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은 본능적으로 화덕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왼손이 굳어 있는 것을 깨닫고 멈췄다.
푸른 불꽃은 장작도 없이 돌 사이에서 일어났다. 불길이 닿은 벽에 서리가 끼었다. 뜨거워야 할 자리가 얼어붙는 광경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에스텔이 말했다.
그녀는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작은 방호진을 펼쳤다. 화덕을 감싸는 대신 사람들의 발목과 출구 사이에 진을 그렸다. 길이 막히면 도망칠 수 있어야 했다.
“세른이 말한 게 맞다면 불을 피우면 안 된다는 건데, 저건 누가 켠 거죠?” 브론이 물었다.
“아직 아무도.” 도현이 대답했다.
헥터가 낡은 화덕의 옆구리를 살폈다. 문에 달린 쇠고리는 꺾인 채 봉인되어 있었다. 왕궁의 화덕이라면 점화 전에 연도와 장작 수납구를 열어야 한다. 이곳은 연도부터 막혀 있었다.
“이 상태로 불을 지피면 연기가 나가지 못합니다.”
“그럼 끕시다.” 아일린이 말했다.
“불인지부터 확인해야 해요.”
도현은 금속 막대 끝에 젖은 헝겊을 묶었다. 브론이 길이를 늘리고, 에스텔이 뒤에서 잡아 주었다. 막대가 푸른 불길에 닿자 헝겊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천에 새까만 글씨가 배어들었다.
[제공 예정분 1건. 수령 확인 대기.]
“이건 불이 아니라 기록이군요.” 오르델이 숨을 내쉬었다.
“불처럼 보이는 기록이요. 그렇다고 안전한 건 아닙니다.”
헥터는 주방의 오래된 구조를 눈으로 더듬었다. 중앙 화덕 옆에는 작은 손잡이들이 열여섯 개 있었다. 각 손잡이는 벽의 작은 화덕 하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몇몇 손잡이는 이미 부서져 있었다.
“이런 화덕을 본 적 있소.” 헥터가 말했다. “겨울에 공동 부엌을 운영하던 마을에서요. 가운데 큰 화덕을 쓰기 전에 옆 화덕의 연도를 먼저 열어야 했습니다. 안 그러면 열이 가운데에 갇혔죠.”
아일린이 손잡이 하나를 잡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손잡이 아래에 작은 은판이 붙어 있었다.
[조리자 이름과 수령 책임을 등록하십시오.]
도현은 웃음이 났다. “아무나 당겨도 되는 손잡이에 이름부터 적으라니.”
그는 아래쪽의 먼지를 긁어냈다. 은판 밑에서 원래 표식이 드러났다. 각각 다른 문양의 밀 이삭이었다. 한 묶음에는 세 알, 다른 묶음에는 다섯 알이 그려져 있었다.
“옛날 표식은 이름이 아니네요.”
오르델이 도면을 펼쳤다. “제1화덕에서 본 공동 주방 표식과 같습니다. 서로 다른 마을이 보낸 장작과 곡식의 수량을 구별하던 문양입니다.”
“누가 얼마를 가져왔는지 표시하던 곳에 누가 빚을 갚아야 하는지를 덧씌운 거군요.” 아일린이 말했다.
그녀가 왕실 봉인 권한으로 은판을 떼어도 되는지 묻자 오르델은 즉답하지 않았다. 증거가 훼손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고정 못과 글씨를 먼저 그려 둔 뒤 하나씩 떼어 냈다. 안쪽에는 손잡이를 고정한 거친 밧줄이 있었다. 이제야 원래 기계가 보였다.
열여섯 개의 손잡이 중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여섯 개뿐이었다. 브론과 헥터가 힘을 합쳐 첫 손잡이를 당기자 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도현은 목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하나만 열지 마세요.” 그가 말했다. “한쪽으로 열이 몰리면 돌이 갈라질 겁니다.”
그는 헥터에게 화덕을 고치는 일을 맡겼다. 자신은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오르델과 아일린은 각 손잡이의 원래 표식과 뒤에 붙은 문구를 기록했다. 브론은 터질 듯한 밧줄을 귀와 코로 찾았다.
“여기요! 이건 끊어지기 직전입니다.”
마침내 네 번째 연도가 열렸을 때 푸른 불길의 색이 옅어졌다. 벽에 맺혔던 서리가 녹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던 문구는 새로운 내용을 표시했다.
[수령 확인 대기: 유지.]
[강제 점화: 지연.]
