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보존고는 조용했다.
겉으로는 그렇다는 뜻이었다. 문을 열면 수백 개의 유리함 속에서 봉인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오래된 마법 문서들은 자신을 꺼내 달라는 듯 표지를 들썩였다. 왕실의 위엄은 전부 제자리에 있었지만, 그 안에 기록된 사람들이 정말 제자리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도현은 보존고 문턱에서 멈췄다. 왼손이 여전히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국영 배식 창고에서 떨어져 나온 주철 국자의 기록을 오르델에게 맡기고 빈 주머니만 가지고 들어왔다.
“여기서는 무엇이든 자기 이름으로 열람한다는 기록이 붙습니다.” 오르델이 말했다. “일반 열람은 괜찮지만 제0봉인 문서에 접근하면 추가 조건이 나올 수 있어요.”
아일린이 왕궁 서기관 두 명을 불렀다. 서기관들은 그녀가 왕실의 일괄 제공 완료 권한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의아해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모든 문서를 열람하실 권한이 없으실 텐데요.”
“맞습니다. 제가 가진 권한으로 볼 수 있는 문서만 신청할게요. 그 밖의 자료는 별도 증인을 두고 절차를 확인하겠습니다.”
도현은 그 답이 마음에 들었다. 권한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기록하면 됐다. 남의 권한을 훔쳐 들어가는 순간 증거가 다시 흐려졌다.
그때 보존고 반대쪽 문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리데아였다. 만찬 때 왕실 숟가락을 들고 나타났던 왕위 보존관의 얼굴에는 아직 피로가 남아 있었다.
“제3실을 찾으러 왔군요.”
에스텔이 앞에 나섰다. “갖고 있습니까?”
“지금은 보존고의 공적 소장품입니다.”
“원래는 세른의 것이었어.”
리데아가 에스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 아닙니까?”
말이 날카로웠다. 에스텔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리데아는 그들을 가장 안쪽 선반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세 가닥의 실을 묶은 것처럼 생긴 청동 받침이 있었다. 유리함 안에는 가늘고 검은 끈 한 가닥이 놓여 있었다. 실이라기보다 오래된 밀가루 자루에서 뽑아낸 삼실 같았다.
설명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0봉인 증언 접속 매개. 왕실 공용.]
그 바로 아래에는 더 새로운 문장이 있었다.
[증언 주체 부재 시 접속 매개를 통해 대리 응답 가능.]
“이게 화덕 속 목소리를 만드는 겁니까?” 브론이 물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오르델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듣던 목소리 모두가 이 끈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도현은 설명판의 첫 글씨와 두 번째 글씨의 색이 다르다는 점을 보았다. 유리함을 열면 저주가 이동할 수 있다는 경고도 있었다.
“유리함을 열 필요 없습니다. 등록 이력부터 보여 주세요.”
리데아는 고개를 저었다. “등록 이력은 왕궁 대관 절차를 지탱하는 문서입니다.”
“그럼 제가 임의로 꺼내 보겠습니다.” 아일린이 말했다.
리데아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도현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왕궁을 책임지는 사람은 공주였지만, 권한을 어떻게 쓰는지 공개해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일린은 오르델에게 외부 참관인을 부르게 했다. 제1화덕에서 돌아온 도르센과 왕궁 세척실의 타니아가 기록 확인인으로 들어왔다. 도르센은 아직 정식 직위를 회복하지 못했으나, 자신의 이전 집행 명령과 관련된 증거를 확인할 당사자였다.
네 사람이 문서 보관 이력을 펼쳤다.
첫 번째 기록에는 ‘에스텔로부터 임시 보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두 번째에는 ‘왕실의 보존을 위해 장기 보관으로 변경’이라고 적혔다. 날짜는 서로 오십일 년이나 차이 났다.
“이 사이에 누가 사용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리데아는 답하지 않았다.
오르델은 위쪽 종이 사이에 눌린 작은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어린아이의 글씨로 보이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엄마의 목소리로 대답이 왔지만 엄마는 아직 집에 안 왔어요.]
서명은 지워져 있었다. 도현은 종이를 더 가까이 보려다가 손을 뗐다.
브론이 낮게 말했다. “이 목소리가 진짜면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 텐데요.”
“가짜여도 누군가를 찾으러 가게 만들 수 있겠죠.” 도현이 대답했다.
리데아는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왕실은 사람이 사라져도 행정이 멈추지 않게 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증언이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이 언제까지나 응답할 수 있다고 여겼지요.”
“사람이 살아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요?” 아일린이 물었다.
“그때는 그것이 효율이라고 불렸습니다.”
“지금은요?”
리데아는 유리함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일린은 편지를 그대로 공개하지 말라고 했다. 아이가 직접 적은 이름도 없고, 어머니의 행방도 확인되지 않았다. 잘못하면 누군가 오래된 문장 하나로 다른 사람의 사연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었다.
“왕실이 이 편지에 답장한 기록이 있나요?”
오르델이 봉인번호를 대조했다. 답신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편지를 보존고로 옮겼다는 결정만 남아 있었다. 결정 이유는 ‘향후 접속 품질 개선을 위해’였다.
“누군가 엄마를 찾았는데 왕실은 목소리의 품질을 확인한 모양이군요.” 도현이 말했다.
리데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 기록이 만들어질 때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겠죠.” 아일린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리데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무엇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녀는 조용히 서랍에서 오래된 열람 장부를 꺼냈다. 역대 보존관이 남긴 기록이었다. 몇몇은 자신이 들은 목소리가 원본과 같다고 적었고, 몇몇은 원본과 달랐다고 적었다. 경고가 붙은 줄도 있었다.
[응답이 지나치게 신속할 경우, 현재 명부에서 생성한 문장일 수 있으므로 독립 대조 필요.]
그 경고는 나중에 붉은 도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기관 안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군요.” 오르델이 말했다.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심을 적는 것과 그 기록을 유지시키는 건 다른 일이었습니다.” 리데아가 답했다.
도현은 왕실의 부서들이 전부 같은 생각으로 움직였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장부를 고치려던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침묵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추측으로 범인을 정하지 않는 일이었다.
“첫 겨울의 부엌에서 목소리가 반응한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의 생사를 알 수는 없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우리가 이 끈을 열고 확인할 건 목소리의 전달 경로예요. 그리고 그다음에야 그 목소리가 누구였는지 찾아야 합니다.”
도르센은 보존고 출입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는 과거 제1화덕의 수령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고 폐쇄 명령을 내린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 장부의 경고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제가 현장에서 그때 ‘정말 받았습니까’ 하고 한 번만 물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그랬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죠.” 도현이 답했다. “지금은 앞으로 무엇을 확인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도르센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증언란을 채웠다. ‘본인은 현장 수령을 확인하지 않은 명령을 집행했다.’ 그 문장을 보는 동안 그의 손이 떨렸지만 지우지는 않았다.
그 순간 검은 끈이 유리 안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끝을 당긴 것 같았다.
[증언 접속 요청 수신.]
[발신지: 첫 겨울의 부엌.]
[요청자 표시: 세른.]
에스텔이 숨을 삼켰다. 도현은 통신 요청 아래에 뜬 한 줄을 더 읽었다.
[요청자 생존 확인 절차: 생략 가능.]
“생략하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에 놀란 리데아가 돌아섰다.
“생략하지 말고 확인하세요. 우리가 찾는 건 말을 잘하는 장부가 아니라, 사라진 사람들입니다.”
검은 끈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유리함 맨 아래에서 누군가 아주 오래전에 새긴 글씨가 드러났다.
[제3실은 목소리를 전달한다. 사람이 되지 않는다.]
제16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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