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은 화덕의 목소리를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첫 겨울의 부엌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세른과 마주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모습을 이야기해 달라는 말에 에스텔은 늘 말을 돌렸다. 도현도 억지로 묻지 않았다. 무엇을 숨겼는지 알아내는 일과 누군가에게 기억을 강제로 토해 내게 하는 일은 달랐다.
이번에는 에스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른은 요리를 하면서 매듭을 묶었어.”
그녀는 앞치마 끈을 풀어 세 번 접었다. 한 가닥은 위로, 다른 한 가닥은 아래로 지나가게 묶었다.
“장작을 맡긴 마을, 곡식을 맡긴 마을, 실제 먹은 사람. 세 가지를 구별하려고 말이야. 한 장부에 전부 적어 놓으면 누가 제공하고 누가 받았는지 섞이기 쉽다고 했지.”
오르델은 기록에서 세 갈래 매듭이 등장한 위치를 찾았다. 제1화덕의 돌판, 제2저장고의 봉인, 중앙 명부실의 구왕력 원본에도 같은 모양이 있었다. 처음에는 조리자 서명으로 여겨졌지만 그것만을 뜻하지는 않았다.
“이 매듭이 있다면 내용의 세 가지 근거를 따로 찾아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그거야.” 에스텔이 말했다.
그녀는 매듭 끝을 손가락으로 감았다. 조금만 당기면 매듭이 조여졌다. 하지만 아래쪽의 짧은 실을 당기자 쉽게 풀렸다.
“세른은 이렇게 묶었어. 혹시 잘못 적었다면 풀어서 다시 묶을 수 있게.”
도현은 국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살폈다. 열여섯 개의 작은 화덕 사이에는 도마처럼 생긴 넓은 돌판이 있었다. 판 위에는 세 가닥의 홈이 나 있었다.
“그럼 저기가 기록을 나누는 자리겠군요.”
헥터가 돌판을 닦자 세 칸으로 분리된 글씨가 나타났다. 첫 칸은 제공 물자. 둘째 칸은 조리. 셋째 칸은 실제 수령이었다. 지금까지 왕궁에서 본 장부들은 세 칸을 하나로 합쳐 놓은 형태였다.
브론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프 한 그릇 만들 때마다 이렇게 복잡하게 했나요?”
“평소에는 몰라도 될 수 있죠.” 도현이 말했다. “문제 생겼을 때 누가 어디서 잘못했는지 보려고 남긴 겁니다.”
헥터는 말린 콩 몇 알을 꺼내 첫 칸에 놓았다. 오르델은 가져온 콩을 물자로 기록했다. 둘째 칸에 아직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더니 돌판의 글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공 물자 보관. 조리 미완료.]
그다음 헥터가 작은 불 위에 냄비를 올렸다. 그러나 이곳의 중앙 화덕이 아니라 가지고 온 여행용 화로를 사용했다. 실제로 콩을 삶은 뒤 접시에 옮겨 놓자 둘째 칸에서 희미하게 빛이 났다.
[조리 확인. 수령 미확인.]
도현은 셋째 칸을 바라보았다.
“누구에게 억지로 먹이지 마세요. 이건 검증입니다. 먹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부터 물어야 합니다.”
아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럼 괜찮습니다.”
브론은 잠깐 고민하다 한 손을 들었다. “저는 아까부터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먹으면 저주가 넘어오나요?”
“바로 그 위험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먹지 마세요.” 에스텔이 대답했다.
도현은 접시 대신 밀봉한 작은 용기에 콩을 넣고 밖으로 가져갈 것을 제안했다. 바깥에서 먹는 사람이 나오면 별도의 증언을 받아 비교하면 된다. 돌판은 끝내 셋째 칸을 비워 둔 채 빛을 잃었다.
[수령 미확인 상태 보존.]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돌판의 원래 원칙은 미완료를 미완료로 남기고 있었다.
헥터는 삶은 콩을 꺼내 그릇에 나눠 담았다. 도현은 젓가락 대신 작은 집게로 한 알을 들어 단면을 살폈다. 겉은 잘 익었지만 속에는 아직 단단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불을 조금 더 약하게 하고 뜸을 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손이 아프시면서도 콩 익은 상태는 보시는군요.” 아일린이 물었다.
“맛을 잘 모를 때는 촉감이나 익힌 시간을 믿어야죠.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으니까 확인하고 조정하는 거고요.”