“끄지는 못했군요.” 아일린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금 당장 타오르는 건 막았습니다.”
잠시 쉬는 사이 아일린은 먼지 묻은 벤치에 앉았다. 왕궁에서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했던 그녀는 지하에서 처음으로 허리를 깊이 굽혔다. 장갑 속의 검은 왕관이 욱신거렸다. 저주가 그녀에게만 남아 있는 동안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왕국의 모든 사람이 이미 식사를 받았다고 선언할 때마다 그 무늬는 어깨까지 타오르는 듯했다.
“제가 왕이 되면 이 모든 부엌을 고쳐야 할까요?”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부엌마다 실제 쓰는 사람이 다를 테니까요.”
“왕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배웠어요.”
“책임진다는 게 전부 혼자 손대는 뜻은 아닐 겁니다. 제가 여기 화덕을 고친다고 나섰으면 무너뜨렸을지도 모르죠. 헥터 씨가 있어서 손잡이부터 확인한 겁니다.”
헥터는 잠시 듣고 있다가 민망한 듯 헛기침했다. 그는 나무 도마를 뒤집어 놓고 화덕의 구조를 그렸다. 연도가 열여섯 방향으로 뻗고, 중앙에는 열을 모으는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구조를 따라 그리다 보니 이상한 부분이 드러났다.
“여기는 원래 음식을 데우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화덕을 켜는 손잡이는 여기 있는데, 음식을 넣는 선반은 바깥쪽으로만 열려 있어요. 중앙에는 음식을 넣을 구멍이 없습니다. 연도들이 안쪽으로 열을 모으는 게 아니라 바깥으로 보내는 구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도현은 그림을 살폈다. 큰 화덕 하나가 열여섯 부엌의 열을 빼앗아 혼자 타오르는 기계가 아니라, 한곳에서 여러 곳을 데우도록 연결한 장치였다는 설명이었다. 누군가 그 연결을 거꾸로 돌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부엌에서 준비한 음식을 중앙으로 모아, 모두 제공했다고 주장하기는 쉬웠겠군요.”
헥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작동하도록 개조됐다면요.”
그들은 연도의 방향을 표시했다. 처음부터 모든 화덕이 왕실 소유였다는 기록은 아직 없었다. 장작도, 실제 조리할 장소도 나눠 쓰던 공동 부엌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브론은 청소 도구를 찾다가 굵은 빗자루를 발견했다. 손잡이에는 오래된 이빨 자국이 있었고 털은 거의 다 빠져 있었다.
“제가 쓰기엔 너무 작네요.”
“그건 입으로 잡는 게 아니라 손으로 잡는 겁니다.” 도현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냥 이빨 자국을 발견했어요. 늑대인간도 일했나 봅니다.”
헥터는 수십 년 전 늑대인간 종업원이 왕궁에 출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옛 부엌의 일꾼이 누군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존재까지 지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빗자루를 버리지 않고 나무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때 중앙 화덕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불…… 피우지 마.”
에스텔이 한 발 다가갔다. “세른, 내 목소리 들려?”
답은 없었다. 대신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사람의 기침처럼 생생했다.
도현은 바닥에 조심스럽게 귀를 대었다. 기침이 아니라 쇳조각이 서서히 식으며 부딪히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그는 소리를 듣고도 무엇을 들었는지 확정할 수 없었다.
“어떤 기록이 반복 재생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에스텔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거야?”
“아뇨. 처음 듣는 문장이 나오면 대답해 보는 겁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 녹음일 가능성이 높고, 우리 질문에 맞춰 바뀌면 그다음에 생각해 봐야죠.”
도현이 물었다. “여기서 불을 피우면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깁니까?”
침묵이 이어졌다.
푸른 불꽃이 흔들렸다. 한참 뒤 화덕 깊은 곳에서 처음과 다른 말이 들려왔다.
“열일곱 번째…… 입이 열린다.”
오르델이 기록하던 펜을 멈췄다.
“그 말은 원본에도 없는데요.”
화덕 바닥에서 작은 주철 국자가 혼자 움직였다. 국자의 손잡이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앉은 사람이 받아 들라는 듯이.
[미수령 제공분 대리 처리 도구 활성화.]
도현은 국자에 손을 대지 않았다.
“국자도 영수증이 되는 부엌이라니. 세른이 왜 불을 피우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네요.”
그러자 화덕 속 목소리가 아주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먼저…… 누가 배고픈지 물어.”
제16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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