
“네가 두 번째 시험에서 새 장부를 만들었잖아. 처음으로 기존 계약 밖의 거래가 기록됐어. 그 순간 내 침묵도 조금 느슨해진 거야.”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삼고 싶진 않아. 말을 돌리거나 숨긴 건 내 선택이기도 했으니까.”
식당 안에는 한동안 벽시계 소리만 들렸다. 도현은 자신이 이 세계로 떨어진 날을 떠올렸다. 골동품 주방 문과 가느다란 손.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를 여기로 데려온 것도 당신입니까?”
에스텔은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연 건 나야.”
브론이 벌떡 일어났다.
“사장님!”
“왕실이 대표 조리사를 다시 세우려고 하는 걸 알았어. 레온이 영원히 갇히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었지. 다른 세상에 사는 요리사라면 오래된 계약을 다르게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문을 열었어.”
“저를 골랐다는 겁니까?”
“아니. 나는 누가 들어올지 몰랐어. 문이 닿은 곳에서 네가 밤늦게까지 요리를 하고 있었고… 남은 음식을 직원에게 싸 주는 모습이 비쳤어.”
도현의 머릿속에 작고 선명한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 한국의 식당 뒷문. 막내 직원이 식사를 못 했다고 말하자 그는 남은 재료로 작은 파스타를 만들어 줬었다. 그 장면 뒤에 쓰레기장과 비가 쏟아지던 골목이 이어졌다.
“그걸 보고 저라면 희생해 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에스텔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졌다.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차가웠다.
“저는 누군가 밥을 먹는 게 좋습니다. 그렇다고 제 인생을 가져가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알아.”
“몰랐던 거죠. 아니면 알려고 하지 않았거나.”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하지 않는 모습이 도현을 더 화나게 했다. 차라리 마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으면 이해하려 애쓸 구실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브론은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에스텔은 고개를 숙였고, 도현은 창밖만 바라봤다. 토마가 주방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분위기를 읽고 다시 나갔다. 한참 뒤 브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은 주방장님을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럼 이제는 돌려보내야죠.”
“나도 그러고 싶어.”
도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돌아가는 건 제가 정하겠습니다.”
늑대인간은 움찔했다. 도현은 브론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화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선의도 자신의 선택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다른 형태의 강요가 된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나중에 제가 돌아간다고 하면 아무도 막지 말아 주세요. 반대로 여기서 더 확인할 일이 있다면 그것도 제가 고르게 해 주세요.”
브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도 한참 만에 대답했다.
“약속할게.”
도현은 그 약속을 장부에 적었다. 앞의 두 줄은 이미 마르고 있었다. 식당 비용은 식당에서 부담한다. 손님에게 숨겨진 대가를 청구하지 않는다. 세 번째 줄은 잠시 망설인 뒤 적었다.
[누구의 선택도 대신하지 않는다.]
이것은 식당 규칙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도현은 손목의 검은 무늬를 천으로 덮고 비어 있는 부엌 쪽으로 걸었다. 끓여야 할 수프가 남아 있었다.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까지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도현은 자리를 떴다. 창고 뒤에 기대어 놓인 낡은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붙잡았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반대편에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있고, 이쪽에는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쪽도 남이 정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에스텔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식당을 그만두겠다면 막지 않을게.”
“당분간 여기서 일은 하겠습니다. 아이들이 머물 곳도 필요하고요.”
“도현….”
“하지만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는 전부 해 주세요. 제가 무엇을 포기할지, 무엇을 지킬지는 제 몫입니다.”
에스텔은 눈가를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가 되자 그녀는 창고의 오래된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레온이 남긴 숟가락과 비슷한 도구들이 있었다. 수년간 하나씩 잃어버렸던 요리사들의 이름표, 저주를 흡수하다 병든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기록. 그러나 그중에는 사망 표시가 없는 이름도 있었다.
“왜 이 사람들은 기록이 없습니까?”
“정산 대상에서 빠진 사람들이야. 살아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
도현은 이름을 하나씩 살폈다. 그러다 오래된 메모를 발견했다.
[제7조리실 잔여 인력은 수로 아래 제8창고로 이송.]
[인계 책임자: 마리아.]
그는 종이를 붙잡았다. 리아의 어머니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전에 본 자료에서는 마리아가 ‘소멸 처리’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죽은 게 아닐 수도 있겠네요.”
에스텔은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
“그 문서는 어디서….”
“이제 질문은 나중에 하시죠.”
도현은 브론에게 외투를 가져오라고 했다.
“제8창고를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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