그러나 도현에게는 그 말이 쓰라렸다. 처음 이세계에서 음식을 만들 때는 혀끝으로 맛을 보고 곧바로 조절했다. 이제는 어떤 맛은 분명하고 어떤 맛은 기억 속에서 뜬금없이 빠져 있었다. 소녀에게 엄마의 이름을 돌려주던 날 사라진 미역국의 맛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국에서의 어머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믿어 온 감각이 흔들린다는 사실은 두려웠다.
에스텔이 그를 지켜보다 말했다. “세른은 조리법을 외우게 하지 않았어. 잘못되면 다시 먹어 보고 고치라고 했지.”
“그러면 저와 생각이 비슷했네요.”
“하지만 그는 손님이 맛있다고 말해도 꼭 묻는 게 있었어. 네가 정말 먹고 싶었던 음식이냐고.”
아일린은 그 말을 듣고 최근에 자신이 거절했던 대관 만찬의 마지막 빵을 떠올렸다. 그 빵은 누군가 왕위의 정당성을 위해 올려놓았을 뿐, 그녀가 먹고 싶다고 한 적이 없었다. 부엌에 앉은 사람의 욕구와 장부의 명령이 다를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왕궁에서는 가장 늦게 배웠다.
오르델은 세 칸 기록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사례를 더 적었다. 곡식을 제공했으나 조리하지 못한 경우, 조리했으나 수령인이 거부한 경우, 만든 사람이 음식을 직접 먹은 경우. 세 경우는 결과가 달라야 했다.
“왕실 서식은 전부 같은 칸으로 처리됩니다.” 그가 말했다. “수령 거부를 ‘다음 식사에 자동 청구’라고 적은 양식도 있더군요.”
“거부는 거부일 뿐입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먹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먹게 하면 음식이 아니라 벌이죠.”
브론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제가 식당에서 못 먹겠다고 거절한 검은 버섯도 외상으로 안 잡히는 거죠?”
에스텔이 즉시 말했다. “그건 직원 시식이었잖아.”
“시식도 거부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앞으로는 시식 전에 무엇인지 먼저 말씀해 주세요.”
에스텔은 눈을 감고 느릿하게 한숨을 쉬었다. 수십 년 묵은 마법 계약을 다루는 자리에서 종업원의 시식 동의 규정을 바꾸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그 질문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필요한 일이라며 원하지 않는 일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아일린은 오르델의 세 칸을 다시 읽었다. 제공자가 약속했다고 해서 조리가 끝난 것도 아니고, 조리가 끝났다고 해서 누군가 먹은 것도 아니었다. 세 칸 가운데 하나를 빠뜨릴 때마다 사람이 사라지거나 빚이 생겼다. 그 사실을 왕국 전체가 알아야 했다.
그녀는 첫 겨울의 장부를 복사해 공공 기록으로 공개할 수 있을지 물었다. 오르델은 오래된 기록 안에 이름과 개인 사정이 포함되어 있어 전부 공개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사실을 밝히는 일에도 그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럼 어떤 부분까지 보여 줄 수 있는지 따로 구분하죠.” 아일린이 말했다. “예전 사람들을 도구로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우리가 기록을 무단으로 퍼뜨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때 에스텔이 중앙 화덕 옆에서 낡은 천 조각을 발견했다. 먼지와 기름으로 검게 변한 천이었다. 끝에는 세 갈래 매듭이 있었다.
“이건…… 세른 거야.”
천을 펼치자 안쪽에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굶주린 자의 몫을 남겨 둘 것. 거절한 사람의 이름을 채무로 바꾸지 말 것.]
글씨는 아일린이 처음 공개한 원문과 비슷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세 번째 실이 사라지면 목소리를 믿지 말 것.]
도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세 번째 실이요?”
그는 천의 매듭을 확인했다. 정확히 세 가닥이어야 할 자리에 두 가닥만 남아 있었다. 한 가닥은 칼로 잘라낸 듯 끝이 반듯했다.
화덕 속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에스텔.”
마녀가 고개를 들었다.
“세른?”
“그날…… 네가 마지막 실을 가져갔잖아.”
에스텔은 천을 떨어뜨렸다. 화덕 안에서는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났다.
도현은 그 웃음이 누구의 것인지 아직 몰랐다. 다만 세른이 남긴 경고를 떠올리며 에스텔 앞에 섰다.
“목소리만 믿고 따라가지는 맙시다.”
제16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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